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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9): 아방궁이 보존된 주요원인은 무엇일까?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아방궁 문제를 연구하면서 실제가치가 있는 성과를 얻어내려면, 반고의 <한서>를 돌아가서 기타 사료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안된다. 왜냐하면 <한서>에 명확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방궁은 아성이라고도 부르고, 진혜문왕이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육방이 만일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아방궁에 대하여 부정한 것은 일종의 편견,허구의 기초 위에서 세운 견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고가 사마천만큼 권위와 명망이 없다고 하여, 처음부터 <사기>를 중시하고, <한서>를 경시하는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만일 사마천이 지하에서 이를 안다면, 아마도 일어나서 상황을 설명했을 것이다: 나의 <사기>에서 말한 것은 그저 아방전전의 속건(續建)공사 및 증보(增補)공사를 가리킨 것이거나 혹은 아예 준공시기를 가리킨 것이라고. 누구든 <사기>의 원뜻을 곡해한다면, 그가 오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혜문왕때부터 아성, 아방전전을 건초하기 시작하고, 상림원을 건조했다. 상림원이 아방궁에 속한다는 견해는 완전히 근거가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곤혹해 하는 것은 이미 아방궁을 도대체 진시황이 건조했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같다. 왜냐하면 겨우 2년의 시간을 들여서 진시황이 아방전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욱 규모가 큰 '삼백리아방궁'을 짓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이육방 선생을 포함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같다. 진혜문왕때부터 아성을 짓기 시작하고, 아방궁을 건조한 것과 관려난 사료에 대하여 이육방 선생이 보지 못했고 접촉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한번도 부정하는 의견이나 생각을 표시한 적은 없다. 만일 이육방 선생이 여전히 '아방궁은 아예 지어지지 않았다'는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녀는 먼저 '진혜문왕이 아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실질적 문제를 부정해야 한다. 다시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먼저 <한서>에 기재된 정확성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기 견해의 정확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진나라가 멸망했는데, 아방전전등 일부 궁전은 왜 화를 면하고, 심지어 한나라때에도 남아 있었을까? 왕조가 교체된 후, 전왕조의 궁전과 일부 백성을 괴롭힌 공사는 불지러버리거나 철거해 버렸다. 그것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만일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혹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왕조의 건축공사는 유익하고 유용하고 무해한 것이라면 후인들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보호했다. 예를 들어, 역대에서 만든 만리장성은 아무도 그것을 없애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한고조 유방이 칭제한 초기에도 유사하게 일부분 진나라궁전을 사용한 사례가 아주 많다. 진나라때의 상림원은 한무제 시기에도 계속하여 개조, 확대되어 명실상부한 한나라 상림원이 된다. 저명한 도강언, 영거등 백성에게 이로운 공사는 모두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오고 있지 않은가. 남경의 총통부, 미령궁도 모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 복잡성, 다영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무수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삼백리아방궁"은 확실히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의 점유면적은 아주 넓었다. 계획과 배치는 아주 엄정했고, 건축은 아주 웅장했다. 공간구조도 크고 높았다. 내부의 설비는 아주 화려했다. 그리하여 역대중국제왕의 궁전건축 가운데 이정표적이고 무한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계건축사상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1994년, 유네스코의 여러 관리들은 상세하고 면밀한 현지조사를 거친 후에 진나라아방군건축유적지의 보존이 완전한 정도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세계의 저명한 고대건축물가운데 최고라고 인정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세계건축기적과 저명건축유적지의 범위에 들어간다. 이 세계최고권위기구는 이천년이전에 이미 0완공된 아방궁이 '천하제일궁전'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붙이는데 이런 명예는 실로 얻기 힘든 것이다.


아방궁문제의 최신논쟁을 거쳐 아방궁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이슈를 더욱 많이 마련해 주었다. 일부분 역사학자, 고고학자는 일부 표면적인 현상만을 가지고 여러가지 '추측, 상상'을 하여 아방궁의 광휘를 잃게 만들었다. 그렇게 곡해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진정으로 진실한 아방궁건축사를 쓰려면, 큰 사료의 장애에 부닥친다. 많은 건축학자는 본래 건축학의 전문적 의견을 발표하려고 하였다. 다만 역사계 고고학계가 독패하는 아방궁 학솔논단에서 그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는 없었다. 그외에 객관적인 발전방향으로 보면, 황금으로도 건축사는 살 수가 없다. 건축학자의 대다수는 경제건설의 대조류에 휩쓸려들어가지 않았다. 고대아방군건축에 존재하는 기술적 난제를 와서 물어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기실 아방궁의 건축사는 반드시 새로 연구하고 새로 써야 한다. 이는 건축학자의 미룰 수 없는 역사적 중임이다. 다른 전문가들이 해줄 것으로 기대해서도 안된다.


여하한 거축과 건축공사는 지금까지 일종의 추상적이고 고독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강렬한 사회성과 시대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건축과 건축공사는 그 자신의 특수한 발전법칙이 있다. 각각의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서로 다른 건축사상과 건축제도가 있었다. 일찌기 춘추시기, 저명한 정치가 겸 사상가인 관중(管仲)은 "서민들이 곤궁한데, 궁궐은 사치스럽다"는 토목의 기풍을 비판했다. 그는 <관자.칠신칠주>에서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남긴다: "대사상망자(臺榭相望者), 망국지무(亡國之廡)"라는 유명한 논단이다. 또 다른 사상가이자 공정학자인 묵자는 <묵자.사과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당금의 군주가 그 궁궐을 만드려면 반드시 백성에게서 재물을 거두어야 하고, 백성들이 먹고 입는 재물을 빼앗아야 한다....그래서 나라가 가난해지고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워진다." <묵자.절용편>에서도 그는 다시 호소한다: "비용을 많이 부과하고 백성들에게 이익을 더해주지 않은 자는 성왕이 아니다."


그리고, 전국시대의 대정치가이자 대사상가인 한비자는 <한비자.팔간>에서 이렇게 크게 소리친다: "군주가 아름다운 궁전과 연못을 좋아하면...이것은 군주의 재앙이다. 신하가 백성의 힘을 다하여, 아름다운 궁궐과 연못을 만들어 그 주인을 즐기게 하여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그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재앙을 기르는 것이다." 한비자는 또한 <한비자.망징>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국가의 군주가 궁전건설에 열중하는 것은 망국의 징조라고. <한서.동방삭전>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의 대신 동방삭은 한무제에게 이런 글을 올린다: 은나라는 구시궁을 만들어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초령왕은 장화궁을 만들다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젼국시대의 순자는 완비된 치국방략을 가지고 있었다. <순자.왕제>에는 분명히 적어놓았다: 왕자(王者), 의복유제(衣服有制), 궁실유도(宮室有度), 인도유수(人徒有數), 상제기용(喪祭械用), 개유등의(皆有等宜)" 그 뜻은 무슨 일이든 절제하고 한도를 지키고,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의 사활을 도외시하고, 건물을 짓고 대형공사를 벌인다면, 어느 왕조이든 민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 건설사업에 열중하여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정치와 경제는 통제를 잃고, 붕괴로 가는 징조가 된다. 진시황때의 정치경제는 고속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사회안정조건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그 중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궁실유도' 이것이다. 한비자와 이사(李斯)는 일찌기 모두 순자의 뛰어난 제자였다. 이사의 건축사상은 <사기.이사열전>에 구체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범고성왕(凡古聖王), 음식유절(飮食有節), 거기유수(車器有數), 궁실유도(宮室有度), 출령조사(出令造事), 가비이무익어민리자(加費而無益於民利者), 금(禁), 고능장구치안(故能長久治安)"


이사의 이런 정치사상을 진시황이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진시황은 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후, 비록 국방건설, 경제발전, 문화건설에 이로운 많은 일을 했고, 출발점은 모두 좋았다. 다만, 공사프로젝트가 실로 너무 많았다. 규모도 너무 컸고, 공기는 너무 짧았다. 그리하여 전국의 배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북쪽 험산준령에서, 중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는 남방의 견고한 암석을 뚫고 남북을 관통하는 영거수도공사를 벌인다. 그는 다시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향하는 교통선을 건설한다. 이는 산을 넘고 언덕을 건너며 강을 넘는 치도(馳道)와 직도(直道) 공사이다. 그는 칠십만 장인을 징용하여, 아방궁공사를 하도록 했다. 전국의 인구가 이천만명인데, 거의 모두 건축공사부지로 끌려간 것이다. 장태염(章太炎) 선생이 <진정기>에서 이렇게 탄식한 것도 이해가 된다: "진황미점(秦皇微點), 독재기아방(獨在起阿房)" 이를 보면, 아방궁은 진나라가 망하는 전체 과정에서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북송의 개혁가 소순흠(蘇舜欽)은 사람됨이 기개있고 충정이 있으며, 정무를 열심히 보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는 개인의 안위를 따지지 않고 상소를 올려 페해를 통박했다. 그의 목적은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과 발전이다. 그는 21살때 황상에게 <걸납간서> <논서사장> <지궤서> <걸용유석자제> <상범공참정서병자목칠사>등 여러 편을 올린다. 특히 그의 <화소>에서는 황제가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에 반대한다. 황제는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린 2610개의 누관으로 구성된 옥황궁을 재건하려고 했었다. 2610개의 누관으로 구성된 궁궐이라면 아방궁의 복제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