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효교(李曉巧)
중국고대사회에 여자들은 "부도(婦道)"를 엄격히 지켜야 했다. 특히 명청시대의 봉건예교(封建禮敎)는 부녀들을 더더욱 속박했었다. 청나라 중기이후,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중국으로 오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들은 복잡한 눈으로 이 오래된 신비한 나라를 탐구했다. 동시에 그들은 남다른 청나라여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예교의 속박을 받고 있었지만, 청나라여자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대단했다. 외국인들에게도 분명히 보였다. 영국인 앤더슨이 쓴 <대청재국에서의 항행>이라는 책에는 1793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북경을 여행할 때 본 중국부녀자들은 일반적으로 용모가 극히 예뻤다. 얼굴색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굴에 화장품을 바른다....그녀들은 그녀들의 입술 중앙에 아주 짙은 붉은 색을 한줄 찍는다. 얼굴을 다듬는 것을 전혀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확실히 얼굴을 더욱 예쁘게 보이게 만든다." 건륭기때 화장을 좋아하는 북경여인들이 외국인들의 눈에 특이하게 비쳤나보다. 76년이 지난 후 독일인인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중국명 李希霍芬)은 동북지방의 부녀들이 화장하는 것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깨끗하게 하고 다닌다. 특히 남자들과 비교하면 그러하다. 그녀들은 머리에 장식품을 꽂고, 그 위에는 항상 신선한 꽃으로 장식한다."
집에서 한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웃을 때 이를 드러내지도 않는다(足不出戶, 笑不露齒)는 것은 마치 중국고대여자의 독특한 표지처럼 여겨진다. 다만, 서양인들은 일부 행동거지가 대범한 청나라여자들을 보게 된다. 1793년, 북경성의 동문에서, "나(앤더슨)은 대담하게 그녀들에게 접근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몇 마디 중국말을 했다. '호(好)' "교(嬌, 예쁘다)'...그녀들은 나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가볍게 이들 부녀들과 악수를 했고, 그녀들도 친근하게 나를 대해주었다..그러므로, 이 도시에서 여자들은 확실히 그녀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이부분의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같다." 이를 보면, 이 영국인은 건륭시기의 북경성 여자들에 대하여 아주 좋은 인상을 가졌다. 그녀들은 귀엽고, 친근하고, 우아하며, 대범했다.
1869년 리히트호펜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녀들(심양의 부녀)도 시장에 간다. 자주 여자들이 아이를 가슴에 안고 길거리를 걸어다닌다." "심지어 여럿이 모여서 우리를 둘러싸고 구경했고, 우리들과 얘기를 나눴다. 이는 강남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다." 이 '중국통'이 본 것은 구속을 받지 않는 북방부녀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북방부녀가 강남부녀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도 간파해냈다.
청나라때 평원지구의 여자들은 전족을 많이 했다. 그러나 산에 사는 여자들은 밭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족을 한 경우가 드물었다. 리히트호펜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본 중국의 귀부인들이 한 전족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왜 여자들이 인위적으로 발을 이렇게 변형시키고 골절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족한 여성은 심신이 모두 큰 상처를 입는다. 마치 장애인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밭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같은 해 10월, 리히트호펜은 안휘일대를 간다. "자주 다리를 높이 걷어올린 젊은 여자가 할머니뻘 나이의 여자들과 같이 물 속에 서서 밧줄을 끄는 일을 하는 것을 봤다. 그녀들은 밧줄을 끌며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때 배를 끄는 것을 도운다. 나의 배에도 이런 남자일을 하는 부인이 있었다." 중국에서 7번이나 지질탐사를 하면서 당시 13개 행성을 모두 돌아다닌 이 독일의 지질지리학자의 글에서는 열실히 일하고 성실한 청나라여자들의 모습도 볼 수가 있다.
동시에, 이 총명한 독일학자는 청나라여성들이 심리적인 상처에 대하여도 알아차렸다. 호남에서 그는 많은 현지부녀의 상황을 알았다. 그는 악록서원(岳麓書院)의 나석포(羅石浦)라는 학생을 알게 되는데 그는 20살이었지만 이미 결혼했다. 매 5개월마다 집으로 가서 처를 만난다. 그의 처는 "현재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문을 나설 수 없고, 어떤 남자도 집안으로 들일 수 없다. 이곳의 전통이 그렇다." 그리고, 나석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호남의 여자들은 6살이 되기 전에만 문을 나갈 수 있고, 더 크면 문을 나갈 수 없다. 혹은 그저 완전히 가려진 가마에 앉아서 문을 나갈 수밖에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청나라 여자들이 예교의 속박을 받고 있었지만, 그녀들도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컸다. 1845년, 영국의 선교사 조지 스미스가 광주의 십상행행상의 후인을 만났을 때, 부유한 상인의 첩을 보게 된다. 세심한 서양인은 아주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떠날 때 여주인은 2청의 평대에서 보고 있었다. 앞에는 한 노비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예쁜 첩은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래서 방법을 강구하여 자신을 가린 것이다. 호기심이 우려를 이긴 것이다. "어떤 때는 그녀도 앞으로 걸아나와서 몰래 웃으며 아래의 외국인을 내려다보았다."(<오구통상성시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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