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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산서 재상촌: 3명의 황후와 59명의 재상을 배출한 마을

by 중은우시 2018. 6. 8.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중국 2000여년의 봉건사회에서 유일무이하게, 중국에서 명성을 떨친 명문가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가 공인한 하동(河東) 문희(聞喜) 배씨(裴氏)가족이다. 이 가족의 발상지는 바로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예원진(禮元鎭)의 배백촌(裴柏村)이다.


배씨가족은 춘추시대 동주(東周)부터 시작하여, 위진, 십육국, 남북조에 흥성하고, 수,당때 전성기를 맞이하고 오대이후 쇠퇴하여, 명청에 이른다. 2000여년간 이 가족은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이는 세계역사상으로도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배씨가족은 정사에 전을 남긴 사람만도 600여명에 이르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1000여명이 넘는다. 7품이상의 관리만 3000여명에 이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3000여명의 관리들 중에서 탐관오리는 배출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래서,사람들은 이 마을을 "중국명인제일촌", "중국재상촌"이라고 부른다. 2000여년간 전후로 59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59명의 대장군, 14명의 중서시랑, 55명의 상서, 44명의 시랑, 11명의 상시, 11명의 어사, 211명의 자사, 77명의 태수를 배출했으며, 군수이하는 부지기수이다. 그중 작위를 받은 사람을 보면, 공작이 89명, 후작이 53명, 백작이 11명, 자작이 18명, 남작이 13명이다. 그리고 황실과 혼인도 많이 하려, 황후 3명을 배출했고, 태자비 4명, 왕비 2명, 험마(驗馬) 21명을 배출한다. 그리고 진사 68명, 현량 7명, 벽거 65명을 배출했다. 시호를 얻은 자가 59명에 이르니 그야말로 인재의 산실이다.


중국의 역사극 중에서 배씨가족을 그린 희극도 여러개이다. <장두마>외에 <유서호>, <이혜낭>, <배항우선기>, <백사전>은 모두 배씨집안의 이야기를 그렸다. 명극 <백사전>의 법해(法海)는 당나라초기의 정치가이자 서예가인 배휴(裴休)의 아들이다. 역사상의 법해는 정파인물인데, 명청소설이 나온 후에는 반대로 그려지게 되었다.


역사를 뒤져보면 배씨가족은 진,한이래 육조를 거치며 흥성했고, 수,당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구양수는 이렇게 감탄한 적이 있다: "재상의 세계는 배씨를 으뜸으로 한다. 어찌 성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배씨가족이 중국에서 이렇게 많은 동량지재를 배출한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역사상 여러 명이 이에 관하여 연구를 한 바 있다.


명나라때의 고염무는 일찌기 배백촌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배씨가족에 인재가 많은 것은 3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배씨가족은 자강불식했다. 자손들 중에서 수재에 합격하지 못하면 종사대문을 들어갈 수 없도록 가규를 정했다. "옥을 갈고 닦지 않으면 기물이 되지 못하듯이,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의를 모른다." 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배씨가족이 인재를 배출한 중요원인이다. 배백촌은 지금도 여전히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거의 모든 집의 문루에는 "경독전가(耕讀傳家)"라는 글자가 걸려 있다. 중학교까지는 다니지 않는 아이가 없으며, 개혁개방이래 마을에서 대학에 입한한 사람이 30여명이다. 둘째는 봉건세습과 비음(庇蔭, 부친의 덕으로 관직을 얻는 것)이다. 셋째는 혼인, 인척관계이다. 배씨가족은 역사상 부마, 황후, 태자비, 왕비등을 많이 배출했다. 그리고, 후인들은 배씨의 명신들은 대부분 청렴하여, 역대 제왕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배백촌은 역대고도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과 모두 가까워서, 과거시험을 치러 가기도 편했다. 쉽게 경성의 관리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배백촌을 가려면 운성(運城)에서 버스를 타고 문희현으로 간다. 문희현에는 배백촌을 지나는 버스가 있다. 가격은 4위안이고, 반시간이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