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동치황후(同治皇后)의 죽음

by 중은우시 2017. 12. 21.

글: 등해춘(鄧海春)


운명이 비참했던 청나라 황후를 들자면 아마도 사람들은 마지막 황후 완용(婉容)을 떠올릴 것이다. 완용은 확실히 운명이 비참했고, 시신이 어디에묻혔는지도 찾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 국구(國舅)인 곽포라 윤기(郭布羅 潤麒)의 동의를 받아 2006년 "초혼"의 방식으로 부의와 청서릉 원외의 화룡능원(華龍陵園)에 합장해주었다. 청나라 역사상 또 한 명의 운명이 비참했던 황후가 있다. 자살로 죽은 후 70년만에 도굴당한다. 그녀는 바로 동치제의 황후이며 시호가 "효철가순숙신현명공단헌천창성의황후(孝哲嘉順淑愼賢明恭端憲天彰聖毅皇后)"이다. 여기에서는 이 황후의 마지막 장면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동치제가 붕어하는 날, 서태후는 왕공대신을 불러모아서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하여, 황후는 거친 방법으로 배제해버린다. 회의에서, 서태후는 독단적으로 자신의 친외조카이자 순친왕(醇親王)의 아들인 재첨(載湉)을 황제에 앉힌다. 그리고 공공연히 자신이 태후의 명의로 수렴청정하겠다고 선포한다. 재첨은 함풍제(동치제의 부친으로 직전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새로 황제에 오른다. 즉, 재순(載淳, 동치제)는 천하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뒤를 자신의 아들로 잇게 하는 권리마저 박탈다안 것이다. 황제로 지냈지만, 자식을 두지 못하는 "절호(絶戶)"의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천하에서는 서태후가 너무 매정하고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서태후의 위세에 눌려서 누구도 감히 가련한 재순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이 때, 한 사람이 들고 일어선다. 그녀는 생명을 댓가로 내걸고 서태후의 독단에 최후의 항쟁을 한다. 그녀는 바로 재순과 깊이 사랑했던 황후 아로특씨(阿魯特氏)이다.


황후가 남편의 죽음으로 비통해마지 않고 있을 때, 서태후가 재첨을 함풍제의 아들 신분으로 새 황제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는 황후의 피흐르는 가슴에 소금을 한줌 뿌린 겻이다. 그녀는 극도의 고통에 빠진다. 남편이 죽고 나서도 후사를 두지 못하는데 비분하고 자신은 황제의 과부형수의 신분이 되어 서태후의 위세에 눌려지내야 한다는데 절망한다. 더더구나 서태후가 재순의 유조를 폐기해버린데 분노한다. 그녀는 생명안위도 불구하고, 서태후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나선다.


그녀는 서태후를 만난다. 그리고 첫마디는 바로, "절대로 대행황제(大行皇帝, 돌아가신 황제)에게 후사가 없도록 해서는 안됩니다!"였다.


서태후는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괴이한 목소리로 말한다: "만일 내가 괜찮은 며느리를 들였다면 일찌감치 후사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분명히 재순이 자식을 낳지 못한 원인을 황후가 부족하여 아들을 낳지 못함에 있음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 말은 날카로운 검과 간치 황후의 내심 깊은 곳의 상처를 건드렸다. 자신은 바로 서태후의 박해로 영준한 청년황제와 함께 지내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이 연약해서이다. 서태후의 위세에 굴복하여 스스로 황제와 멀리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순이 유곽을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황후는 마음 속에서 슬픔이 밀려 올라와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할 뿐아니라, 한편으로 곡을 하며 한편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한다: "제가 복이 없어서 선제의 은총에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후궁의 모씨는 이미 임신했고, 종사에 영혼이 있고, 조종이 보우하시니 황자를 낳아서 황제의 후계를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태후는 그 말을 듣고 동의하지 않았다: "나라에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다. 너는 그녀가 반드시 아들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황후가 급히 대답한다. "먼저 현명한 친왕으로 하여금 감국(監國)을 하게 하고 어느 정도 기다려 정말 딸을 낳는다면 그때 새로 황제를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태후는 황후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는 것을 보자 준엄하게 질책한다: "이 일은 나와 자안태후가 결정한다. 어디 네가 끼어들 여지가 있단 말이냐. 더 왈가왈부하면 사죄(死罪)로 논하겠다.


황후는 평상시에 사람됨이 온화하고, 사단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었다. 비록 서태후의 전횡에 불만은 있었지만 여전히 예의로 대해왔다. 이때 그녀는 확실히 더 이상 참지 못한다. 그 동안의 쌓여있던 원망이 마음 속에서 박차고 나온 것이다. 큰 소리로 곡을 하며 항쟁한다: "선제를 따라서 죽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단지 후계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아오며 구차하게 연명해 왔습니다. 나는 이미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대청문(大淸門)으로 나갈테니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먼저 선제를 위하여 후사를 정해주기를 청하는 것은 제가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찌 저에게 죄를 묻겠다 하십니까?"


서태후는 "대청문"이라는 세 글자를 가장 듣기 싫어했다. 이는 그녀가 후궁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서태후는 분노해서 소리질렀다: "여봐라. 뺨을 때려아. 천한 네년이 내 아들을 죽이더니 그래도 여전히 황후로 있으려하다니!"


이때 자안태후가 도착해서 태감에게 멈추라고 하여 황후는 맞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황후는 돌아간 후 하루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통곡할 뿐이었다. 황후의 부친 송기(崇綺)는 딸의 사정을 듣고나서 이 일을 서태후에게 보고한다. 서태후는 그 말을 듣고 차갑게 한 마디를 아무 감정없이 던질 뿐이다: "황후가 이렇게 슬퍼하니, 대행황제를 따라서 가라고 해라!"


동시에 서태후는 태감에게 명하여 황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지 말라고 한다. 황후의 집안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태감을 매수하여 집안에서 황후에게 먹거리를 보낸다. 숭기는 서태후의 태도를 들은 후, 딸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와 계속 싸우는 것보다는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최소한 자신의 관직도 지키고 온가족의 목숨도 보전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태감에게 부탁하여 황후에게 먹을 것은 넣는 합(盒)을 보낸다. 황후가 합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부친의 뜻을 바로 알아차린다. 곡기를 끊고 자결하라는 것이다.


광서원년(1875년) 이월 이십일, 재순이 붕어한지 두달여만에 황후도 결국 한을 품고 죽는다. 그녀의 나이 22살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녀가 곡기를 끊고도 죽지 않으니, 금조각을 삼켰다고 한다. 이 전설은 죽은 황후에게는 큰 참화를 불러온다. 1945년 겨울, 한 무리의 토비가 재순(동치제)의 혜릉(惠陵)을 파헤친다. 도굴꾼들은 재순과 황후의 시신을 끌어낸다. 재순은 뼈만 남아 있었으나, 황후의 시신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굴꾼들은 황후가 금조각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을 들어서, 황후의 의복을 다 벗긴 후, 칼로 그녀의 배를 갈라서 황후가 먹었다는 금조각을 찾는다. 도굴꾼들이 물러난 후, 부근의 호기심많은 촌민들이 지궁(地宮)을 들어가봤는데, 황후는 나신이 들어나서 몸을 위로 향하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있으며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었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다만 배는 갈라져서 창자가 바닥에 흘러나와 있었다. 명이 나쁜 황후는 실로 비참의 극한을 달렸다.


황후가 죽고나서도 서태후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황후의 장례때, 서태후는 황후의 관을 편문(便門)으로 나가게 하려 했다. 이를 통해 그녀가 자신에게, "대청문으로 나갈 것이다"라고 했던 말에 보복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안태후가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우리 조종의 법도에 따르면 황후가 죽으면 금관은 반드시 대청문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역대이래로 내려온 법도이다.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서태후도 할 말이 없어서 부득이 황후의 시신이 대청문으로 나가도록 허락할 수박에 없었다.





황후가 말했던 그 임신한 궁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