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남방(王南方)
광서제의 북경대학에서의 강화를 읽은 다음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봉건황제이면서 전혀 팔고(八股)의 기운은 없다. 오늘날 상류사회의 진부한 분위기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어떤 관료의 보고서에서 나오는 그런 상투적인 말, 헛된 말, 거짓된 말도 없다. 더더욱 그런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신선한 느낌마저 받는다. 고대에 군림천하하며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그런 봉건황제에게서 스스로를 '봉천승운'한 위대하고 정확한 제왕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 대하여 현대인으로서 깊이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1898년 무술변법후 광서제가 조서를 내려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손가내(孫家鼐)의 주재하에 북경에 창립된다. 최초의 학교부지는 북경시 경산동가(원래의 마신묘)와 사탄(沙灘, 고궁 동북) 홍루(紅樓, 현재의 북경 오사대가29호)등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이 1898년부터 1912년까지 불리던 명칭이다. 경사대학당은 중국 최초의 국립종합대학이고, 당시 중국의 최고교육행정기관이기도 하다.
육군학교가 조용했던 것과는 달리 경사대학당의 개교식은 매우 융중했다. 광서제는 친히 경사대학당의 교명을 써주었을 뿐아니라, 개학일에는 군기대신, 각부상서를 이끌고 참석했다. 격식이 높은 것은 참으로 드물게 보는 정도이다. <뉴욕타임즈>의 주극동특파원인 화이트도 미국공사를 통해 총리각국사무아문에 개교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신청을 제출했다. 광서제는 즉시 동의했고, 참가를 원하는 서방의 기자가 있으면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 적극적으로 편의를 제공하도록 명한다.
개교하기 3일전에 아무도 개교사실을 모를까 우려했는지, 광서제는 특별히 두회천(杜懷川)에게 명하여 전단을 인쇄하여 북경성의 곳곳에 붙이게 한다. 일시에 전체 북경성은 난리가 난다. 대소관리와 시정백성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이 경사대학당이 도대체 무슨 마력이 있길래, 황상과 조정에서 이렇게까지 중시하는 것일까?
융중하고 열렬한 개교의식이 끝난 후, 광서제는 즉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내를 불러서 모든 학생들을 경사대학당의 강당에 모이도록 한다. 광서제는 무술변법과 개혁개방에 관한 중요한 말을 할 것이라고 하면서.
강당안은 근 천명의 학생으로 가득찼다. 각부 관리와 경사대학당의 교사들은 양측에 서 있었다. 황상이 들어온 후,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친다.
사람들 틈에 서 있던 화이트도 허리를 천천히 굽혀서 서양의 예의로 맞이했다. 눈빛은 격동하면서 사람들 틈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젊은 황제를 바라본다.
화이트로서는 처음 황제를 보는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 <뉴욕타임즈> 주극동특파원이던 그의 기자생애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 극동의 기이한 이야기나 전하던 보통 기자에서, 그는 중국이라는 신비하고 오래된 나라를 여는 서방매체의 최초인물이 된 것이다.
여러해 후, 나중에 광서제와 함께 경심동백의 역사적 순간을 무수히 넘기고, 황제와 깊은 우의를 맺었던 화이트는 뉴욕의 집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는 북경의 늦가을 맑은 오전이었다. 중국근대 최초의 진정한 의미의 대학 경사대학당내에서 나는 처음 광서제를 보았다. 이 오래된 제국의 명목상의 통치자였다. 그때, 이 국가의 실제권력은 이화원 안에서 점점 노쇠해가는 태후와 그녀가 신임하는 관리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이 젊은 황제는 이 늦가을의 계절에 신비한 자금성에서 걸어나와 그가 직접 개창한 이 대학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수약(瘦弱)하고 창백했다. 입가에는 옅은 그러나 자신감 넘치는 웃는 얼굴을 하고 사람들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아래의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때, 나는 심지어 나의 눈을 의심했다. 나는 내가 보는 이 젊은이가 바로 이 오래되고 방대한 국가의 황제인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의 자신감과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천명의 경사대학당 학생들 앞에서, 광서제는 잠시 침묵하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오늘은 경사대학당이 정식으로 개학하는 첫째날이다. 소위 학당이라는 것은 짐이 보기에 학문을 연구하고 익히는 곳이다. 우리의 고인에게는 한가지 전통이 있는데 '좌이논도(坐而論道)'라고 한다. 오늘 짐은 너희들과 세간의 도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말을 마치고, 광서제는 오른손을 들어 아래로 내렸다: "모두 앉아라. 짐도 앉겠다!"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다가 속속 바닥에 앉았다. 눈빛은 의혹을 띄고 앞의 황상을 올려다 보았다.
곁에 있던 태감이 명황색의 바닥이 있는 의자를 가져왔고, 광서제는 옷을 떨치고 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말을 시작한다:
"짐은 글을 익히기 시작한 때로부터, 짐의 스승은 짐에게 군왕의 도를 가르쳤다. 짐이 친정한 후에도 계속하여 치국의 도를 배웠다. 세간의 도와는 아마도 약간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짐은 계속 생각했다. 우리같은 이런 나라에, 어떤 것이 진정한 큰 도인지, 어떤 것이야말로 국가를 진흥시킬 수 있는 도인지.
이번에 경사대학당을 열면서 많은 장애가 있었고, 여러 의문을 받았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죽기도 했다. 죽은 사람은 왕장익(王長益)이다. 짐은 계속 생각했다. 그는 왜 죽어야 했을까? 그리고 누가 그를 죽게 만들었을까? 짐은 수백년전에 역시 왕씨성을 가진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왕양명(王陽明)이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산속의 적을 무찌르는 것은 쉬우나(破山中賊易), 마음 속의 적을 무찌르는 것은 어렵다(破心中賊難).
그래서 짐은 이렇게 생각한다. 왕장익의 죽음은 바로 마음속의 적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이 적은 그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다. 만일 세간의 큰 도를 분명히 얘기하려면 먼저 이 마음 속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
왕장익은 집안이 가난하고, 과거에서 몇번 낙제하여 아주 힘들었다. 이번에 경사대학당이 매월 생활보조금을 주고, 장래 졸업후에는 일자리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저리 생각한 후에 비록 마음 속으로 아주 원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경사대학당에 입학신청을 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이런 거동은 같은 여관에 묵고 있던 다른 학자들의 비웃음과 놀림을 샀다. 왕장익은 사람됨이 충후하고 성실하며, 말을 잘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마음 속으로 약간의 부끄러움도 있었다. 이들의 모욕에 더더욱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이러저리 피하면서 최대한 그들 학자들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누가 생각했겠는가. 어느 날 저녁 그들 학자들이 여관에서 술을 마시면서 대련을 짓는데, 일시의 흥으로 그랬는지, 왕장익의 침대머리에 이런 대련을 붙여 놓았다:
상련은 '효제충신예의염(孝悌忠信禮義廉), 하련은 일이삼사오륙칠(一二三四五六七). 이 대련의 위에는 '치(恥)'자가 빠졌는데 그 뜻은 왕장익이 무치(無恥)하다는 것이고, 아래에는 팔(八)이 빠졌는데 그 뜻은 망팔(忘八) 즉, 왕장익이 왕팔(王八, 중국에서는 忘八과 발음이 같고 욕임)이라고 욕하는 것이다.
선비들은 명절(名절) 관념을 중시한다. 왕장익은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게다가 마음이 그다지 넓지도 못했다. 이런 모욕을 받고 마음 속에서 풀지를 못했다. 밤에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면서 잠들지 못하다가. 과거에도 실패하고, 경사대학당에서 공부하려다가 이런 모욕까지 받았다는 생각에 일시에 분을 참지 못하고, 침대보로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다."
아래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귓속말을 하기 시작한다. 광서제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 마음 속의 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짐이 보기에, 이 첫번째 적은 바로 위선(僞善)이다. 평상시에 공부한 것은 정주이학(程朱理學)으로 배운 것이 무비시(無非是),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慾)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뒤적여보면, 역대왕조에서 성인지학(聖人之學)에 의존하여,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 치국평천하할 수 있었는가?
입으로 인의도덕을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국가의 위기와 멸망을 구해낼 수 없다. 너희들은 생각해보라. 너희가 배운 사서오경, 너희가 열심히 익힌 팔고문, 그것으로 서양인들의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를 막아낼 수 있는가? 부패가 횡행하고, 토지를 겸병하고, 유리걸식하는 백성이 천리에 이르고 국가의 적폐가 쌓여있는 국면을 바꿀 수 있는가?
명절을 중시하고 실무를 가볍게 여기는 것(重名節, 輕實務)은 기실 허위와 허약을 안에 숨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겠다. 만일 이번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리지 않았다면, 경사대학당의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과거급제의 대우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너희가 과거를 버리고 신학을 배우러 했겠는가?
짐이 너희를 책망하는게 아니다. 짐은 그저 너희가 모두 분명히 알기를 바란다. 도덕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이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인의도덕만 탁상공론하는 것은 바로 세간의 가장 큰 위선이다.
두번째 적은 바로 수구(守舊)이다. 이것을 얘기하자니, 짐은 17년전 이홍장이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 말을 여러분에게 읽어주고 싶다:
'중국의 사대부들은 장구소해(章句小楷)의 누습에 빠져 있고, 무부한졸(武夫悍卒)은 또한 거칠고 세심하지 못하여, 쓰는 것은 배우지 않고, 배우는 것은 쓸모가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외국의 이기(利器)를 비웃으며 기기술교(奇技術巧)라고 무시하며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외국의 이기에 놀라서 변괴신기하다고 하면서 배울 수가 없다고 한다.
17년전 이홍장의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짐을 감개무량하게 만든다.
17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우리의 사대부, 내지 우리의 이 나라는 여전히 그때나 똑같다.
세간에 변하지 않는 도리는 없다. 천하의 일은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이다.
오늘의 세계추세는 3천년이래의 위기국면이다. 옛것을 지키고, 스스로의 문을 걸어닫기만 해서는 우리나라가 점점 더 낙후하게 될 것이고, 갈수록 쇠약해질 것이다. 오래동안 이렇게 나가다가는 나라가 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짐이 오늘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어서이다. 짐이 왜 경사대학당을 열어야 한다고 고집했는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우리의 마음 속의 적을 없애주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강성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비(自卑)하지도 않으며, 현실을 직시하고 발분도강(發憤圖强)하기 바란다."
전체 강당은 조용했다. 처음에 들리던 귓속말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공기가 질식할 듯한 침묵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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