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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5): 아방궁연구의 새로운 시도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역사상 많은 사료에서는 모두 아방궁의 규모가 엄청나게 거대하다고 했고, '삼백리아방궁'이라는 찬사를 붙였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전건축군이라 칭한다. 이는 실제상황에 부합한다. 다만, 어떤 고고학자는 그중 과장된 성분이 너무 많다고 여긴다. 기실, 그들에게 명청의 고궁을 보라고 하면, 북경성내,외에 수백개의 궁전, 왕부, 사묘가 있다. '삼백리아방궁'이라는 말이 그다지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사기술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서의 기재에 나오는 이 규모가 거대한 '삼백리아방궁'을 만드는데 아무런 기술적 장애가 없다. 다만 반드시 갖추어야할 전제조건이라면, 첫째, 공사의 설계모형, 둘째, 충분한 시공공기, 셋째, 각종 건축재료의 공급원확보, 넷째, 충분한 재력, 인력. 다섯째, 건축설계,배치의 요구에 따라 궁성, 궁전, 원림, 및 기타시설을 단계를 나누어 차례로 시공건설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방궁의 건설을 구성하는 모든 기술요소는 객관적으로 구비되어 있다. 시공을 제대로 조직하기만 하면 아방궁의 건설은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거대한 항토대기(夯土臺基), 이는 인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있다; 정교한 난간자리 이것도 석공을 많이 모아서 정교하게 조각하게 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둥, 대들보에 쓸 거목. 사천의 심산에서 벌채하여 운반할 수 있다; 건축의 두공, 유칠, 채화, 인테리어 및 기화요초의 재배, 영롱괴석의 수집, 이것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기>등 사료에서 기록된 것이 완전하고 진실하며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바로 '시공공기'에 있다. 시공공기가 공사건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고대의 여러 궁전, 능묘등 건축프로젝트를 가지고 이 공사를 실현할 수 있는지의 기준으로 삼아서 보아야 한다. 건설프로젝트의 시공공기와 실제공사량은 정비례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알, 반드시 사마천이 <사기.진시황본기>에 기재한 '삼십오년, 시황은 함양의 사람이 너무 많고, 선왕의 궁정이 작다고 여겨서...조궁을 위하남쪽 상림원 안에 만들었다. 먼저 전전아방을 만들었다."는 사료를 믿어야겠다면, 특히 진시화35년(기원전212년)에 아방전전공사를 시작했다고 혹은 전체 '삼백리아방궁'의 건설공사를 시작했다고 본다면, 문제는 너무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약간의 두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2년이라는 유효한 공사기간으로 아방전전공사를 완성하기 어렵다. 아마도 아방전전의 항토대기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더더구나 '촉산올, 아방출'간의 상호관계는 전혀 얘기할 것도 없다. 이년 혹은 십년에 아방궁을 건설하였다는 주장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분명한 의문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뒤집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의 '이십오사'중 으뜸으로 꼽힌다. 그리고 역대이래로 정식 인정되고 숭상받는 관방 사서이다. 그래서 그것은 침중한 오지산과 같이 '이단'을 찾으려는 연구자들을 누르고 있다. 거의 숨 쉴 수조차 없게 만들어버린다. 동한의 왕충(王充)이 먼저 <사서>에 시비를 걸었다. 그것을 '허환망언(虛幻妄言)이라고 했다. 다만, <사기>는 여전히 예전처럼 전파되었다. 당대의 어떤 학자가 일찌감치 심한 말을 입에 담았다: 사마천의 공적을 부인하고, <사기>의 권위성을 뒤집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역향'연구의 길에서 다시 여하한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도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아방궁이 '천하제일궁'의 미명은 어찌 되었건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천하제일궁'은 이미 유네스가 인정하였다. 만일 정말 누군가에 의해 잘못되었다고 되면, 그것은 이제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가.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많은 사람의 체면은 엉망이 될 것이다.


현재 확실히 많은 사람이 학술계에서 여하한 '첨란(添亂)'행위가 나오는 걸 바라지 않고 있다. 설사 약간의 이의가 있더라도, 최소한 대규모로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 공개적인 학술토론회에서 만일 논쟁이 허용된다면 많은 문제들이 드러날 것이다. 다만, 체면은 체면이고,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방궁문제를 연구하는 것까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다른 학술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막아서도 안된다. 특히 인터넷정보기술이 신속히 발전하는 요즘같은 세상에 누가 감히 전통학술견해와 다르고 맞지 않는 학술견해를 금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자인 이육방 선생은 마침내 2000년의 침묵을 깨고, 여러 매체를 통하여, 아방궁의 전통견해를 부정했다.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진시황이 이년의 시간을 들여서는 아방궁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나라말기의 농민반란과정에서 항우는 아방궁을 불태운 적이 아예 없다. 이유는 아방궁 자체가 공사중단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방궁고고팀의 팀장인 이육방은 아방궁유적지에 대하여 5년간 고고발굴을 진행한 후에, 높고 큰 항토대기를 발견한 외에, 시종 와당같은 류의 진나라건축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불에탄 목탄흔적이나 잿더미, 붉은 흑, 결토괴(結土壞)등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육방은 이렇게 생각한다: 소위 아방궁공사는 2년의 시간동안 대기상의 목조구조건축은 시공건설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방궁은 기껏해야 '공사중단프로젝트'일 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진시황이 당초 아방궁을 건조했다면, 건축규모는 반드시 아주 컸을 것이다. 만일 그것을 정말 항우가 불태웠다면, 불타고난 흔적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가 발견한 여러가지 의문점에 기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다: 역사상의 아방궁은 일종의 자허오유(子虛烏有) 즉 없었던 일에 대한 전언이다. 이육방의 견해가 나오자마자, 이것은 고고학발견의 중대뉴스가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이육방이 말한, "근본적으로 시공을 진행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은 분명히 화룡점정이다. 진정으로 문제의 요해와 핵심을 잘 찔렀다. 그녀가 비교적 급이 높은 '진문화국제학술세미나'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당초 진시황이 아방궁을 건축하라고 명을 내린 시간은 기원전212년이다. 다만 기원전209년 그는 동순길에서 돌연 병사하여 공사가 중단된다. 진시황을 안장한 후, 진이세는 아방궁을 계속 건설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얼마후 진나라가 멸망한다. 그래서 설사 진시황이 건조를 명한 날로부터 계산하더라도 공사의 총 시공시간은 4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거대한 궁전건축은 짧은 몇년의 시간내에 완공한다는 것이 실로 어렵다. 진나라아방궁고고팀은 5년의 시간을 들여서 힘껏 세세하게 고고발굴을 진행했지만, 진시황이 만들었다는 전설의 아방궁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방궁과 관련한 여하한 건축유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육방은 이렇게 덧붙인다: "고고팀은 북으로 위하부터, 남으로는 한나라때 곤명지북안까지, 동으로 조하까지, 서로는 패하까지의 135평방킬로미터 범위내에서, 대량의 조사, 탐측, 발굴을 진행했다. 그중 주요한 유적지는 14곳이다. 전설상의 봉화대, 상천대, 자석문유적지등이 포함된다. 사실상, 이들 유적지는 모두 상림원 건축의 일부분이다. 진시황이 만든 아방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고팀은 사람들에게 아방전전은 또 어떤 모양이라고 말했을까? 고고팀이 전전유적지에 대하여 전면적인 고고조사를 진행한 후에 발견한 것은 소위 아방전전이 동서로 길이 1270미터, 남북으로 426미터 높이 12미터의 항토대기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항토대기는 그저 동,서,북의 삼변에 벽이 있고, 남쪽은 벽도 아예 없었다. 이 삼면벅이 포위한 광대한 구역내에 진나라때의 여하한 퇴적층도 없었다. 궁전건축의 여하한 유적도 없었다. 더더구나 불에 탄 약간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육방 선생이 진시황이 사망전후 이년의 기간내에 항토대리를 완성하는 외에 규모가 큰 아방전전을 완공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주 정확하다. 그리고 아주 설득력이 있다. 그녀가 건축시공공기라는 각도에서 출발하여, 고대궁전건설의 역사를 검토하고, 변증유물주의의 관점에서, 수천년이래의 수수께끼를 파헤친 것은 일종의 창거(創擧)이다.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긍정받아야할 일이다. 이선생이 아방궁을 부정한 것은 좋은 시작을 열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기점 위에서, 만일 이런 생각대로 다시 앞으로 전진한다면 아마도 다른 더 많은 더 큰 더 중요한 새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연구의 길은 어떤 때는 나선형의 방식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이육방 선생은 오래된 관점에 도전했고, 학술에서 백가쟁명의 대문을 열었다.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논쟁의 학술전당에 올라온다면, 분명히 아방궁연구에서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방궁연구의 새로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육방 선생이 진시황이 아방궁을 건축하지 못했다고 논증한 것은 단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에서 기록한 아방궁은 건조한 시간이 실재로 너무 짧다는 것이다. 아방궁의 거대한 규모의 공사건설에 정상적으로 필요한 시공공기와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둘째 ,아방전전의 항토대기 유적지 발굴과정에서, 여하한 불에탄 목탄, 홍소토, 전와등 문화퇴적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궁전걸설의 유류물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육방 선생이 분명히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세계는 복잡하다. 역사도 복잡하다. 만일 아방궁이 확실히 존재했다면, 그것은 바로 문제토론의 최대출발점이다. 진시황이 못만들었다고 다른 사람이 못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방궁 유적지에서 목탄, 잿더미, 홍소토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방궁이 불에 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 아방궁이 완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기실, 이육방은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뒤집은 것은 완전히 정확하다. 그리고 인정받을 만하다. 다만 목탄, 잿더미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방궁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심도있게 논증해봐야하는 문제이다. 아방전전 혹은 조궁건설공사를 얘기하자면 그것의 진실한 역사가 어떠한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안삼교(西安三橋)부근의 아방전전, 혹은 조궁 유적지는 길이가 1270미터, 너비가 426미터, 높이가 12미터인 항토대기이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양홍훈(楊鴻勛)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항토에 필요한 흙은 현지에 없는 마란토이다. 마란토는 외지에서 운반해 와야 하고, 자세하게 걸른 다음에 불로 익힌 다음에 한층 한층 쌓아야 한다. 항토태기에만도 10년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어떤 사람은 항토층의 중간에 두터운 철질 진흙층이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현상은 전전의 항토대기시공에 긴 시간의 중단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에 건축공사와 관련한 사료는 항상 간단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손쉽게 오해를 불러 일의킨다. 예를 들어,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삽십오년, 전전아방을 만들다(作前殿阿房)."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착공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준공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육방등의 주장에 따르면, 확실히 그것은 착공시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확실히 착공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의문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건조한 사료는 사람들에 의해 쉽게 뒤집어지고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재 알고 있는 자료를 보면, "삽십오년, 전전아방을 만들다"는 확실히 준공시기를 가리킨다. 착공시기가 아니다. 왜 그런가? 이는 많은 같은 유형의 궁전건축사료를 비교해서 논증해보면 알 수 있다. <사기.고조본기>에도 유방이 "팔련, 소하 승상이 미앙궁을 만들고(作未央宮), 동궐, 북궐, 전전을 세우다.....고조가 돌아와서 궁궐이 웅장한 것을 보고 크게 노한다."는 기록이 있다. 확실히 한나라8년은 미앙궁의 준공시기이다.


같은 이치로, <사기.진시황본기>중의 "이십칠년 신궁을 위수 남쪽에 만들다(作信宮渭南),...감천전전을 만들고(作甘泉前殿), 용도를 쌓다(築甬道)"는 등도 모두 정확하게 이들 궁전의 완공시기를 나타낸다. 기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은, 고대의 거의 모든 공사건설에서 공사준공시간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사준공전에, 모두 고정되고 엄격한 공사품질검수기준이 있고 그후에 모드 길일을 선택하여 융중한 낙성식을 거행하기 때문이다. 이 날자는 아주 장엄하다. 그래서 큰 일로 기록해두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공사개시시기는 어떤 때는 확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사건설은 논의시작, 부지선정, 계획설계, 방안심사, 재료준비, 부지평탄작업, 도로건설, 외부홍수물막이공사, 시공조직등 사전작업이 필요하고, 모든 개별공사의 필요한 시간도 모두 공사의 총공기에 계산되기 때문이다. 이 가장 원시적인 시기는 왕왕 관방의 정식기록에서는 빠져 있게 된다.


전체 아방궁, 혹은 아방전전공사의 착공시기는 더 앞으로 당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은 아방궁착공시간을 연구하는데 가장 관건적이고 가장 핵심되는 문제이다. 기실, 아래에 언급하는 몇 가지 권위있는 사료에 의하면, 전면적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겨진 여러가지 중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다. 다만, 과거 2천년간 사람들이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들 사료는 바로 반고의 <한서.오행지>에는 "진혜문왕이 처음에 함양을 도성으로 정하고, 광대한 궁실을 짓는다.....아방을 다시 시작하나 완공하지 못하고 죽는다(復起阿房, 未成而亡)"이라는 기록이 있고, <삼포황도>에는 "아방궁, 아성(阿城)이라고도 부른다. 헤문왕이 만들었는데, 궁을 완공하지 못하고 죽는다. 진시황이 그 궁을 넓혀, 삼백여리로 규획했고, 이궁, 별관이 산을 넘고 골짜기에 걸쳐 있으며 수레가 다니는 도로가 서로 연결되었다"고 명확히 기재하고 있다. 주걸근(朱傑勤)이 쓴 <진한미술사>라는 책에도 "아방의 초기는 진혜문왕(이름 駟)때 개시된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 곽말약(郭沫若) 선생은 <십비판서>에서 역시 "아방궁은 혜문왕이 만들었다."는 말을 했다.


중경건축공정학원이 편찬한 <중국건축사>라는 책을 보면, 명확하게 "진아방궁은 원래 진혜문왕이 만들었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기록한다. 염문유(閻文儒) 선생이 쓴 <서경승적고>라는 책에서도, "아방궁의 건설은 진혜문왕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렇게 많은 경전적인 사료들과 권위있는 논저에서 모두 진나라아방궁 혹은 아성이 건설에 착수한 시간을 원래의 진시황시대에서 앞으로 대폭 당겨서, 진혜문왕시기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역사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장하게 되면, 아방궁에서 진행된 대규모건설과 그에 불가피한 선결조건이 만족되는 것이다. 당연히, 지역이 광활한 아방궁유적지에서 진혜문왕시기 혹은 진시황이전시기에 남긴 물증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바로 아방궁 "신설'이 스스로 체계를 갖추는 증거들이 될 것이다. 이런 완전히 계통적인 자료들이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결국 모두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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