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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낙양(洛陽): 중국고대의 풍수길지

by 중은우시 2018. 11. 29.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고대에 이런 풍수길지가 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가운데 있는데, 수나라때, 25리 범위내에서 동시에 두 개의 도성, 두 명의 황제가 있었던 적이 있다.




고고학자인 허굉(許宏)은 일찌기 글을 써서 낙하하도(洛河河道)의 변천을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전체 낙양분지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이하(伊河), 낙하(洛河)의 두 강이 분지를 가로지른다. "십삼조고도(十三朝故都)"인 낙양에는 5대 도읍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것은 30여킬로미터에 이르는 분지의 중심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차례로 동주왕성(東周王城), 수당낙양성(隋唐洛陽城), 한위낙양성(漢魏洛陽城), 이리두(二里頭)유적지, 언사상성(偃師商城)이다. 화하문명 복심지구의 다섯개의 명주라고 불린다.


한위낙양성은 서주(西周) 성주성(成周城)에서 서한 유방이 최초로 수도로 정하고, 동한의 광무제가 수도로 정했으며, 조위가 도읍으로 삼고, 서진(西晉)도 도읍으로 삼는다. 북위효문제가 천도한 후에 확장해서 규모가 최대에 이른다. 궁성(宮城), 내성(內城)과 외곽성(外廓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100평방킬로미터이다. 서한 장안성의 2.6배이고, 수당장안성의 1.5배에 이른다. 고대 중국최대의 도성이었다.


동위,서위시기에 이곳은 쟁탈의 주전쟁터가 된다. 상방이 여러번 주인을 바꾸고, 점차 파괴된다. 수양제는 북으로 망산(邙山) 취운봉(翠雲峰), 남으로 이궐(伊闕)을 중축선으로 하는 낙하(洛河)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성을 만든다. 주변의 산천이 도성을 공위(拱衛)하여 성은 마치 하늘의 자미궁(紫微宮)같았다.


낙양성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나라말기에 천하대란이 일어난다. 각지의 반란군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100개 정도에 이른다. 참가한 인원수도 수백만에 달한다. 618년, 와강군(瓦崗軍)의 이밀(李密)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위(魏)라 하고 자칭 위공(魏公)이 되고, 도성을 한위낙양성으로 한다.


619년, 왕세충(王世充)이 국호를 정(鄭)으로 바꾸고 국도를 낙양으로 삼는다. 두 황제는 서로 겨우 25리가 떨어져 있었다.


당나라 무덕원년 구월, 왕세충은 정예병마 2만여명을 뽑고, 말2천필을 동원하여 통제거(通濟渠) 남쪽에 주둔한다. 통제거 위에 3개의 다리를 설치하여, 와강군과 결전에 대비한다.


이밀은 군대를 이끌고 금용성(金墉城)을 나가 응전한다. 언사에 군영을 차린다. 왕세충의 군대는 망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저녁에 계곡에 잠복하고, 다음날 새벽, 부대를 동원하여 돌격한다. 이밀의 군대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먼저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이밀의 군대는 패배하고, 부장인 배인기(裴仁基), 조군언(祖君彦)등 수십명이 포로로 잡힌다. 왕세충은 언사를 포위공격하고, 와강군의 언사 수비장수 정정(鄭頲)의 사병은 암중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와강군은 장수 수십명이 포로로 잡히고, 진지략(陳智略), 장동인(張童仁), 선웅신(單雄信)등이 투항한다. 이밀과 왕백당(王伯當), 가윤보(賈閏甫)는 잔여부대 2만명을 이글고 관중으로 들어가, 당(唐)에 투항한다. 나머지 장수와 주현의 수령들 예를 들어 이공일(李公逸),배행엄(裴行儼), 나사신(羅士信), 주법명(周法明), 정교금(程咬金), 진숙보(秦叔寶), 두재간(杜才干), 서원랑(徐圓朗), 주문거(周文擧), 왕당인(王當仁), 유흑달(劉黑闥)등은 나중에 대부분 당(唐) 혹은 두건덕(竇建德)에게 간다. 위징(魏徵)은 하북으로 가서 잠시 두건덕에게 의탁하였다가 나중에 서세적(徐世勣, 나중에 이씨성을 하사받아 李世勣이 되었다가, 이세민의 이름의 세자를 피휘하여 李勣이 된다), 장선상(張善相), 장량(張亮)등과 함께 당에 투항한다.  


그후 당군의 이세민은 왕세충, 두건덕과 하락지구에서 격전을 벌이며, 이 전투에서 당나라 통일패업의 기반을 다진다. 당나라 정관연간에 이르러, 한위낙양성을 폐한다. 그리하여 25리를 사이에 두고 두개의 도성이 있던 역사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