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경원(陳景元)
한마디로 말해서, 아방궁전 건축유적지에서 불에 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아방전전이 일찌기 완공되었다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신뢰성이 낮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방전전 건축유적지 위에서 진나라벽돌, 진나라기와나 기타 건축재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아방전전이 일찌기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또 한가지 상황으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방전전이 이미 지어졌고, 그것이 항우에 의하여 불태워지지 않고, 그것을 후인들이 계속 사용하다가 수나라말기 당나라초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여 결국 현장에 남겨진 쓸모있는 목재, 벽돌, 기와, 석재등 재료는 모두 후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면, 이육방이 현장에서 당연히 그런 물건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용가치가 없는 물건은 자연히 항토대기의 표면에 버려졌다가 해가 지나고 날이 지나면서 점차 땅 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는 이 부분의 문화유적을 왜 찾을 수 없느냐이다.
아래의 사례를 들어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주 필요할 것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만일 예전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운 후에 남겨진 목탄, 잿더미를 찾으려고 하면, 찾아낼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 1860년 원명원이 불에 탄다.비록 침략군은 가장 귀중한 재물을 훔쳐갔지만, 원명원내의 여러가지 아름다은 건축들 예를 들어, "봉도경대, 해옥개금, 만춘원궁문, 서양루등 중서식궁전건축과 여러 원림은 여전히 모두 상당히 잘 남아 있다. 나중에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했을 때, 서태후는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가고, 원명원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진화타겁(趁진火打劫)의 관리, 병사, 백성들은 원명원내 궁전의 건축기둥, 대들보, 다리를 톱으로 잘라서 밧줄로 끌어서 도둑질해갔다. 그래서 청하진에는 목재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거래가 아주 활발했다. 원내의 크고 작은 나무는 모조래 잘려나가서, 목탄공장으로 간다. 나뭇가지와 뿌리까지도 모조리 태워서 목탄이 되어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원명원내에 남아있던 목탄까지도 모조리 팔려나갔다.
그뿐아니라, 현지의 여러 백성들도 여기저기 버려져있던 물품을 주워갔다. 심지어 원명원을 지키는 태감들이 스스로 훔쳐가는 짓을 한다. 이렇게 하여 쉽게 찾을 수 있는 가치있는 물건은 금방 모두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깡패, 유민들은 땅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하여 땅을 다 파헤친다. 땅을 삼척 깊이로 파서 흙 속에 있을지도 모를 보물을 찾는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이들 태감, 관병, 유민을 모조리 "사토적(篩土賊)"이라고 불렀다. 관리들도 눈감아주는 형국이었다. 심지어 같이 이익을 나눠가졌다. 북경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흙을 체로 걸르면(篩土), 흙을 체로 걸르면 평생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결론적으로, 폐허에서 쓸모있는 물건은 지면의 벽돌, 기와, 돌에서부터 목정(木釘), 동관등을 모조리 사람들이 가져가 버린다.
저명한 원명원의 최후는 모두 이렇게 비참하고 불행했다. 목탄, 잿더미같은 류의 물건은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 이육방 선생은 영불연합군이 당시 원명원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역사를 다시 천년 앞으로 돌려서, 아방궁이 수말당초까지 보존되어 있었고, 규모가 거대한 수당궁전이 자신의 건축체계를 형성하는 외에 아방전전은 세계최대의 점유면적을 자랑하는 당라나 장안성 내에 포위된다. 자연히 일종의 철저히 도태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용가치가 있는 목재는 중복이용될 확률이 아주 뫂다. 만일 지면에 더 많은 물품이 있었다면, 원명원의 석사자, 석화표, 석조상과 마찬가지로, 모두 누군가 가져와서 처리했을 것이다. 원명원의 지하보물도 모조리 후인들이 흙을 체로 걸러서 가져간 것처럼 아방전전유적지의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물건도 천년이래로 모두 후인들에 의하여 사라졌을 것이다.
이육방이 이끄는 아방궁고고팀은 전전유적지에서 사상유례없는 고고탐측을 벌인다. 1미터 방원내에 5개의 탐공을 찌른다. 탐공총수는 만여개에 달한다. 농경토와 우토층(擾土層)을 걷어내면, 아래는 바로 항토층이다. 세심하게 천공지점을 선정하여 항토층이 진나라원시지면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항토층은 전전의 기초인 대기이다. 그러나 위의 부토는 진나라이후의 퇴적토이다. 고고팀은 이 퇴적토층에서 항토대기의 위에서 건축유물인 벽돌, 기와, 목석류를 발견하지 못했다. 홍소토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벽돌, 기와와 목재는 중국고대건축의 필수재료이다. 고고팀이 거기에서 몇년간 작업을 하면서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육방 선생처럼 "실물유적으로 아방궁이 확실히 완공되었었다는 것을 즘영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아방궁의 유적지에서 움직일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 가져가서 현재 물건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두 가지 의견이 대치하고 있는데, 이런 유례없는 학술논쟁에서 역사의 원모습에 부합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일 것이다. 이 문제를 추가로 더 분석해볼 수 있을까? 다행히 역사상 아주 유사한 사례가 있어서, 참조해볼 만하다. 원명원은 폐허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원내에서 토지를 평탄화하고 농작물을 심었다. 그리하여 보리밭으로 바뀌게 된다. 1940년이후,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에 성내의 양식이 아주 부족해져서, 다시 친일정부는 개간을 장려한다. 이 때부터 많은 농민들이 계속 원명원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산을 파내고, 호수를 메워서 논을 만들어 벼를 심는다. 보리를 심고, 벼를 심으려면 땅을 깊이 갈아야 하고 잡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하여 경작토층의 살수록 두터워진다. 농작물이 생장하고 뿌리를 내리기 적합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래야 생산량이 늘어났다. 토지를 깊이 파는 과정에서 원명원이 남겨준 실용가치가 없는 부서진 기왓장이나 벽돌, 홍소토등은 농사짓는 농민에 의하여 철저히 제거되게 된다.
기실,원명원에서 농사를 짓는 광경은 아방전전 유적지 상에서도 이미 발생하였다. 아방전전은 당나라말기에 버려지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그 후에 원명원과 같은 길을 걷는다. 모든 쓸모있고 쓸모없는 물건은 모조리 정리제거되었다. 아방전전유적지는 송나라때 '폐"해져서 황무지로 바뀐다. 토지는 황무지로 바뀌지만, 토지의 주인은 항상 있다. 역대왕조마다 주인이 달랐다. 서로 다르게 토지를 이용한다. 먼저 나무를 심고, 오동나무를 심는다. 나무를 심으려면 갱을 깊이 파야 한다. 곳곳에 나무를 심으려면 곳곳을 모두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흙무더기를 부숴서 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가 자라기 좋다. 오동나무를 심으려면 깊으면 깊을 수록 좋고, 크면 클수록 좋다. 아쉽게도 깊이 구멍을 파는 것은 작업량이 너무 많다. 그래서 거기에 심은 나무는 모두 크게 자라지 못했다.
나무를 심는 것과 농작물을 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무를 심는 것은 깊이 파기는 하지만, 일부분이다. 점점이 파게 되고 작은 범위만 판다. 그런데, 대면적에 걸쳐서 대규모로 농작물을 심으려면, 농민은 더 많이 일을 해야 하고 더 많은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이 댓가는 바로 반족하여 토지를 갈아엎는 것이다. 계속하여 토지를 개량하는 것이다. 만일 깊이 갈아서 농작물을 심지 않으면 많은 생산량을 기대할 수가 없다. 당연히 처음에 나농작물을 심을 때는 토지가 척박했을 것이고, 생산량도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고, 생산량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낫다. 생산량은 토지의 개량으로 증가한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공을 들이면 자연히 효과는 나타난다. 전전의 대기 위에서 역대리래로 깊이 파고, 다시 깊이 파고, 또 다시 깊이 파면서 토지의 비옥도는 제고되고 다시 제고되고 또 다시 제고된다. 이렇게 한 결과는 아방궁이 버려진 후에 토지개량은 깊이와 너비를 더해간다. 흙속에 혼재되어 있던 잡물(부서진 벽돌, 기와같은 쓸모없는 물건)은 반복하여 모조리 제거되게 된다.
여러 왕조를 거쳐, 근대사회에 이르자,아방전전 유적지는 이미 보리밭이 되어 버렸다. 이육방은 2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 유적지를 찾았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기실, 전문적이거나 비전문적인 고고인원들이 일찌감치 아방전전의 유적지 위에서 많은 유용하고 가치있는 물건을 찾아냈다. 고고학자인 왕학리(王學理) 선생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1950년대, 현지의 농민이 전전 북부에서 흙을 파다가, 일찌기 운문와당(雲紋瓦當), 판와(板瓦), 잔전(殘塼), 석주초(石柱礎)등 유물 및 도수관도(陶水管道)등 건축유물을 파냈다. 아방궁 전전유적지 건축의 통와(筒瓦), 포지전(鋪地塼), 원형과 오각형의 도질수도(陶質水道), 누두(漏斗), 원석주초(原石柱礎)등 유물이 곳곳에 있었다. 각종 금속의, 옥질의 문물도 역대 이래 많이 출토되었다. 일부 문박(文博)공작자도 여러번 조사를 진행하여 마찬가지 상황을 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전전의 기오 취에 원래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왕학리의 묘사는 진실하고 믿을만하다. 다른 측면에서의 유력한 증거로 뒷받침도 된다.
전 섬서성문관회 왕한장(王翰章)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1953년 나는 왕세창(王世昌)등과 전전유적지로 가서 조사한 바 있다. 홍장피(紅墻皮), 전와(塼瓦)등을 발견했다. 농사짓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이 아주 컸다. 1957년 촌민이 흙을 파서 벽돌을 구웠다. 문관회 주임 무백륜(武伯綸) 선생은 나를 현장에 보내서 살펴보게 했다. 땅에는 곳곳에 흙무더기, 장피(墻皮), 전와(塼瓦)같은 것들이 쌓여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큰 주동(柱洞)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측량조사했다. 서경주위회는 거기에 표지를 세웠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곳에서 본 머리가 없는 '옹중(翁仲) 석상이다. 그중 한 석상은 지금도 섬서박물관의 서무(西廡)에 보관되어 있다. 단지, '농업학대채'후 그런 흙덩이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흙무더기를 잿더미와 섞어서 같이 도로에 깔면 아주 튼튼하다는 것이다." 저명한 고고학자 왕비충(王丕忠) 선생도 이렇게 확인해준다: 당시 본인은 사학자 하한남(何漢南) 선생과 아방전전 유적지에서 많은 아주 완전한 와편, 와당을 보았다. 나는 일부 '우(右), 공(工)'자가 있는 와편을 주워 왔고, 모조리 함양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아방궁의 와당문경(瓦當文京)을 얘기하자면 재료는 더 많다. 예를 들어 <금석췌편.권사>라는 책에는 '위(衛)'자 와당이 채록되어 있다. <장안지>라는 책에는 '초(楚)'자가 있는 와당이 채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아방궁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위나라는 초기에 진나라와 결맹을 맺었다가 나중에 위(魏)나라에 멸망당한다. '위(衛)'자 와당의 출현은 아방궁내에 결맹한 군왕을 위하여 만든 이국궁전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초'자와당의 출현은 아방궁의 범위내에 초나라국왕을 위하여 혹은 특별히 초나라사람을 위하여 만든 궁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진장야왕의 이름이 '자초(子楚)'이기 때문에 '초'자는 피휘대상이다. 그래서 아방궁의 범위내에 '초'자가 있는 와당은 반드시 진시황과 진장양왕의 집권이전의 연대에 나온 것이다. <금석췌편.권사>는 이렇게 분명히 기록한다. '장생무극(長生無極)'이라는 글자가 새겨지고, "유천항령(維天降靈), 연원만년(延元萬年), 천하강녕(天下康寧)'의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모조리 '아방궁 고기(故基)에서 얻었다'
그외에 <진한와당문자>라는 책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아방궁의 기와는(阿房宮瓦), 장생무극이라고 했다. 함양의 이남에서 빈위의 동으로 여산북록에 이르기까지 폐허가 된 건물이나 담장사이에서 왕왕 얻을 수 있다." <진한와당도설>이라는 책에서는 "연원만년, 천하간영은 아방궁 고기에서 얻었다.", 이동충태(伊東忠太)의 <중국건축사>라는 책에서는 '아방궁에서 출토된 와당은 16종이다. 위에는 '서와이십구년육월관와자양' 이 아방궁 옛터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아방궁 옛터는 여전히 옛기와가 발견된다." 족일희륙(足日喜六)은 <장안사적고>라는 책에서 역시 이렇게 말한다. "아방궁 유적지 위에서 일부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각해 만든 주초(柱礎) 잔결(殘缺)이 있다." 그렇게 많은 고고학의 권위자, 문화재관리전문가가 아방전전 유적지 위에서 벽돌, 와당, 주동, 주초, 석상을 바련했다고 하고, 어떤 것은 이미 박물관에 보내어져 보관되고 있다. 이육방선생이 아방궁의 실물자료를 찾으려면 먼저 섬서성박물관, 함양박물관을 가서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육방은 책에서 그들 '아방궁와'의 재료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유보하고 있다. 2007년 6월 27일 그녀는 <아방궁의 "다른 관점">이라는 글에서 두 개의 평론성 글을 남겼는데, "<진한와당도설>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관건은 와당등 역사유물이 없이는 잋럼 규모가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완공된 후에 다시 버려졌다면, 당연히 그 지기(地基)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진한와당도설>에 수록된 '아방궁와'를 아방궁 고지에서 얻었다는 주장은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왜냐하면 거대한 건축이 만일 버려졌다면,그것의 건축기지는 보존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겨우 일부 와당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무슨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기억에 새로운 것은 이육방 선생등은 계속하여 전전유적지에서 기와, 벽돌, 와당을 찾지 못했다는 거을 주요이유로 하여 아방전전이 건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부정했었는데, 지금은 '아방궁와'의 존재에 관한 재료가 나타난 후에도 그녀는 인정하지 않고, 이것이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방궁와'는 찾았다. 그러면 '아방궁전(벽돌)'도 찾았을까? 청나라 주동(朱棟)은 <연소사(硯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방궁전연(阿房宮磚硯)은 밀랍색이고, 미앙궁전연은 황색이다" 이는 후세에 '아방궁전'으로 귀한 벼루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육방 선생이 말하는 건축지기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건축공사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건축지기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그 뜻은 건축지기를 찾지 못하면, 그녀는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만일 흙이 무른 지역에 건축공사를 벌이려면 당연히 지기(地基)를 다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진나라때의 전(磚)은 오로지 도로를 까는데만 쓰였다. 진나라궁전의 벽은 모두 흙덩이였다. 소위 지기, 기초는 모두 항토로 축성했다. 아방전전이 12미터높이의 대기 자체는 바로 견고한 항토지기가 아닌가? 이를 보면 이육방 선생이 와당, 전, 지기같은 류를 이유로 아방전전이 장기간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근거가 없다. 실로 공허한 노력이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고고논증과정에서 자신이 맞는 점을 말하든, 아니면 상대방의 틀린 점을 말하든 모두 신뢰할만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육방 선생은 <진한와당문자> <진한와당도설>에서 '아방궁와'에 관한 자료를 모두 믿지 못한다고 했다. 만일 누군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에서인가라고 물으면 어떡할 것인가? 이육방선생은 아무런 해명이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극히 중요하고 엄숙한 문제를 엄격한 고고논증을 거치지 않은 상황하에서 아무런이유도 없이 마음대로 대중에게 발표해 버린 것이다. 왕학리, 왕한장, 왕비충등 선생은 모두 고고학계의 권위자들이다. 섬서성박물관, 함양시박물관은 모두 국내의 저명한 박물관이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는 그렇게 많은 아방전전 유적에서 발견된 중요한 기물이 있는데, 서안, 함양에서 여러해동안 생활해온 이육방 선생이 전혀 알려고 하거나 운용하지 않다니, 이는 그녀의 고고학계 권위자라는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다. ,
'중국과 문화 > 아방궁의 역사진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방궁의 역사진상(9): 아방궁이 보존된 주요원인은 무엇일까? (0) | 2018.02.23 |
---|---|
아방궁의 역사진상(7): 아방궁이 불질러졌다는 사료는 어디에 있는가? (0) | 2018.02.23 |
아방궁의 역사진상(6): 후화원을 먼저 지을 수는 없다 (0) | 2018.02.23 |
아방궁의 역사진상(5): 아방궁연구의 새로운 시도 (0) | 2018.02.23 |
아방궁의 역사진상(4): 고대궁전건축의 모형설계법 (0) | 2018.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