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가군의 전투력은 금나라를 이기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복녕객(福寧客) 

 

1142년초의 한겨울, 송나라장수 악비는 풍파정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비극은 그 본인을 한민족주의의 고도상징중 하나가 되게 만들었고, 사후에 관우에 바로 다음가는 전신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충신간신의 대립투쟁이라는 깨지지 않는 신화를 만든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느낌을 갖게 한다: 만일 당초 조정이 공정했다면, 이런 비극은 원래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아마도 정반대일 것이다. 악비의 죽음이 비극인 이유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송초기의 군사형세

 

거의 모든 악비에 관한 이야기는 일종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만일 간신이 횡행하지만 않았다면 악비가 억울하게 죽지만 않았따면, 원래 송나라군대는 중원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후세인들이 악비를 그리워하고 숭상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가설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전설은 악가군이 주선진대첩(朱仙鎭大捷)후 12도금패의 압력으로 중원을 경영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등광명(鄧廣銘)은 일찌감치 증명했었다: 주선진에서 500기병으로 금군 10만을 이겼다든지 12도금패라든지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악비의 손자 악가(岳珂)가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악비의 이야기는 전해지는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한족의 분노가 만족되지 않은데 대한 바램이 들어 있다.

 

다만 역사사실은 왕왕 더욱 가혹하다. 1140년, 악가군의 북벌은 확실히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 평원에서 기병대기병의 결전으로 금나라군대를 격파한다. 그러나 전과는 기실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영창지전에서 금군쪽의 참전한 병사는 기병 3만과 보병 10만이었다. 송군의 전과는 적 5000명살해, 포로2천여명, 마필3천여필 포획이다; 언성지전에서 송군은 금군 1.5만기병과 대진하여 전과로 전마 200여필을 얻었다; 소상하전투에서 적 2000여명을 죽인다. 이상은 송나라쪽의 기록이다. 당시 국사는 승리를 과장하고 패전을 감추는 경향이 있어 모조리 믿기는 힘들다. 설사 송나라측 기록을 완전히 믿는다고 하더라도, 금군의 손실은 보기에 반격능력을 상실할 정도가 아니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실지회복후에 장기간 지켜낼 수 있느냐이다. 중원의 지세는 평탄하고 개활하다. 기병의 우세를 발휘하기 좋다. 보병이 지키기에는 불리하다. 송군은 거의 90%가 보병이다. 냉병기시대에 기병과 대치하면 극복하기 어려운 약점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강(李綱)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자고이래로 중흥의 군주는 서북에서 일어났고 중원을 점거하고 동남을 가졌다; 동남에서 일어나면, 중원을 수복하여 서북을 가질 수 없었다, 무릇 천하의 정병 건마는 모두 서북에 있었다." 당시 송군은 약 20만명이다. 그중 대부분은 전투력이 금군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군대에 의지하여 야전에서 철저히 금군을 격패시키고, 다시 수복한 실지를 지켜낸다는 것은 난이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설사 엄숙한 역사저작에서도, 악비의 비극은 오랫동안 남송정국의 주전파와 투항파의 두 노선이 투쟁한 결과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충신과 간신이 뚜렷하게 가치관에서 대립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가설 위에 건립된 것이다: 끝까지 저항했다면, 반드시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곤경은 왕왕 어떤 때는 전력을 다해도 승리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력이 약한 쪽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적다. 역대에 송고종이 화의를 빨리 하려는 마음에 진회와 같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송고종의 방법에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황제로서, 그가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조씨왕조가 유지되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남송초기에는 기본적으로 피동적으로 공격을 당했다. 악비북벌은 짧은 돌격식의 승리였다. 송고종이 보기에 그것은 몇 안되는 금나라사람들과 협상의 카드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벌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평가된 송고종

 

오랫동안 송고종은 역사에서 나쁜 평을 많이 들은 황제이다. 원인의 하나는 그가 악비를 대한 것때문에 인심을 얻지 못해서이다. 격분하는 자는 그가 미친 것처럼 투항노선을 집행했다고 통렬하게 질책한다. 그 원인은 그가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해서라는 것이고, 황제위를 욕심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간 두황제(송휘종,송흠종)를 남으로 모셔오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놀라서 자식도 낳지 못했고, 정신도 불완전했다고 말한다.

 

이런 질책은 지금 보기에 근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첫째, 소흥7년(1137년) 정월, 금나라는 남송을 향하여 송휘종의 죽음을 통보한다. 5년후에 악비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송고종이 송휘종이 남으로 내려와서 황위를 빼앗아갈 우려는 없었다. 흠종도 그의 당시 지위를 흔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는 이미 황제이다. 왜 매국하고 투항한단 말인가?

 

셋째, 만일 그가 투항노선을 일관되게 걸었다면, 악비가 죽으면 최대장애가 제거된 것인데, 금군은 왜 대거 진격해오지 않았을까?

 

북송 멸망시, 강왕 조구는 흠종의 납환밀신을 받고 천하병마대원수가 되어 밤을 달려 구원하러 간다. 다만 그 본인도 얼마 후에 금나라병사에게 포로로 잡힌다. 나중에 기회를 틈타서 도망친다. 그후 전란중에 송군은 궤멸하고, 조구는 추격병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 점은 그의 겁많고 무능한 성격적 결함을 논증하는데 쓰인다.

 

그러나, 송휘종의 31명의 아들 중, 조구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가지양의 <천황귀주>에서는 이렇게 평론한다: "송나라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구의 도망에 그 공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만일 그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더욱 엉망인 국면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여진인은 17세기가 아니라 12세기에 중국을 정복했을 것이다.

 

사실상 남송에서, 당시에 이미 적지 않은 가짜종실문제가 나타났다. 만일 순수한 혈통을 지닌 황자가 정치중심을 형성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남송은 아마도 붕괴되었을 것이다. 당시 위급한 국면으로 보면, 송고종은 금나라와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분립국면을 형성할 능력이 있었다. 이것만 해도 이미 엄청나게 어려운 정치적 임무였다. 실지를 수복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심하게 질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의 정치임무로 보면, 송고종은 저평가된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조종지법과 악비의 죽음

 

송나라는 당말오대의 난을 이어받아 송나라는 장군들을 극히 경계한다. 건국으로부터, 직접 병력을 지휘하는 장수는 군정대계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군정대계를 주관하는 문관은 비록 군대를 움직일 권한과 전략방침을 제정할 권한은 있지만, 병졸이 하나도 없다. 송인종때 적청(狄靑)은 공이 높았지만 여전히 축출당한다. 그는 재상 문언박에게 외지로 쫓겨나는 원인을 물어본다. 문언박이 대답한다: "다른 건 없다. 조정이 너를 의심한다."

 

송나라조정은 무장을 압제하는 동시에, 우대를 해주었다. 정일품 재상의 식비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2품인 절도사의 식비보조금은 400관이다; 절도사의 공금은 더욱 놀랄 정도이다. 매월 3000관 내지 1만관이다. 악비는 양진의 절도사였으므로 월수입이 만관은 최소한 되었을 것이다. 송고종이 남하하여 재정이 부족하고, 관리의 봉록도 겨우 1/3 내지 2/3만 지급했다. "오로지 통병관은 원래대로 전액을 지급했다." 이것은 악비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을 것이다.

 

고임금으로 병력을 기른 뜻은 이를 즐기고 정치적야심은 갖지 말라는 말이다. <사기.백기왕전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진나라장수 왕전이 초나라를 공격할 때, 출병하기 전에 재삼 진시황에게 대량의 전답과 주택을 하사해달라고 청한다. 어떤 사람이 그를  멸시했다. 왕전은 이렇게 말한다: "진왕은 항상 의심이 많다. 지금 진나라의 모든 대군을 나에게 넘겨주엇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설마 진왕으로 하여금 나를 의심하도록 놔두란 말인가?"

 

악비는 왕전처럼 세상이치를 통찰하지 못했다. 우리 후인들이 악비의 일을 대할 때, 강력한 요소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악비가 사심없는 애국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송고종은 우리와 다르다 그는 자신의 논리로 악비가 충신인지 야심가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악비는 사대부에 접근했고, 청렴하고 자신을 잘 관리하여 군심을 널리 얻었다. "문신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천하는 태평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원대한 지향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웅심과 야심은 왕왕 하나이다. 송고종은 악비가 충성스러운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나았다.

 

악비의 비극은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정치적 두뇌는 전혀 없었다. 그는 충성하고 정직한 일면때문에 송고종이 가장 인정하는 장수(남송초기 악비는 승진이 가장 빠른 대장이었다), 악가군의 번호는 정식으로 신무후군으로 개조된다. 이때 송고종은 친필로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전기를 하사하고, 백은2000냥을 상으로 내린다. 이를 통하여 그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나중에 악비는 실지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알게 되자, 극히 분노하게 된다. 병을 핑계로 3개월간 직무에 복귀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약허(李若虛)의 엄중한 질책을 받는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만일 끝까지 고집한다면, 조정이 어찌 의심하지 않겠는가?" 악비는 확실히 자신의 이런 거동이 조정의 의심을 살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1137년 가을에는 상소를 올려 황태자를 두라고 건의하다. 그러다가 송고종으로부터 혼이 난다. 조회가 끝난 후 얼굴색이 흙색이었다고 한다. 1138년, 다시 증병을 건의하고, 의화(議和)를 반대한다. 이것은 송고종의 신경을 건드린다.

 

악비는 정치적인 금기를 몰랐다. 자신은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하여 직설적으로 간언했다. 설사 당시의 주희가 보더라도 이것은 이미 "교횡(驕橫, 교만하고 횡행하는 것)"이었다. 악비가 옥에 있을 때 옥졸 한 명이 이렇게 말한다: "임금과 신하는 서로 의심해서는 안된다. 의심하면 혼란이 온다.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면 죽이게 되고, 신하가 임금을 의심하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그 말을 듣고 비분하지만 그저 "천일소소(天日昭昭)"라는 큰 글자를 쓸 뿐이다. 죽을 때까지도 이 의심이 자신의 평소 생각없는 행동과 정치적인 각오수준과 관련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