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중국경내에 가장 긴 두 개의 하류가 있다. 바로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이다. 이 둘은 중화민족의 모친하(母親河)로 불린다. 기실 장강과 황하를 제외하고 중국에는 무수한 하류가 있다. 그들도 기실 중화민족의 모친하이다. 바로 무수한 크고 작은 하류가 중화 각민족을 지금까지 번성하도록 길러왔다. 그래서 현재 중화56개민족의 대가정이 있는 것이다. 단지 장강과 황하가 기르는 사람이 가장 많을 뿐이다. 그러나, 장강과 황하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하류이면서 마찬가지로 청장고원의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수천킬로미터를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두 하류는 모두 여러 개의 성을 거치는데, 장강은 11개성을 지나고, 황하는 9개성을 지난다. 그리고 두 하류는 모두 중국고대의 사수(四水, 장강, 황하, 회하, 제하의 네개의 하류)중 하나이다.
다만, 황하는 3개의 원두(源頭)에 서로 다른 명칭이 있는 외에(황하의 3개 원두는 각각 찰곡(扎曲), 약고종열거(約古宗列渠), 카일곡(卡日曲)으로 불린다), 상류이건 중류이건 하류이건 모두 '황하'라고 부른다. 다른 칭호는 기본적으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강은 다르다. 원두부터 시작하여 장강구에 이르기까지 명칭이 계속 변화한다. 원두는 타타하(沱沱河)이고, 당곡구에 이른 후에는 청해 옥수까지는 통천하(通天河)라고 불리며, 그 후에 다시 의빈의 민강구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금사강(金沙江)이라 불리고, 다시 의빈에서 호북의창까지는 습관적으로 천강(川江)이라고 부른다. 이어서 악양까지는 다시 형강(荊江)이라고 불리고, 강서구강구간은 다시 심양강(潯陽江)이라 불린다. 안휘구간 은 다시 환강(皖江)이라 부르고, 강소양주이하는 습관적으로 양자강(揚子江)이라 부른다. 강소 진강시 부근은 경구(京口)라고 부르는데, 부근의 장강구간을 경강(京江)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장강은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서로 다른 지방에서는 서로 다른 명칭이 있었다.
왜 장강은 각 구간마다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데, 황하는 그렇지 않았을까? 그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기실, 장강의 각구간명칭이 다르지만 황하는 거의 그렇지 않은 근본원인은 바로 고대인들이 장강에 대한 인식은 황하보다 더 길기 때문이다.
황하가 주로 지나는 곳은 중원지구이다. 중원지구는 중화문명의 발상지이다. 즉, 중화민족이 처음 나타났을 때 황하의 변에 있었다. 그리고 활동범위가 주로 지금의 진령이동, 감숙, 영하, 섬서에서 산서, 하북, 하남, 산동 이 일대이다. 황하는 바로 이 몇 개의 성을 지난다. 감숙의 위로는 아주 짧은 구간이 청해에 있고, 중원지구는 황하를 제외하고 거의 다른 큰 하류가 없다. 설사 황하에도 몇 개의 지류가 있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짧거나 유량이 적다. 그래서 구분하기가 쉽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일찌감치 이곳을 지나는 하류가 같은 하나의 하류라는 것을 인식했다. 아마도 문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황하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을 수 있겠지만, 문자가 나타난 이후에는 조상들이 이미 이 하류는 하나의 하류에 속한다고 알았고, 그래서 명칭을 하(河)라고 한 것이다. 중국고대에 '하'는 황하를 가리킨다. 그래서 고서에 '하' 혹은 '대하(大河)', '중국하(中國河)'라고 하면 다른 생각을 할 필요없이 바로 황하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장강은 다르다. 장강은 중국의 남부에 있고, 과거에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도처에 하류, 호수, 산이 있다. 그리고 장기(瘴氣)가 가득했다. 원정군이 이곳을 지나고 다면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나중에서야 조상들이 이주를 하면서, 장강유역으로 내려온다. 그들이 본 장강유역은 너무나 많은 하류가 있다. 그리고 모두 상당히 길다. 장강의 지류를 포함해서. 설사 지금 측량을 하더라도, 그 수백킬로미터를 넘는 지류만도 수십개이다. 그중 최대의 지류인 한강(漢江)은 1500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장강의 큰 지류의 원두는 모두 몇개의 성을 지난다.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 거의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각 강의 사이에는 호수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때는 호수가 무척 컸다. 예를 들어 동정호는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고 불리웠다. 여기서 운(雲)은 지금의 호북성을 가리키고, 몽(夢)은 지금의 호남성을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 면적은 최소한 4만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당시의 장강은 운몽택을 지나갔다.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으로는 운몽택의 동서하류가 같은 하류라는 것을 인식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운몽택의 사방에는 하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큰 하류만도 한강과 호남사수(湖南四水)가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지방의 장강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리웠다. 설사 장강의 지류라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지방에서 부르는 명칭은 서로 다를 수 있었다. 하물며, 당시 장강유역에 생활하는 사람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왕도 긴밀하지 않았다. 하류의 인식은 그저 자기가 본 지방에만 머물렀다. 그래서 서로 다른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지방의 하류는 각자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다.
그리고, 중원은 계속하여 중국의 정치중심이었고, 개발이 비교적 빨랐다. 그리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조밀했다. 특히 정권이 자주 교체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치자들은 하류의 방향을 확실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중원지구의 거의 유일한 하류인 황하가 어느 지방을 지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황하의 각 구간에 따라 명칭이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있더라도 금방 통일된다. 그러나, 장강유역은 지금까지 중국의 정치중심이 아니었다. 비록 몇개의 지방정권은 들어섰지만, 주로 동부에 집중되어 있고, 개발도 비교적 늦었다. 특히 남방은 산이 너무 많다. 강남의 작은 산은 놔두고서라도, 호남서쪽으로, 중경, 사천, 운남, 청해, 서장은 고산준령이 이어진다. 장강이 어느 지역을 흘러가는지 통치자들도 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특별히, 남방정권이 여러개 들어서면서 각자 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리고 각자의 습관대로 강에 이름을 붙인다. 남방은 고대에 여러 소규모정권이 존재했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남방에는 여러 정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운남, 귀주, 청장고원등지는 중국의 역사에서 합구필분, 분구필합(合久必分, 分久必合)이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남방의 소규모정권은 더욱 무수히 많았다. 예를 들어, 형강은 고대 형주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삼국시대 각 군벌이 쟁탈하던 핵심지역이다. 천강은 일찌기 유비가 관리한 곳이다. 그 금사강은 주로 운남과 사천서부로 몽골이 티벳을 통일한 후, 장강의 원두에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타타하는 바로 몽골어이다.
그외에, 고대 문인의 글에서 장강의 서로 다른 구간을 묘사한 것도 또한 관계가 있다. 장강중하류의 많은 지방에서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고대문인들의 역할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서 구강의 장강구간을 심양강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백거이의 시 <비파행>중의 한 구절, "심양강두야송객(潯陽江頭夜送客)"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강소 진강 부근의 장강구간을 경강으로 부르는데, 그것은 왕안석의 시 <박선과주>의 첫구절인 "경구과주일수간(京口瓜州一水間)"과 관련이 있다. 비록 이들 장강구간은 이들 문인들의 문장이전에도 아마 이런 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이렇게 불리는 것은 확실히 이들 문인의 위대한 작품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장강의 각구간이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진다는 점에서 황하와 다르다. 첫째는 중국의 조상이 장강유역에 진입한 것이 상대적으로 늦어서이다. 그래서 개발이 비교적 늦었다. 그리고 황하유역 특히 중원지대는 조상들이 가장 먼저 개발한 곳이다. 둘째는 장강이 거치는 지역이 너무 복잡하다. 평원도 있고, 호수도 있다. 그리고 장강의 지류가 너무 많고 비교적 길다. 또한 유량도 장강과 현자한 차이가 없다. 또한 호남이서는 더더욱 고산준령이다. 이느 장강이 사천에 들어간 후에는 현재에도 여전히 각종 명칭을 보류하고 있는 이유이다. 금사강의 동쪽은 비록 장강의 각구간의 역사상 서로 다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미습관적으로 장강이라 부른다. 그러나 황하중하류의 주요 흐름은 평원지구를 지난다. 그리고 지류가 비교적 적다. 특히 유량이 아주 적다. 셋째, 중국고대의 핵심지대는 중원과 장강중하류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황하는 감숙의 하서주랑에서 동쪽으로 계속하여 중국고대의 문화, 정치, 경제등의 중심이었고, 이 지역이 황하의 절대다수의 길이를 차지한다. 다만 장강은 호남이동이 장강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호남서쪽은 인구도 적고, 중국고대에 관할하던 지역도 아니었다. 넷째, 고대 문인이 쓴 글에서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이 추파조란(推波助瀾)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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