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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사천(四川)" 지방명칭의 유래는.....?

by 중은우시 2017. 9. 10.

글: 화운초(和運超)


중국의 삼십여개 성(省)은 거의 모두 역사가 길다. 어떤 성은 상호간의 연원이 아주 깊다. 예를 들어 호남과 호북, 감숙과 영하, 서장과 청해, 광동과 광서등이다. 당연히 그 중에는 사천과 중경도 포함된다. 그외에 절대다수의 성의 명칭은 유구한 역사문화와 건치(建置)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일부 성의 경우에 어떤 상징을 쓴 것을 제외하면(예를 들어, 신강, 운남과 요녕) 사천처럼 의미의 유래를 이해하기 어려운 곳은 없다. (요녕의 행정국역은 원, 명때는 모두 전체 동북지구에 속해 있었다. 원나라때의 행성은 요양행성(遼陽行省)이다. 명나라때는 요동도사(遼東都司)이며, 청나라때는 흑룡강장군, 길림장군과 성경의 봉천장군으로 나누어 기본적으로 요녕지역에 나뉘어졌다. 청나라말기에 비로소 봉천행성이 된다. 민국시대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민국시대에는 동북지역을 한 때 여러 성으로 나누긴 했었다. 요녕이라는 명칭은 전국의 성이름중에서 나중에 나눠진 해남을 제외하고는 가장 나중에 나타난 것이다. 이름이 정해진 것은 이미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이다)


여러해동안 "사천"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주는 첫번째 인상은 말 그대로, "사천"은 그 경내에 4개의 주요한 큰 강 혹은 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장강(長江), 가릉강(嘉陵江), 민강(岷江), 대도하(大渡河, 일설에는 金沙江)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것을 합쳐서 "사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기실, 이것은 이 확실히 오해와 이견을 불러온 근원이다. "천(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손쉽게 "하천"을 연상한다. 더더구나 사천의 경내에는 하천이 아주 많다. 다만, "사천"을 행정구역명칭으로 쓴 역사적 연혁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제도상의 연원에서 온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당연히 다른 내력이 있어야 한다.


"성"의 이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행성(行省)제도가 출현한 것은 몽골의 원왕조이다. 원왕조가 설립한 행성은 갑자기 생각나서 무에서 유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근거는 송,금 두 왕조의 행대(行臺)와 로(路)의 두 가지 제도를 융합한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송,금때의 "로"는 다시 당나라 중후기 군벌번진징조로 인하여 출현한 "도(道)"에서 유래한다. 당왕조의 "도"는 다시 거란 요왕조에서 따온 것이다. 송,금때는 "도"를 "로"로 고친 것이다. 그러므로 "도로"라는 단어는 역사제도상에서는 아주 거시적인 개념이다.


사천이라는 지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당현종 이융기가 검남도(劍南道)라는 군사관할구역을 처음 설치한다. 그 후에 검남동천절도사(劍南東川節度使)와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를 둔다. 여기에서 "천"이라는 글자가 행정구역에서 나타났다. 이전의 역사에서 "천"이라는 글자는 사천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사서에 나타난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는 사천을 "촉지(蜀地)"라고 불렀다. 바꾸어 말하면, 비록 "천"이라는 글자가 품은 뜻은 비록 '하천"이지만, "사천"이라는 지명의 뜻은 경내의 하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 가리킨 것은 관할구역이었다. 그리고 '사천'이라는 칭호와 행정구역이 출현한 것은 주로 당,송시대의 변혁이라는 중요한 전환단계를 보여준다.


당왕조 말기에서 오대십국까지 사천의 경내에는 전후로 왕씨(王氏)의 전촉(前蜀)과 맹씨(孟氏)의 후촉(後蜀)이라는 두 개의 지방정권이 나타난다. 송나라가 건립되면서 맹씨의 후촉을 멸하고 서천로(西川路)를 설치한다. 송나라때의 "로"는 원래 일종의 '감찰구역'이다. 보기에 당나라의 '도'와 비슷하다. 다만 주요 기능은 약간 다르다. 이는 송태조 조광윤이 '황포가신'을 겪으면서 당말 오대의 군벌번진의 화를 방비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의 행정구역은 로부주현(路府州縣)의 4단계가 있었다. '로'는 최상위등급의 행정기구이다. 그러나, 사람을 두는 측면에서 각 '로'는 기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리배치도 각각 달랐다. ㅅ예를 들어, 군사민정은 안무사(按撫使), 재정은 전운사(轉運使)가 있어 동시에 감찰권을 가졌다; 그리고 형법소송은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가 있다. 송나라때의 "로"의 수량은 매 시기마다 달랐다. 다만 적지 않은 명칭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나중에는 오늘날의 성의 명칭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하북, 호남, 호북, 복건, 광동, 광서등은 모두 송나라 초기 15로의 명칭이다. 마찬가지로, 사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바로 송나라때 설립한 로이다. 사천은 어느 하나의 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내의 4개 로를 합쳐서 '사천'이라고 불렀다.





송태조 개보6년(973년) 당말 오대십국때 설립한 서천로(西川路)에서 협서로(峽西路)를 떼어낸다. 협서의 구역은 장강삼섭 서쪽이고, 치소(治所)는 기주(夔州, 지금의 중경직할시 봉절현)이다. 송태종 태평흥국6년(981년)에는 다시 서천로와 협서로를 합쳐서 천협로(川峽路)로명명한다. 송진종 함평4년(1001년)에는 천협로를 다시 4개로 나눈다. 즉 익주로(益州路)(나중에 성도부로(成都府路)로 개명한다), 재주로(梓州路)(나중에 동천로(潼川路)로 개명한다. 재주는 지금의 면양시 삼대현이다), 이주로(利州路, 치소는 지금의 광원시), 기주로가 그것이다. 이를 합쳐서 천협사로(川峽四路)라고 불렀다. 이를 약칭하여 "사천로(四川路)"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사천'이라는 명칭이 행정제도에서의 진실한 내력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천의 행정설치가 여러번 바뀌고 분화된 것에 대하여는 특수한 원인이 있다.


송나라초기에 사천을 통일하는데,대장 왕전빈(王全斌)이 사천으로 들어가는데 아주 어려웠다. 5만의 송군이 병력20만을 보유한 후촉을 공격하는데 모두 66일이 걸렸을 뿐이다. 이는 거의 군사적 기적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많은 살륙을 저질렀다. 첫째는 포로를 많이 죽여서 금기를 어겼다. 둘째는 국면을 통제하기 위하여 부하들이 명망있는 전사웅(全師雄)의 일가족을 죽이고 처와 딸을 차지하도록 종용했다. 이는 촉군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괙관적으로 촉을 평정하는데 전사자를 늘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비록 전체 과정은 아주 순조로워 보이지만, 송나라는 왕전빈이 전촉, 후촉의 거의 50여년간 축적해놓은 대량의 금은보화를 강을 따라 운송하여 중원 개봉부로 보낸다. 명목으로는 "봉장고은(封欌庫銀)이라고 앴지만, 의도는 의도는 북한(北漢)을 멸망시킨 후 유명하 연운십육주를 돈으로 되사오기 위한 것이었다.


촉을 평정하는 것은 통일을 위한 큰 일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일처리를 하면서 송왕조는 초기에 인심을 크게 잃는다. 왕전빈은 부하장수들을 단단히 단속하지 못해서, 군기가 무너지는 문제가 아주 심하게 드러났다. 민간에서는 후촉의 군주인 맹창(孟昶)의 후비를 송나라황제가 강제로 빼앗아 차지했다는 풍류이야기가 전해진다. 왜냐하면 맹창이 투항한 후 개봉으로 압솓되었는데, 7일이라는 짧은 시간내에 병사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지금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가 성도를 떠날 때, 10여만명의 백성들이 송왕조로부터 처벌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망국의 군주인 그를 배웅하는데 백여리에 이르는 길의 연도에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 장면이 얼마나 비장할 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송나라관리들이 촉을 통치하는데 너무 가혹하고 인심을 얻지 못하여 원래 후촉의 많은 관리와 부호들은 속속 집단으로 개봉부로 가서 탄원을 한다. 그리하여 촉지방의 인심은 흔들리고, 사회는 지극히 불안정했다. 그러므로, 비록 송나라가 촉지를 무척이나 빨리 점령했지만, 나중에 풍파를 가라앉히고 촉지방을 안정시키는대는 들인 댓가는 아주 크고 길었다. 이는 조광윤이 나중에 무장의 발호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이유이고, 나중에 송태종이 문인이 관리하는 것으로 바꾼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왕전빈이 처음에 촉을 평정하면서 한 실수가 주요 책임이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모든 잘못을 돌릴 수는 없다. 전체 당말 오대이래의 무장들의 누습은 이미 오랫동안 쌓여져 왔다. 그는 그 시대의 객관적인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다. 촉에 들어간 후에 재물을 강탈하는 것은 황제인 조광윤도 묵인한 일이다. 특히 송왕조가 촉을 평정한 큰 원인은 원래 촉이 부유했기 때문이다. 옛날 당태종 이세민이 왕세충의 낙양을 공격할 때, 대군에게 성안의 재물을 취할 것을 허용했다. 이는 고대제왕이 사기를 올려 함락하기 어려운 성을 함락시킬 때 쓰는 관용적인 수단이다. 서촉은 역대 이래로 천험(天險)이라 일컬어 졌고, 왕전빈은 천북에서 검각일대를 공격하여 성도로 내려온다. 만일 군대에 완강한 투지와 장병들이 일심동체가 되지 않는다면, 아예 왕전빈이 소수로 다수를 이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기간내에 성도에 진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윤은 촉을 평정하기 위하여 왕전빈에게 면수기의(面授機宜)했을 뿐아니라, 장병들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한 바 있다: "짐은 서촉의 토지만 원한다. 나머지는 하나도 필요없다. 너희가 사천에 들어간 후에 군수물자와 양식을 공용으로 넣는 것을 제외하고, 금은재화는 모조리 출정한 병사들이 나누어 가져라."


왕전빈이 촉을 평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후, 개봉의 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송사> 권255 <왕전빈전>에 따르면, 백관들은 왕전빈등의 죄를 중죄로 처리해야한다고 의견을 모은다. 왕전빈의 죄책은 주로 조광윤을 대신해서 진 것이므로, 당연히 조광윤은 그를 무겁게 처벌하지 않는다. 그저 군권만 박탈했을 뿐이다. 왕전빈은 그 후에 부유한 한량으로 산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절도관찰유후(節度觀察留後)의 직무를 가지고 있었다. 촉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처벌을 받은 부장으로는 왕인첨(王仁瞻), 최언진(崔彦進)등이 있는데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처벌받았다. 이것도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과 유사한 연극인 셈이다. 왕전빈은 나중에 남당을 정벌할 때 기괴한 모범을 보인다. 조광윤은 남당을 평정한 후, 왕전빈에게 무녕절도사의 직위를 내릴 때 이렇게 말한다: "강좌(江左)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나는 남쪽을 정벌하는 여러 장수들이 기율을 지키지 않을까 우려하여, 너를 몇년간 억눌러서 나를 위하여 희생을 했다. 현재는 이미 금릉을 함락시켰으니, 너에게 절도사의 직위를 내리겠다." 그리고 그에게 은기 만냥, 비단 만필, 돈 천만을 내린다. 왕금빈은 부임한 후 몇달만에 사망하는데, 향년 69세였고, 중서령에 추증된다.


지금은 모두 송나라의 경제가 고대왕조의 최고봉이라고 인정한다. 송나라의 개국기초는 주로 남당과 서촉이라는 두 부유한 지역을 취한데 의존했다. 소위 당시에 제정한 통일대계의 순서는 "먼저 쉬운 것을 해결하고 나중에 어려운 것을 해결한다. 먼저 남쪽을 해겷하고 나중에 북쪽을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국력을 키워야만 북방의 거란 요나라를 상대할 수 있었다. 당시 남당을 평정한 송나라군의 대장중 한 명은 조한(曹翰)이다. 그가 사적으로 챙긴 재물이 수억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여산 동림사의 나한상을 경사로 옮긴다고 하면서, 암중으로 백여척의 전선을 동원하여 금은보화를 옮겼다. 왕전빈등이 처벌받은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묘한 점이 있다.


송나라는 촉지방에서 축적해놓은 재물을 약탈했을 뿐아니라, 현지의 차농(茶農)도 착취했다. 파촉지구가 역대이래 부유했던 것은 첫째는 비단이 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와 소금이 났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고대 봉건왕조의 경제명맥이다. 송태종 조광의가 황위를 승계한 후, 사천에서는 저명한 왕소파(王小波), 이순(李順)의 반란이 일어난다. 개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민중이 반란이 일어나다니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송왕조의 전반기에 촉을 다스린 명신은 장영(張詠)이다. 송태종 태평흥국5년(981년)에 진사가 되었고, 처음에는 호북 숭양현(지금의 호북성 남부, 호남, 강서와 접경지역임), 현지관청을 차를 위하여 빈민들을 착취했고,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다. 농민들은 뽕나무를 심지 않았는데 그것은 차를 심는 것이 이윤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청의 약탈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을 가난ㅇ 빠진다. 장영은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비단()으로 세금을 내게 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준다. 장영은 바로 왕소파, 이순의 반란이후 촉으로 가서 익주지부(益州知府)가 된다. 왕소파, 이순은 바로 차농출신이고, 그들은 청성(靑城) 사람이다. 그런데, 청성이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이견이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사천의 저명한 청성산을 가리킨다고 본다. 오늘날의 도강언시(都江堰市)이다. 청성현은 당연히 청성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러나 청성전산(靑城前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청성후산(靑城後山)을 가리킨다. 청성현은 당나라때의 촉주(蜀州)이다. 치소는 숭주시(崇州市)이다. 이 현의 치소는 서북 봉서산(鳳棲山) 아래에 있다. 바로 오늘날 숭주에서 아주 유명한 가자진(街子鎭)이다. 바로 청성후산과 서로 멀지 않으며 이웃하고 있다. 당나라때의 사서 <원화군현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청성현, 수공2년에 촉주로 고치다. 개원18년, 여전히 청성이라고 한다." "청성과 촉주는 한 곳을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다." 그런데, 도강언의 원명은 여러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관현(灌縣)이다. 이는 바로 왕건(王建)의 전촉(前蜀)때 관구(灌口)를 관주(灌州)로 고친대서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관주는 송나라때 계속 청성, 도강(導江) 두 개 현을 관할했고, 원나라이후에는 관주를 관현으로 격하시킨다. 그후에 명칭은 바뀐 적이 없다. 이는 도강언의 명칭변천이다.


장영은 왕소파, 이순의 반란을 평정한 후, 성도부(成都府)를 익주로 격을 내린다. 현지의 풍파는 계속 평정되지 못했다. 장여(張余)는 반란군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서, 가, 융, 노, 유, 부, 충, 만, 개의 팔개주를 함락시킨다. 지도원년에는 장여가 관병에 포로로 잡힌다. 지도3년에는 서천광무졸 유간(劉)이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장영은 다시 출병하여 진압한다. 이는 송태종이 즉위한 마지막 해(997년)에 일어났다. 촉에서는 계속하여 반란이 일어났는데, 송태종후기의 6년간 계속된다. 그래서, 송나라전기의 사천은 국면이 계속 안정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행정구획이 계속 바뀌게 된다. 나중에 몽골의 원나라가 남송을 정벌하면서, 촉을 평정하는데 곤란을 겪는다. 그리하여 몽케 칸이 조어산에서 전사하기도 한다. 그후 몽골은 각지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는데, 송나라의 천협사로는 합쳐서 사천행중서성(四川行中書省)이 된다. "사천성"이라는 이름은 이때 세상에 나타났다. 명청 양대에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원명청 3왕조에 장족, 강족, 이족등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계속 독특했다. 원칙적으로 사천행성에 예속되지 않는다. 기미주부 혹은 토사(土司)관할구역에 들어간다. 특히 사천의 장족지구는 민국시대때 잠시 서강성(西康省)을 설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