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독력견문(讀歷見聞)
"천조상방"은 중국고대 일반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우월감이었다. 소위 "천처호상(天處乎上), 지처호하(地處乎下), 거천지지중자왈중국(居天地之中者曰中國), 거천지지편자왈사이(居天地之偏者曰四夷)"(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 천지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중국이라 하고, 천지의 주변에 있는 것을 오랑캐라 한다.) 역대 봉건통치자들은 모두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질서를 구축하는데 힘을 쏟았고, 만국내조(萬國來朝)'를 '천조상방'의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다만, 이러한 중국인의 마음 속에서 수천년간 유지되어 온 '천조상방'의 관념이 또 어떻게 청나라 멸망전의 짧은 수십년만에 완전히 붕괴되게 되었을까?
청나라말기 중국인들의 '천조상방' 관념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두번의 아편정쟁때부터이다. 만일 제1차아편전쟁(1840-1842)의 패배는 창졸간에 일어난 우연한 실패라고 억지로 안위할 수도 있겠지만, 10여년후의 제2차아편전쟁(1856-1860)에서의 패배는 특히 경성이 함락되고, 황제가 북으로 도망친 것은 절대로 '천조상방'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함풍제가 북으로 도망쳐서 승덕의 행궁에서 병사하기 전에, 유조(遺詔)에서 특별히 '교배지례(郊配之禮)'를 행하지 말 것과 '성신공덕비(聖神功德碑)'를 세우지 말 것을 언급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마음 속으로 입은 타격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가 있다. 황제마저도 이러할진대, 상주(商周)시기에 형성된 '천조상방'의 관념은 당시 사회엘리트들의 논조에서 일종의 절충된 입장인 '춘추전국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청나라말기의 사상가 왕도(王韜)는 서방각국이 '거의 중국과 정립지세를 이루고 있어 춘추전국시대의 열국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상군(湘軍)의 명장 팽옥린(彭玉麟)은 이렇게 말한다: "당금의 시세는 강한 이웃나라가 날로 핍박해오고 있으니(强隣日逼), 전국(戰國)의 국면이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춘추전국설'의 논조에서, 당시의 사회엘리트들은 청나라를 주왕조(周王朝)로 보았고, 서방의 열강을 춘추전국시기의 제후국으로 보았다. 마치 비정한 역사분위기를 만들어 중국인들의 청나라정부에 대한 연민과 보호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듯했다. 비록 이런 견해는 청나라가 거중지국(居中之國)이고 유아독존의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천조상방'의 관념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후에 발생한 '강린일핍(强隣日逼)'의 일은 설사 '춘추전국설'이라고 하더라도 청왕조의 체면을 제대로 보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879년, 일본은 청왕조의 속국인 유구왕국을 유구현으로 바꾸고 자신의 속지로 만든다. 청정부는 2년간 고민끝에 일본의 유구에 대한 종주국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유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번속국이었다고 한다면, 1883년 청불전쟁이후 큰 번속국인 월남도 빼앗긴다. 이러한 것은 청정부가 주나라천자의 구안지몽(苟安之夢)마저도 철저히 깨트려버린다. 그리고 청나라제국의 종번체제 자체가 흔들려 버린다. 대청황제의 체면은 번속국들의 앞에서 땅바닥에 떨어져 버리게 된다.
국가의 체면은 어떤 경우에도 잃어서는 안된다. 설사 그것이 한번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체면의 위하력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유사한 일은 계속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일본이 유구를 강점하고, 프랑스가 월남을 강점한 후, 청나라정부는 버마, 섬라, 네팔, 시킴등 번속국에 대한 종주권도 차례로 서방열강에게 빼앗겨 버린다.
만일 '춘추전국설'의 관념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사정은 제후국간의 병합이 될 것이다. 옛날 주나라 천자는 모두 용인했다. 아직 양무운동이라는 얼굴을 가리는 면사가 있던 청나라정부는 당연히 참고 용인한다. 이렇게 별다른 일없이 10여년이 지난 후, 이웃나라 일본은 갑오년에 다시 한번 찾아온다. 북양수군의 궤멸은 양무운동의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번속국인 조선을 잃게 된다. 청나라정부는 더더욱 예전 주나라천자의 처지에 더욱 가깝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월감에 젖어 있던 국가와 백성들은 부득이 수천년이래로 최착의 국가지위를 체험하게 된다. 그들은 마치 하룻밤만에 돌연 다 바뀌어 버린 것같다. 이건 더 이상 유가 법가의 규칙하에 돌아가던 세상이 아니다. 그저 약육강식의 밀림법칙이 적용될 뿐이다. 소위 "유원인즉사방귀지(柔遠人則四方歸之), 회제후즉천하외지(懷諸侯則天下畏之)'의 외교관념은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다. 이를 대체한 것은 바로 "자연도태의 격렬한 경쟁에서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상황이다.
이제 중국인들이 수천년간 가지고 있던 '천조상방'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와해되었다. 다만 1900년의 서태후정부는 마지막 노력을 한다. 그 결과 '경자국난'에서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을 침입하고, 황제화 태후는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쳐야하는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천조상방'의 마지막 잔존이념마저도 싸그리 없어져버린 것이다. '천조상방'의 국가이상은 철저히 '세계약국(世界弱國)'이라는 현실이 대체하게 된다. 심지어 지금까지고 숭양미외(崇洋媚外), 자아비박하는 악습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대참안(三大慘案)으로 본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의 배후 (0) | 2018.07.24 |
---|---|
근대 중국 최초의 여자유학생 (0) | 2018.06.19 |
사복춘(謝馥春): 중국 최초의 상표침해사건 (0) | 2018.05.15 |
북경대학(北京大學) 개교식에서의 광서제(光緖帝)의 강화(講話) (0) | 2018.05.11 |
"무술변법(戊戌變法)"의 4가지 놀라운 진상 (0) | 2018.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