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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4): 고대궁전건축의 모형설계법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목조구조의 궁전건축은 철거할 수도 있고, 불태울 수도 있고, 새로 지을 수도 있다. 개조하는 것은 새로 짓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다. 새로운 건축배치, 새로운 건축구조, 새로운 건축형식이 계속하여 나타난다. 새로운 건축재료, 새로운 건축기술도 새 건축물에서 계속 응용된다. <사기.자격앨전>에는 "형가가 비수를 진왕(진시황)에게 던졌으나 적중하지 못하고, 동주(銅柱)에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진나라는 일찌기 함양궁을 짓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목재가 부족하면, 다른 간단한 방법을 채택했었다는 것이다. 대량의 구리로 만든 무기를 녹여서, 새로 주조하여 기둥으로 쓰는 것등이다. 당시 어떤 궁전의 기둥은 실제로 동으로 부어서 만든 것일 것이다. 만일 국군이 당초에 긴급히 궁전을 확장하고자 했다면, 그리고 목재가 많이 부족했다면, 청동을 부어서 만드는 방식으로 일부분 원래 궁전을 만들 때 반드시 쓰이는 기둥이나 대들보의 목재를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만부득이한 경우에 비교적 총명한 선택이고 일종의 응급조치이다. 이런 방법이 아주 현실적이다.


목조구조건축은 불태우려면 불태울 수 있고, 철거하려면 철거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불태우고 처거하는 일은 확실히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다만 이로 인하여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중국역사상 모든 궁전이 반드시 후대에 불태워지거나 철거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고. 기실, 신구정권이 전후로 실제사용의 필요에 따라 일부분 전왕조의 건축물을 남겨두는 외에, 또 다른 한 가지 현상이 있다; 격조(隔朝) 격대(隔代)에 걸친 궁전은 후인들이 일반적으로 불태우지도 철거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은 악의적으로 보복하려는 심리로 진나라궁전을 불태워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습진제(漢襲秦制)'하였으므로 진나라의 제도는 모두 한나라에서 계승된다. 유방이 죽기전에 진시황릉을 잘 보호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진한간에는 중간에 항우가 건립했던 대초(大楚)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의 대초정권은 비록 수명이 짧기는 해도, 진시황을을 파헤치고, 위북지구의 진나라궁전을 불태운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에 대한 분노를 이미 해소했다.


전왕조의 궁전을 그대로 사용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청나라때의 북경고궁과 다른 여러 왕궁저택이다. 완벽하게 남겨서 후대에 넘겨주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계속하여 거액의 돈을 들여, 수리하고 유지보수하여 고대건축의 찬란함을 영원히 후대에 남겨줄 수 있게 되었다. 전왕조의 궁전을 처리하는데 대하여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왜 후인들에게 이렇게 숭고한 예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원래 이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관념이 변한 때문이다. 과거에 궁전을 불태우고 철거한 것은 대부분 정치적 원한을 풀기 위함이고, 전왕조의 궁전을 정치적 압박, 정권의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봉건제도가 철저히 전복되면서, 제왕통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궁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궁전의 모든 기둥, 모든 대들보에는 인민대중의 피와 땀이 스며 있다. 그곳의 모든 채색화에는 모든 조각에는 모든 석판에는 고대 건축장인의 총명과 지혜가 들어 있다. 그것은 수많은 인민들이 창조해낸 물질적 재산이다. 그것은 중국역사의 가장 좋은 증인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건축은 어떤 경우 진정으로 건설한 공사실체이고, 어떤 것은 문인의 작품에서 구상해낸 건축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신화소설의 상계천궁은 작자가 쓴 샹그릴라이다. 관광책에 나오는 신기한 새계, 도굴모험소설에 나오는 지하묘실등은 모두 각종 신비막측한 건축기관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허구의 상상의 건축이미지이다. 진실하게 존재하는 건축실체는 아닌 것이다. 문학작품의 건축은 모두 의경(意境)을 드러낼 필요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창작자는 건축의 각종 사무적이고 실질적인 조작과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각종 건축의 부지선정문제를. 각종 건축재료를 접촉할 필요도 없고, 어디서 오는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시공건설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기술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진실한 건축공사에서는 이것들이 모두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시공공기는 모든 공사건설에서 가장 먼저 확보되어야할 문제이다.


아방궁의 건설시공공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벌복, 건조, 가공, 설치, 인테리어등의 일련의 구체적 공사외에, 또 한가지 있다. 건축설계에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대의 많은 고고학자는 진나라공사건설문제를 논증할 때, 자주 '셜계청사진', '공사도면'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어떤 공사건설이든 모두 공사설계, 공사청사진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2000여년전인 진나라때도 그들은 이런 것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들은 모른다. 어떤 건설프로젝트도 모두 아주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공정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아방궁이라는 관광지를 만들려고 하면, 전문적인 원림건축설계부서와 공사설계를 진행해야 한다. 설계인원은 현장지형모양을 근거로, 궁전전체배치설계, 개별궁전평면, 입면, 단면설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궁전의 각각 부분의 상세설계도 해야 한다. 그것을 그려서 공사의 '청사진'으로 삼는다면 실제로 여러 해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의 공사는 설계를 필요로 하는데, 고대의 공사도 설계가 필요했다. 설계가 없으면 어떻게 시공을 하고, 시공을 조직하겠는가. 만일 상세하고 세밀한 시공조직을 배치하지 않으면, 수십만명의 시공현장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고대에는 설계도면을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고고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한번도 진정한 건축설계도, 구조시공도가 발견된 적이 없다. 설사 현재 세계각국에서 사용하는 평면, 입면, 단면도의 원리도 최초에 프랑스의 르노가 제안한 것이다. 현재까지 겨우 200여년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는 송나라때 <영조법식>과 청나라때 <공부영조칙례>에 도면이 있다. 모두 진짜 실제시공설계에 쓴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공사설계와 시공도면이 없는 상황하에서, 무엇을 가지고 공사설계와 시공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해주겠다. 외국이든 중국이든 고대에는 입체적인 건축소모형을 이용해서, 공사설계와 시공문제를 해결했다.


건축공사기술분야에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모형발전사가 있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원시사회의 사람은 언어도없고, 문자도 없다. 그런데 계속 진보하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건축기술이 있다. 어떻게 일대 또 일대 전할 수 있었을까? 강서, 강소, 섬서, 감숙등지의 여러 신석기유적지 중에서, 각종 도기로 만든 소모형이 출토된 바 있다. 거기에는 문도 있고, 창문도 있고, 벽도 있고, 지붕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고대인들이 소리없이 후대에 전파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것은 부장품이 아니냐.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원시사회의 집은 공유이다.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어떤 모형은 묘장이 아니라 건축유적징서 출토된다. <사기.귀책열전>에는 '걸작와실(傑作瓦室)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상(夏商)시기에 기와지붕을 얹은 집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기와'는 그저 도기류제품의 총칭이었다. 그래서 역사상 기록된 '와실, 와옥'은 기실 일종의 도기로 만든, 입체적인 건축모형일 뿐이다.


전국시대의 묘장에서, 자주 출토되는 개별적인 두공모형(斗拱模型)이 있다. 민간에서는 두공(지붕받침)을 사용할 수 없었다. 두공을 작은 묘에 넣은 것은 묘주인의 지위가 높지 않지만, 궁전설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마도 그는 고대의 건축가일 것이다. 북위 장소유(蔣少遊), 수나라 우문개(宇文愷), 송나라 이충서(李忠恕), 청나라 양구(梁九)와 뇌발달(雷發達)등은 모두 저명한 건축모형제작자이다. 청나라의 태화전, 피서산장, 원명원 및 모든 제왕능묘의 건축설계는 각종 소축척으로 만든 입체건축모형에 근거해서 그 모양대로 시공건설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궁정건축가가 제작한 궁전, 능묘의 모형실물은 지금까지도 완벽하고 아무런 손상없이 고궁박물원과 북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국도 이러했고, 외국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는 계속하여 입체모형으로 설계와 시공문제를 해결했다. 르네상스시기의 다빈치, 미켈란젤로는 모두 건축모형제작의 대가들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장인역사는 하나의 건축모형발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입체모형을 이용하여 궁전의 건축설계를 하면, 입체적이고 직관적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알 수 있다. 비록 좋은 설계방법이기는 하지만, 모형을 만드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재료가 필요하다. 그들은 전문성이 높아서, 업무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적다. 대규모작업을 할 수가 없다. 아방궁의 수백개 대소궁전을 하나하나 만들어야 한다. 매 건축물의 수천개, 수만개에 이르른 건축재료을 동일한 축척으로 나누어 소모형을 만들고 그 후에 전체적으로 조립하고, 각종 건축방안을 만든다. 모형은 군왕에게 보내어 통과되어야 한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야 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 심사를 통과하면, 모든 재료의 가격을 추산하여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공부에서 돈을 내므로 각종 장인, 각종 모형모양에 따라 실물의 건축재료를 만든다. 그 후에 통일적으로 시공하고 안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큰 궁전이 만들어진다. 이런 공정모형설계시간은 적게는 몇년, 길게는 십년이 걸린다. 더 앞당길 수는 없다.


진나라 사료중에서 아방궁(阿房宮), 상림원(上林苑), 장안궁(長安宮)에는 모두 '주무삼백리(周袤三百里)'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의 지리적 위치는 위하이남으로 종남산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들 자체는 모두 하나이다. 서로 다른 시기의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삼위일체의 원림궁전건축군이다. 그리고 아방전전(阿房前殿), 전전아방(前殿阿房)과 조궁정전(朝宮正殿)등도 한 가지일 것이다. 전전아방, 아방전전, 혹은 조궁은 진왕이 조회에 참석하여 정무를 보던 주요장소이다. 아방궁 안에서 가장 등급이 높고, 가장 큰 주체공사이다. 당연히, 전전 혹은 조궁은 하나의 고립된 개별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 자체는 여러 대형의 정전, 후궁, 그리고 대소 배전으로 구성된 궁전건축물이다. '삼백리아방궁'의 전체 배치에서 아방전전의 핵심부분을 제외하고, 별처럼 흩어져 있는 다른 궁전건축이 있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독립된 대형 원림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전문적으로 왕친, 국친, 대신, 국가빈객들이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전전아방은 동서로 오백보, 남북으로 오십장, 위에는 만명이 앉을 수 있다. 아래에는 오장기(五丈旗)를 두고, 둘레는 각도(閣道)이다'라고 썼다. 이는 아방전전 자체의 건설규모이다. "전의 아래에서 종남산 꼭대기까지 궁궐이 있고 복도로 연결되었다" 이는 전전과 아방궁의 다른 궁전들 사이가 '복도'여 연결된 것을 말해준다. '복도'는 '장랑'이다. 복도를 따라서 오보일루, 십보일각의 배치를 했다. 강조해야할 것은 역대진왕이 만들었던 위하이남에서 남산에 이르는 '삼백리' 범위내의 모든 궁전은 예외없이 모두 아방궁건설과 분리불가능한 일부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위하남안 '삼백리'범위내는 그것이 진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궁전이라면, 어느 진왕이 만들었든지간에 모두 아방궁의 전체 판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아방궁의 건설규모와 구성에 대한 관념을 사람들이 과거에는 무시했었다.


그렇다면, "삼백리아방궁"의 범위내에,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아방전전 외에 도대체 어떤 진나라가 건조한 궁전이 있었을까? <삼보황도>의 기록을 보자: "부양궁(萯陽宮), 진문왕이 만들었다. 지금의 호현 서남 23리", <현중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장안궁 진문왕이 만들다. 면사백리, 남으로 종남산에 이르다." 그 외에 <삼진기>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패성궁 진목공이 건축하여 궁이 되었다. 그래서 패성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진회요정보>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궁, 극묘 위하남안에 있다; 의춘궁 장안현 동남에 있다; 장양궁 상림원 안에 있다; 화양궁 진태자가 거주하는 궁으로 장안성 안에 있다; 보고궁 보수궁 임동현내에 있다; 장락궁, 흥락궁 위하남쪽에 있고, 함양궁과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본다; 종궁 호현 동북25리에 있다." <삼보구사>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나라는 위수의 남쪽에 여궁(輿宮)이 있었다. 위수의 북쪽에는 함양궁이 있었다. 진소왕은 두 궁을 연결시키고 싶어해서 횡교(橫橋)를 만들었다." 


진혜문왕은 위하이남의 삼백리 범위내에 전국의 재력을 모아 육국을 깜짝 놀라게 만든 장대궁(章臺宮)을 만든다. <사기.소진열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제후막불서면이조어장대지하(諸侯莫不西面而朝於章臺之下)라는 기록이 있고; <사기.초세가>에는 "초회황 웅괴는 초청을 받아 방문하여 함양에 이르러 장대를 방문하다."는 기록이 있다. 초회왕은 진나라에 3년간 머문다. <사기.인상여열전>에는 "진왕이 장대에 앉아 상여를 만났다. 상여는 벽(璧)을 받들고 초왕에게 아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진혜문왕, 진무왕, 진소왕시기의 진나라는 행정중심이 위하이북의 함양궁이 아니라 위하이남 삼백리범위내의 장대궁이었다. 장대궁은 진나라의 정식 조궁이다. 고야왕(顧野王)은 <장안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장입연하(仙掌入煙霞), 장대경조마(章臺京兆馬)", 최호(崔顥)는 <위남소년행>에서 이렇게 썼다: 장대제성칭귀리(章臺帝城稱貴里), 청루일만가종기(靑樓日晩歌鐘起)" 모두 당시 진나라도성 장대지구의 번화한 모습을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에 '합종', '연횡'투쟁은 매우 복잡하고 첨예했다. 각국의 정국은 수시로 바뀌었다. 외부활동은 긴장되고 빈번했다. 제후가 내방하고, 국빈이 사절단으로 가고 서로 오고 가며 끊이지 않았다. 진왕의 내방을 맞이하기 위해, 위, 한등은 자국의 강역내에 진나라의 양식대로 '제궁'을 만들어 진왕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초, 위, 조, 동주등의 국군은 전후로 진나라도성 함양을 찾아간다. 예의에 따라 귀빈을 안치하기 위하여 진나라는 습속에 따라 여러 다른 나라의 양식에 맞춘 궁전을 세운다. 예를 들어, 기원전299년, 조무령왕이 진나라에 온다. 그리고 진소왕이 만든 '육영궁(六英宮)'에 머눈다. 인상여가 진나라로 들어갔을 때, "사상여광성전(舍相如廣成傳)"했다. 여기의 전은 전사(傳舍)이고 진나라때 외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관저건축이다. 위나라 사신인 수가(須賈)가 진나라로 왔을 때, 진나라에서 특별히 만든 '제국객관(諸國客館)'에 거주하게 한다. 아방전전이 부근에서 '위(衛)'자, '초(楚)'자가 많이 출토되고, '조(趙)'의 운문와당이 있는데, 이는 이국건축의 실물증거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역대 진왕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진나라도성 함양의 위하남안의 토목공사는 갈수록 호화사치스러워진다. 도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북의 거대한 궁전을 잇는 '횡교'로 일찌감치 연결되었다. 진시황이 즉위하기 전에 아방전전도 이미 대체로 완공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목의 <아방궁부>에서 어떤 궁녀는 36년이나 기다렸ㅈ만 진시황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진시황, 진이세때 아방궁안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시공이 진행되고 있었짐ㄴ, 이는 그저 새로운 공사의 증축, 확장공사, 개조공사일 뿐이다. 그것은 아방전전의 주체공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일찌감치 완성되었다는 것은 기본사실이다. <삼보고사>라는 책에는 원래 아주 구체적으로 '진나라 상림원 안에 이궁별관을 만들었는데 146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146개의 진나라 이궁별관에 아주 방대한 아방전전공사를 합치면 이것이 대체로 진나라 '삼백리아방궁'의 조감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