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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6): 후화원을 먼저 지을 수는 없다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진시황35녕에 아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관련된 관련 사료는 당연히 이육방선생과 그 고고팀이 아주 신뢰성있는 자료에 의하여 철저히 부정되었다. 다만, 이육방이 만일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진혜문왕때 아방궁이 건축되기 시작했다"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신뢰성있는 자료에 의하여 비판되고 부정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원래 아방전전, 혹은 조궁이 진시황35년에 완공되었느냐는 문제에 있어서, <사기>의 기록은 아마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진정 잘못한 것은 오히려 후인들이 사료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있다. 심지어 잘못 해석한 것에 있다. 반고가 쓴 <한서>에서는 정면으로 "아방궁은 진혜문왕이 짓기 시작했다"고 적어놓았다. 다만 사마천의 명망이 반고보다 높으므로, "아방궁은 진혜문왕이 짓기 시작했다"는 견해는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왔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편견이고,이로 인하여 이천여년의 역사적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만일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한 준공시간을 받아들인다면, 그것과 반고의 <한서>에서 제기한 "아방궁은 진혜문왕이 짓기 시작했다"는 것간의 모순은 바로 풀린다. 이것은 전후의 관계로 사람들이 수천년동안 고민해온 문제의 빈틈을 메워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시급한 일은 일부 사람들의 <사기>기록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시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서>에 기재된 내용을 아무 이유없이 부정하는 것을 시정하는 일이다. 아방궁이 만들어진 시간을 인정하는데 대하여 사마천과 반고 두 사람의 기록은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후인의 맹종과 편견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글을 통일적으로 아방궁건설의 시간순서로 본다면, 이천여년간 잘못 전해져 내려온 공사의 수수께끼는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말하겠다. <한서>는 착공시기이고, <하기>는 주체공정 즉 아방전전 혹은 조궁의 준공시간이다. 양자간에는 조그만치의 모순도 없다.


다만, 이육방선생이 발표한 일련의 글을 보면, 그녀가 마지막에 얻어낸 결론은 이렇지 않은 것같다. 그녀는 현재까지도 계속 견지하고 있는 것이 누구이든 아방궁을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방궁 자체는 바로 자허오유의 사실이 아닌 말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강조한다. 아방궁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진정한 실물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그러나 현재의 아방궁 전전유적지에는 일부 항토대기를 제외하고, 다른 물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고팀은 항토대기위에 경작층을 파버린 후에도 기와, 벽돌같은 류의 유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단언한다. 아방전전, 혹은 조궁은 철두철미하게, 인위적으로 날조해낸 역사의 거짓말이다. 이육방은 계속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런 신뢰할만한 물증을 찾기 전에는 사마천, 반고등이 말한 것이 옳든, 그르든, 누구든지 그녀의 견해를 부정하고 뒤집으려면, 그녀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증거만 인정하고, 망언은 듣지 않는다. 이것이 고고학자의 진면목인 듯하다.


고고학자들은 항상 말한다. 모든 것은 출토유물이 고고연구의 전제조건이자 논증근거라고. 그들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것은 고고학의 논증에서 모두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주장, 인식과 발언은 원칙상 모두 잘못이 없다. 다만 고고작업의 첫째 업무는 지하에 묻혀 있거나 혹은 기타 과거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기물을 과학적인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후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문물에 대하여 어떻게 분석하고 연구할 것인가는 고고학자의 일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하나의 유적지, 같은 하나의 문물도 서로 다른 연구자, 서로 다른 각도에서는 아마도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육방 선생에게 있어서 아방전전 고고발굴의 관련 사료를 사실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된다. 어떻게 다음 연구를 진행할 것인지는 이육방 선생 혹은 고고학자들이 스스로 말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지 일을 하거나, 학문을 할 때는 세심하고 주도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편면적이거나 극단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구든 충고를 듣지 않고 한가지에 열중하게 되면 그에게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만일 사마천이 애기한 것이 정말 준공시기이고, 반고가 말한 것이 정말 착공시기라면, 설마 이육방선생은 더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없을까?  자신이 원래 가졌던 견해에 대하여 조정하고 수정할 여지는 없을까? 만일 스스로에게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자신은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것에 대하여 각종 방식으로 검증된 고고자료를 하나하나 검토해서 사람들에게 분명히 설명했던가? 알아야 할 것은, 진정 아방궁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은 건축학자의 본분이다. 고고학자는 공사에 관한 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피상적이고 비전문적이다. 이육방 선생은 아방궁에 대한 연구에서 설마 건축학자의 의견을 들을 용기조차 없단 말인가. 만일 정말 건축학자의 아방궁에 대한 발언권을 막고 싶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일찌기 서안시 문관회(文管會)의 이가한(李家翰), 강개임(姜開任)선생등은 아방궁 '북사(北司)'유적에서 출토된 통와(筒瓦)에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괴벽자(怪僻字)를 발견한다. 그들은 성심성의껐 건축학을 배운 진경원에게 물어봤다; 나중에, 아방궁 유적지에서 5건 이상의 '왜계(歪髻), 편계(偏髻)의 남성옥인형상이 발견되자, 아방궁유적지관리소의 고고전문가도 역시 겸허하게 진경원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북사'유적지에서 출토된 괴벽자는 바로 '미(芈). 월(月)" 두 글자로 구성된 합체자이고, 옥편상의 '외계, 편계'형상은 바로 미(芈)성 초(楚)인의 독특한 머리모양이라고. 고고학자와 건축학자의 공동노력하에, 진혜문왕, 진선태후가 아방궁건설에 참여했다는 진실성과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반고가 쓴 <한서>의 아방궁건설착공에 관한 사료가 정확하고 권위있다는 것도 증명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아방궁의 고고연구에서 만일 완전히 건축학자와 벽을 쌓는다면, 그것은 학문이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진혜문왕이 즉위(기원전337년)한 때로부터 진시황35년(기원전212년)까지 이 중간에는 125년의 시간이 있다. 만일 효과적으로 이 시간을 이용하면, 대규모의 아방궁 건설을 진행하는데, 시공공기라는 각도에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어진다. 이육방 선생 자신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북의 위하에서 지작하여, 남의 진령까지 동으로는 남전현까지, 서로는 주지현에 이르는 전체 진나라 상림원(上林苑) 공사는 이미 고고발굴로 사실이 증명되었다." 모든 이런 것들은 진혜문왕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육방 선생은 관련자료에서 더욱 명확히 지적했다: 아방전전유적지 서쪽에서 발견된 대형의 정교한 진나라 상림원 건축 유적지는 바로 당시 아방궁의 후화원이다. 그리고 이 후화원의 점유면적은 실제로 '전체 상해보다도 훨씬 더 크다'" 여기서 하나의 엄중한 문제가 나온다.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주체건축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먼저 후화원부터 지은 사례가 있었단 말인가?


이육방 선생은 한편으로 이미 완공되고 상해시전체면적보다도 큰 아방궁 후화원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아방궁의 주요한 조궁정전은 존재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짓는다. 설마 이렇게 상식에 어긋나는 판단과 이해를 하는 것이 최소한의 논리관념 적합한가? 스스로 분명히 이것은 아방궁의 후화원이라고 하면서, 아방궁의 정전은 건축조차 된 적이 없다고 하다니. 그렇다면 먼저 후화원부터 짓는데 무슨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만일 아방궁의 주체건물이 근본적으로 부존재한다면, 이선생이 이끄는 고고팀은 무슨 자격으로 그것을 아방궁고고팀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여하한 대공사도 모두 주체공정과 보조공정의 구분이 있다. 시공시에는 항상 순서를 지킨다. 고대궁전건설은 "전조(前朝), 후침(後寢), 후화원(後花園)"의 주차(主次)구조와 시공조직을 택한다. 언제 이것을 거꾸로 한 적이 있던가. 거꾸로 한다면, 제왕들이 나무 아래서 자고, 호숫가에서 정무를 보고, 동굴 안에서 조회를 연단 말인가?이육방선생은 조궁정전은 아예 건설도 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을 그저 농담이라고 여기지 말라. 만일 아방궁의 주체건축이 확실히 아직 건설되지 않았는데, 후화원의 안에서는 아주 요란스럽고 시끄러운 정경이 펼쳐진다면, 이게 어디 정상적인 대국의 조정인가. 분명히 서커스단같지 않은가. 국가츼 최고수준의 고고학계의 권위자인 이육방 선생은 후화원은 있고 조궁정전은 없는 기이한 현상에 대하여 그것이 정리에 들어맞는지, 근거가 있는지 생각해 봤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 만일 아방궁의 후화원이 완공되엇다면, 그 주체궁전 즉 규모가 거대한 아방전전 및 그와 관련된 부속건축공사는 먼저 시공완공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분명히 후화원보다 먼저 완공되었고, 정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제왕의 궁전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전체공사가 진혜문왕, 진선태후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하여 왔다면 그것을 전부 완공할 조건은 충분히 갖추어 졌다.


"피지부존(皮之不存), 모장언부(毛將焉附)?" 피부가 없다면 털이 어디에 붙을 것인가? 아방궁이 존재하지 않으면 후화원은 어디에 붙을 것인가? 이치대로 말하자면, 주,차는 뒤집어질 수 없다. 이육방이 아방궁의 후화원을 인정하면, 당연히 아방전전이 아방궁주체공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후화원이 제대로 건설되었다고 인정하면, 반드시 아방전전도 제대로 건설되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고고팀의 탐측, 조사과정에서 만일 기와와 벽돌, 홍소토등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논증해야 맞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방전전유적지에 '진나라기와, 진나라벽돌이 없고, 홍소토흔적'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기 대문이다. 만일 당시에 확실히 아방전전의 시공건설이 완성되었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나라말기에 확실히 불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육방 선생도 목탄, 잿더미, 홍소토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종 가능성은 모두 존재한다. 모두 진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 후에 최종적으로 취사를 결정해야 한다.


아래에 기술하는 중점은 바로 진혜문왕, 그리고 후대의 진왕은 계속하여 아방궁의 건설을 진행하였다는 상세한 과정이다. 먼저, 진혜문왕이 아방궁을 지은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가? <삼보황도>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아방궁은 아성이라고도 부른다. 혜문왕이 만들었다." 송민구(宋敏求)는 <장안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진아방은 일명 아성이다. 장안현 서쪽 20리에 있다. 서,북,동 삼면에 담장이 있고, 남쪽은 담장이 없다. 주위는 5리, 140보이고, 숭팔척(崇八尺), 상활사척오촌(上闊四尺五寸), 하활일장오척(下闊一丈五尺), 지금은 모두 민전(民田)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람들이 아방전전 소재지의 위치로 인정된 곳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진혜문왕이 다른 장소에 아성을 지은 것이 아니다. 아성이 바로 아방궁이다. 즉 아성은 아방전전이다. 이것은 충분히 설명한다. 아방전전 공사는 진시황 35년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진혜문왕때 시작했고, 아방궁의 가장 중요한 주체건축은 일찌감치 건설에 착수했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런 의견을 견지한다. 소위 '아성'은 그저 아방전전의 주위를 둘러싼 높은 항토성벽일 뿐이라고. 전전 자체의 공사건설은 아니라고. 이 견해는 기실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종 사료를 보면 명확히 말한다. "아방궁을 아성이라고도 부른다" 아방궁와 아성은 불가분이다. 만일 아방궁내에 전전 혹은 조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성내에 전전 혹은 조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성 자체가 성벽을 포함하고, 성내의 여러 궁전건축을 포함하는 것이다. 만일 아성이 그저 주위의 성벽이라면 '아성은 아방궁이라고도 부른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전전의 주위에 먼저 높은 성벽을 쌓았다면, 모든 전전으로 통하는 시공통로는 막혀버리게 된다. 나중에 수천만입방미터의 마란토는 어떻게 운반해와서 대기에 다져넣는단 말인가. 원래 높이가 12미터를 초과하는 항토대기가 이미 높이 거기에 서 있는데, 다시 주위를 성벽으로 쌓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화사첨족이 아니겠는가?


진혜문왕때부터 아성이 건축되고, 다시 상림원이 건축된다. 이어서 진무왕, 진소왕, 진효문왕, 진장양왕, 진시황등 6명의 국군이 힘을 다 해서 진나라수도 함양의 위수 남쪽에 '삼백리아방궁'의 범위내에, 오보일루, 십보일각, 궁대누각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목의 <아방궁부>에서 말한, "육왕필(六王畢), 사해일(四海一), 아방출(阿房出), 촉산올(蜀山兀)"의 본래면모가 아닌가? 과거에 사람들은 모두 '육왕'에 대하여, 전국후기 진나라에 평정된 제, 초, 연, 조, 한, 위의 6명의 제후왕을 가르키다고 보았다. 기실 이 6명의 이국제후왕은 아방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진나라차체의 6명의 제후왕이 100여년의 계속된 건설로 '삼백리아방궁'을 만든 것이다. '삼백리아방궁'의 점유면적이 비록 크기는 하지만, 사전에 시공에 필요 기둥, 대들보등 거목을 해결하고, 충분한 공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대형궁전건축과 부속공사는 모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무수한 사실이 증명한다. "삼백리아방궁'은 두목이 두찬하고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고대 여하한 대규모 궁전건축군과 마찬가지로 역대진왕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완공되고 사용되었다. <아방궁부>에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만립원시(縵立遠視), 이망행야(而望幸也), 유부득견자(有不得見者), 삼십육년(三十六年)" 그 뜻은, 상백리 아방궁의 범위내에 여러 후궁비빈이 있어서 삽십육년이나 기다렸지만 진시황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자기술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삼백리아방궁의 대부분 궁전건축은 일찌감치 진시황 즉위전에, 그의 선조들이 완공시켰다는 것을. 여러 후궁비빈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아방궁이 일찌감치 완공되었다면, 왜 <사기>등 사료에 신이세가 "복작아방(復作阿房)" 다시 아방궁을 건설하다라고 하고 이사는 "청컨데 아방궁을 짓는 것을 중지하십시오"라고 했을까?


아방궁이 점유하는 면적은 실로 너무 넓다. 아방궁의 궁전수량도 실로 너무 많다. 위하 남쪽에는 아주 번성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교할 때 위하이북의 함양구궁은 날로 쇠퇴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칠국고>와 <진회요정보>에는 모두 진혜문왕, 진소왕 시기에 많은 늑대무리가 함양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위하이북의 구함양성, 함양궁일대는 아주 황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고대의 궁전건축은 거의 매년 번개를 맞아 불에 타버리는 현상이 있었다. 관중은 특히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여기에 "천하에 귀한 자는 욕망을 극한으로 채우기 위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한다. 그래서 아방궁의 범위내에서 계속 여러가지 유형의 궁전을 건축, 확장, 개수, 신축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도시나 기업도 매년 발전하고 반복적으로 동일한 명치으이 공사정보가 나타나기도 한다. 상해의 한 대기업은 30년전에 준공되어 생산되고 있는 공장을 지금까지도 매년 개조하고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