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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岳飛)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by 중은우시 2018. 8. 7.

글: 중리심타(衆裏尋她)





악비의 사후 5명의 자녀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다: 장남은 피살되고, 장녀는 자살했으며, 나머지 3명은 생불여사였다.


남송 소흥11년(1141) 제석야(除夕夜), 임안성의 백성들이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즐겁게 새 해를 맞이하고 있을 때, 악비, 악운(岳雲)부자는 풍파정(風波亭)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악비는 항금을 주장했고, 시종 금나라외의 전투에서 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마혁과시(馬革裹屍)하여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지 못하고, 억울한 사건으로 죽임을 당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조야는 깜짝 놀란다


비록 사람들은 모두 악비가 억울하다고 여겼지만, 한세충이 악비를 위하여 억울하다는 점을 얘기한 것을 제외하고, 진회가 '막수유'라는 말로 가볍게 악비의 죄를 묘사한 후, 누구도 감히 일어나서 이 사건에 대하여 말을 하지 못했다.


악비가 죽은 후 송나라조정은 그의 처자직을 어떻게 대했을가?


악비의 첫번째 부인은 유씨(劉氏)이다. 남편이 군대에 들어가며 고향을 떠나자, 다른 사람에게 개가한다. 부인개가는 송나라때 치욕이 아니고 통상적인 일이었다. 다만 후인은 명청의 정절관념의 영향으로, 습관적으로 악비의 후처인 이왜(李娃)를 그의 본부인이라고 부른다. 이왜는 악비보다 2살이 많았고, 결혼때 이미 이립(而立, 30)에 가까운 나이였다. 정상적인 혼인연령을 한참 지났다.


악비에게는 모두 5명의 아들이 있다. 연령으로 보면 악운과 악뢰(岳雷)는 분명 유씨 소생이다. 악비가 죽을 때, 악운은 23살, 악뢰는 16살로 둘은 모두 결혼했다. 그리고 자녀가 4명이 있었다. 삼남 악림(岳霖)은 12살, 사남 악진(岳震)은 7살, 오남 악애(岳靄)(나중에 송효종이 악정(岳霆)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는 3살이었다. 악정은 악비의 장손인 악보(岳甫)보다 1살이 어렸고, 악비의 장손녀 악대낭(岳大娘)과는 같은 나이였다.


악비가 죽을 때, 부친을 따라 출생입사(出生入死), 충봉함진(沖鋒陷陣)하던 악운은 같이 피살된다.처자식은 영남(嶺南)으로 유배간다. 차남 악뢰는 하옥되었다가, 관련혐의를 벗은 후, 송률(宋律)에 따라 감옥에 들어가 부친을 돌본다. 악뢰는 부친과 인생최후의 시간을 보내고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고 심신이 모두 지친다. 부친이 명예회복되는 날까지 버티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는다. 이왜는 아들을 데리고 산넘고 물건너 연장지지(煙瘴之地)로 간다. 악림, 악진은 혜주로 유배가고, 지방관리는 그들을 절 하나에 안치한다. 형제 2명은 자유를 잃고, '겨우 몸만 들어가는' 토옥 안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낸다.


20년후, 송고종은 양심이 발현되어 조서를 내려 악비의 처자를 구금에서 해제하도록 명한다. 소흥32년(1162년) 고종이 죽고, 송효종이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이 해에 이왜는 62살이고, 악림은 33살, 악진은 28살, 악애는 24살이었다. 송효종은 성지를 내려, 악림을 우승사랑(右承事郞, 정구품, 문직)에 복직시키고, 악진, 악애는 보의랑(保義郞)(정구품.무직)이 된다; 악보, 악신(岳申), 악경(岳經), 악위(岳緯), 악강(岳綱), 악기(岳紀)는 같이 승신랑(承信郞)(종구품, 무직)이 된다.


범죄가족에서 체제의 관리가 되었으니 고진감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효종은 비록 악비를 명예회복해주었지만, 모든 것은 제도로 처리한다. 그저 악비의 후인들에게 지위가 아주 낮은 무직을 안배했다. 악립의 우승사랑은 악비의 생전에 이미 음서로 얻은 관직이었다. '우(右)'자가 붙었다는 것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로 관직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주(潭州, 지금의 호남성 장사)지방의 관리가 올린 글을 보면, 악운이 죽은 후, 그의 처인 공씨(鞏氏)는 자녀를 데리고, 숙부인 악뢰 일가와 함께 담주로 가서 거주한다. 담주에는 악운의 아들 2명이 있었다. 악보가 25살, 악신이 22살, 딸인 악대낭이 24살이었다; 악뢰에게는 4명의 아들, 2명의 딸이 있다. 장남 악경이 21살, 차남 악위가 20살, 삼남 악강이 14살, 사남 악기가 12살, 장녀 악이낭이 23살, 차녀 악삼낭이 17살이었다.


양송의 법정결혼연령이 남자 15, 여자 13살이다. 이렇게 보면 장기간 구금되어 자유를 잃었으므로 악운과 악뢰의 3딸은 모두 혼인적령기를 넘겼고, 노처녀가 된다.


악림의 장남 악침(岳琛), 악비의 사위 고조(高祚)는 승신랑이 된다. 악비의 딸은 이름이 안낭(安娘)인데, 전해지는 바로는 부친의 억울한 사건으로 곳곳에 억울함을 호소하러 다녔다. 그러다가 순라를 도는 군졸에게 저지당하자, 분노하여, "은병(銀甁)을 안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그녀를 은병낭자(銀甁娘子)라 불린다.


비록 이십여년간, 악비의 처는 사방을 떠돌았고, 엄청난 고초를 겪었지만, 새로 삶을 얻은 후, 여전히 감격하여 황상에게 황은에 감사하는 글을 올린다. 악립, 악진, 악애형제, 악비의 장손 악보도 감사하는 글을 올린다. 거기에는 비분강개하여 그동안의 억울하고 힘들었던 점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악비의 몇명 아들 주에서 악림의 관직이 가장 높은데, 기껏 종육품의 조청대부(朝請大夫)이다. 원래 장수의 후손이지만, 악비의 후인은 모두 무를 버리고 문을 택한다. 그의 손자 악가(岳珂)는 저술이 풍부했다. <정사(桯史)>등 작품을 남긴다. 이렇게 한 것은 송왕조의 숭문억무정책과 관련이 있다. 더더구나 악비, 악운 부자가 동시에 피살당한 참통한 교훈과 관련이 있다. 만일 자식이 조상의 업을 이으면, 전철을 밟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