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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7): 아방궁이 불질러졌다는 사료는 어디에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성조 주체는 영락4년(1406년)에 새로운 부지를 정해 북경고궁을 건설하도록 조서를 반포한다. 영락18년(1420년)에 공사는 완공되었다고 선언한다. 왜 이렇게 규모가 큰 궁전을 짧은 14년의 기간내에 완공할 수 있었을가? 원래 이것은 그저 궁전 자체에 대한 시공건설이다.대량의 사전작업 재료준비작업은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로, 원나라 지정28년(1368년)에 원순제가 북으로 도망간 후, 원나라때의 경성인 원대도는 일찌감치 비어 있었다. 명군의 대장 서달(徐達)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나라의 궁전은 모조리 철거된다. 주체가 북경에서 황제로 즉위한 후 이들 목재등 재료는 명태조의 남경고궁을 본떠 새로운 궁전건축군을 짓는데 사용된다. 아쉽게도 1424년 명성조는 사망한다. 그가 생전에 이미 사람을 사천, 광동, 광서등지로 보내 귀한 목재를 준비해놓았기 때문에 그의 장릉 융은전의 나무기둥은 상등이 금사남목으로 쓸 수 있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항우가 진나라말기의 사회변혁기에 정치적인 극단적 복수심으로 아방궁에 불을 질러 철저히 파괴시켰다고. 지금 이육방 선생은 아방전전 유적지에서, 궁전이 불에 탈 때 당연히 남아야할 여하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우지 않았다는 새로운 설을 주장했다. 당연히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관심을 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육방 선생이 이 각도에서 논증하며 이런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 논리도 괜찮고, 증거도 믿을만하고, 결론도 신뢰할만하다. 왜먀하면, 불에 탄 흔적이 전혀 없는 상황하에서, 이것이 항우의 짓이라고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믿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정사에서 확실히 하우가 아방궁을 불질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사기. 항우본기>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항우가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함양을 도살하고, 항복한 왕 자영을 죽이고, 진나라 궁실을 불태운다(燒秦宮室), 불은 석달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주 모호한 기록만 남겼다.


<사기>에는 "항우가 진나라궁전을 불태우고, 석달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고 적어서 많은 사람들은 아방궁이 역사상 최대의 궁궐이고,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아방궁을 불태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히려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다. 이런 사고, 연상, 추론은 비록 사료의 근거는 없지만, 이런 역사의식과 관념이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이로부터 일종의 항거불능한 강대한 위력이 나오는 것이 확실히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이육방 선생이 '불에 탄 흔적이 없다."는 확실한 근거를 제기하기 전에는 이런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결론은 실제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이육방 선생이 확실하게 결론을 내려주어서, 더 이상 새로 생가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이미 2000여년간 전해져 내려온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것은 하룻밤만에 가볍게 부인되어 버렸다.


설마 아방궁의 역사진상을 정말 이육방이 제대로 파헤쳤을까? 일지기 50여년전에, 서안건축공정학원 건축과에 입학하고, 그훼 6년간 건축학을 전공한 사람이, 점차 알게 된 건축역사, 건축설계, 건축구조, 건축시공, 건축재료, 건축제도(製圖), 도시계획등이 전면적이로 계통적인 지식으로 즉시 서안교외의 이 아방궁유적지를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진시황이 아방궁을 건설했고, 진나라말기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주장은 확실히 많은 허구와 부실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새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974년이전에 그는 <여아집.아방변>이라는 글에서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삼백리아방궁'은 진혜문왕때부터 6대의 진나라국군의 노력을 거쳐 완공된 것이고, 진나라말기에 항우에게 불태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확실한 사료를 보면, 수나라말기, 당나라초기까지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다.


왜 아방궁은 항우에게 불태워지지 않았다고 말했는가? 원인은 항우의 반란은 그 자신의 목표가 있었다. 그가 함양에 쳐들어간 첫째 목적은 ㅣㄴ시황과 같은 절대적인 통치대권을 얻기 위함이고, 진나라 창고의 기진이보와 진나라후궁의 절세가인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사기.항우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진시황이 회계를 유람할 때, 항량과 항적(항우)이 같이 본다. 항적이 말한다: "그의 자리를 내가 취해서 대신 앉겠다." 그 뜻은 진시황이 동순으로 회계에 도착했을 때, 제왕의 지고무상의 절대위엄이 있었고, 곁에서 이를 보던 항우이 가슴을 뛰게 한다. 그는 하늘에 맹세한다. 언젠가 나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십만 정예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들어가 진삼세 자영을 죽인 후, 확실히 위북의 함양궁 및 북팥지구의 궁전을 불질렀다. 그리고 위하이남의 아방궁 범위내의 대부분 궁전도 불태운다. 일찌기 그의 가족은 대부분 진시황의 폭정으로 죽었다. 그는 진나라도성 함양에 들어간 후 자신의 복수를 한 것이다.


다만, 그는 진시황의 아방전전을 불태워없앨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보좌에 오르는 것이 그의 정치적 최고목표였기 때문이다. 그가 예전에 회계에서 뜻을 세운 진시황의 자리를 '취대(取代)'하겠다는 주요목표이다. 만일 진시황이 이 호화궁전이 아닌 곳에서 자신의 등극대전을 거행하는 것은 이미 얻은 최고통치권을 체현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이 화려하고 고귀하고 신성한 궁전에서 유방등 수십명의 제후왕을 임명하지 않으면 '서초패왕'의 '패기'를 충분히 드러낼 수가 없다. 패기만만한 항우는 등극시 호화로운 궁전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일부 진나라궁전을 남겨두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외에 제후왕에 책봉된 수십명의 인문들 예를 들어 유방등이 함양에서 활동하는 기간에 거주하도록 하기 위하여, 수십개의 진나라궁전건축은 남겨두어야 했다. 항우는 '의제(義帝)'를 세우는데, 의제도 살 곳이 필요했다. 명나라말기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고궁안에서 즉위하지 않았던가. 그의 대장은 모두 왕부로 가서 살지 않았던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진왕조의 집권주의봉건통치를 무너뜨린 것은 하늘과 땅이 놀라고, 귀신이 울고갈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만일 항우가 정말 전체 함양을 잿더미로 만들고,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진나라 신하와 백성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면 그의 40만대군은 누구에게 군대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과 야채를 공급받을 것인가? 만일, 아방전전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혹은 이미 모조리 불타고 사라졌다면, 그의 함양에서의 활동 특히 중대한 즉위, 봉후등 개국대전은 자신이 임시로 만들어 놓은 천막 안에서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아방궁이 최초에 진혜문왕,선태후가 건설하가 시작했고, 선태후는 초나라사람이며 성이 미(芈)이다. 항우 본인도 초나라사람이고, 성이 미(芈)이다. 원래 선태후는 항우의 조상이다. 그의 조상이 만든 궁전을 일거에 불사라버린다면 그것은 최대의 불충불효가 아니겠는가?


진나라도성 함양은 위하를 경계로 하여 남과 북 두 부분으로 나뉜다. 위하남안의 '삼백리아방궁'범위내의 진나라궁전은 도대체 항우에게 불태워졌을까? 도대체 일부분의 궁전이라도 남겨두었을까?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겠다. 진나라말에 확실히 많은 궁전들은 불에 타 없어진다. 확실히 많은 진나라궁전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서한회요> 제65권의 관련자료를 보자: '한장락궁(漢長樂宮)'은 원래 진나라의 흥락궁(興樂宮)이다, <삼보구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유방이) 장안으로 천도하고 먼저 진나라 옛궁전을 수리하여 거기에 거주한다. 한임광궁(漢林光宮)은 원래 진나라 이궁(離宮)이고, 한나라 부양궁은 진혜문왕이 만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방전전도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위서.고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십일년 사월 무인, 미앙궁, 아방궁을 가다." 그 뜻은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497년 진나라 아방궁, 한나라 미앙궁에 대한 앙모의 정을 품고 특별히 낙양에서 천리먼길을 '순행'하여 미앙궁과 아방궁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방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만일 당시의 아방궁이 이육방이 말한 것처럼 거저 황부지에 불과한 항토대기라면, 아니면 심지어 아예 완공되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효문제는 그저 흙무더가만 보려고 왔단 말인가? 그런 흙무더기를 보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시황릉의 흙무더기가 그것보다는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런데 왜 거기는 보러 가지 않았을까? 만일 정말 규모가 거대한 아방궁이 있다면, 그가 와서 시찰하는 것도 완전히 가치있는 일이다. 그가 본 후에 장인을 보내서 실측하고 건축모형을 만들고, 전축재료를 준비한 후에, 아방궁의 모양을 본떠서 자신의 도성에 건설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현지시찰로 건축경험을 배우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고, 북위 효문제도 잘 알고 있다. <위서.장소유전>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평성에서 태묘, 태극전을 만들려고 했다. 장소유를 보내어 낙양에서 위,진의 기지를 정확치 측량하게 했고, 장소유는 태극전을 위하여 모범을 세웠다(立模范), 동이, 왕우등과 건설에 참여했으나 모두 완공하지 못하고 죽었다." 고대의 공사설계에서 '입모범'은 바로 궁전설계를 위하여 제작하는 입체모형을 말한다.


북위시기의 효문제는 평성에 거대한 태극전을 건축하려 했다. 중국고대에는 진정한 시공도면이 없었기 때문에, 저명한 장인 장소유등을 파견해서 낙양으로 가서 위진시대에 남아있는 궁전의 척촌(尺寸)을 측량하도록 한다. 그리고 입체건축모형을 만들게 한 후에 다시 그것을 가지고 경성으로 가서 그 모양대로 건축한다. 아주 교묘한 것은 후기에 존재하는 아방궁에서도 일찌기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진서.유요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조(前趙)의 황제 유요(劉曜)는 '장안으로 천도하고, 고팽등 오십인을 아방에서 주살한다...아방을 본떠 서궁을 짓고, 경루를 모방하여 능소를 짓는다." 그 뜻은 이러하다. 황제 유요는 당시에 대담한 계획과 구상을 한다. 그거은 바로 아방궁의 건축모양을 본떠서 새로운 부지를 선정한 후 다시 자신의 서궁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아방궁이 그저 간단한 항토대기라면 만일 항토대기의 위에 거대한 토목건축물이 없다면, 어떻게 후대의 황제가 그것을 본떠서 건물을 짓는단 말인가?


더욱 놀랍기 그지없는 일은 아방궁이 수백년후에도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있다. <십육국춘추>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견건원이십년, 모용충이 아성을 점거했다." <진서.효무제기>에도 "구년 십이월(384년) 모용충이 아방에서 황제를 참칭하며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연(西燕)의 모용충은 아방궁에서 황제로 즉위했다는 것이다. 이건 또 어떤 모습일까? <진서,부견재기<>에는 모두 6곳에 아방궁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그중 한 곳을 보면 이러하다: "모용충이 아방에서 존호를 참칭하고, 연호를 갱시로 바꾸었다. 부견은 모용충과 전투를 벌이는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부견은 부경은 항상 모용충의 군대를 전(殿)에 포위해서..." 또 다른 구절은 이렇다: "부견이 성의 서쪽에서 모용충을 격패시키고, 아성까지 추격한다. 여러 장수들은 승기를 틈타 성안으로 들어가나 부견은 모용충에게 생포될 것을 겁내어, 쇠을 쳐서(擊金) 군대를 멈추었다." 이를 보면, 아성의 안에는 진나라때 만든 궁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군사방어능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적군이 함부로 궁성으로 돌진해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모용충이 아방궁에서 즉위한 것은 이때의 아방궁이 여전히 완전한 궁전건축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방궁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구당서.고조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을해, 태종에게 명하여 아성에 병력을 주둔하게 했다." 섬서성박물관이 편찬한 <서안역사술략>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아방궁성은  수나라말기 당나라초기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민전(民田)이 되었다." <임동현지>에는 <시황능영>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렇게 적고 있다: "신고여산산하사(辛苦驪山山下士), 아방재폐우화청(阿房才廢又華淸)" 그 뜻은 당나라의 화청궁은 진나라아방궁이 마지막으로 버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대량의 기와 벽돌은 사람들이 회수하고 철거한 목재도 다른 용도로 썼다. 역사적으로, 옛궁전을 철거해서, 신궁전을 짓고, 옛집을 철거해서 새집을 짓는 일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물진기용(物盡其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건축학자들이 보는 아방전전 그리고 '규획삼백리'의 상림원은 진혜문왕과 진선태후가 건축하기 시작했고, 5대국군의 계속된 건설, 확장을 거쳐 형성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세계제일궁'이라고 불릴 만하다. 두목의 <아방궁부>에서 묘사한 규모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방궁 유적지는 최소한 수나라말기, 당나라초기까지는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두목이 살았던 시기와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두목이 친히 현장으로 가서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의 전전은 진나라말기의 전란중에 그것이 지닌 특수한 공능용도로 인하여 불태워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파괴되지도 않았다. 북위 효문제, 전조 유요, 서연 모용충, 당초 이세민이 이곳을 왔었다는 것을 보면, 아방전전은 확실히 이미 완공되었다. 진시황이 2년만이 아방전전을 완공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아방전전에서 잿더미, 홍소토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방궁이 일찌기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고대의 유적지가 큰 불에 타버렸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고찰과 논증이 필요하다. 만일 큰 불로 타버렸다면 유적지 자체는 지하에 깊이 매장되어 앴거나, 혹은 땅이 늪지에 있는 경우에는 천년의 기간동안 지층이 퇴적되어 변한다. 일단 유적지가 후인들에게 드러난 후에는 당연히 불에 탄 후에 남긴 목탄, 잿더미와 홍소토등을 찾아볼 수 있다. 진용1호갱안에도 대량의 목탄, 잿더미와 홍소토가 있는데, 그것이 좋은 예이다. 만일 큰 불에 타버렸고 유적지 자체가 땅도 높은 곳이나 언덕 위라면 여러 불에탄 목탄, 잿더미, 홍소토가 장기간의 비바람을 맞아서 쉽게 높은 곳에서 유실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수 있다. 다시 천년간의 각종 변화를 겪는다면 원래의 유적지 위에는 아마 무슨 목탄, 잿더미와 홍소토같은 유류물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방전전이 설사 당시에 불에 탔다고 하더라도, 지세가 실제로 너무 높고, 설사 뭔가가 남겨졌다고 하더라도 일찌감치 모조리 없어졌을 것이다.


그외에 또 하나의 상황은 아방전전이 설사 당시에 불에 탔고, 만일 많은 목탄, 잿더미, 홍소토같은 것을 낰겼다고 하더라도, 2년여년동안 유적지에서 농민들이 생활하면서 실용가치가 있는 목탄은 일찌감치 모조리 농민들이 가져갔을 것이다; 사용가치가 없는 홍소토는 논밭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일찌감치 경작토에 섞여버렸을 것이다. 목조구조부분이 불에 탄 후에 나오는 잿더미는 더욱 장기간 남는다. 백거이는 <우의시>에서 이렇게 ㅁ라한 바 있다. "일조위회신(一朝爲灰燼), 가엽무혈유(柯葉無孑遺)" 궁전이 불에 탄 후에 여러해가 다시 지나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방전전은 위치가 특수하므로 자연유실과 인위요소의 작용하에, 예전에 불에 탄 흔적은 어찌되었건 21세기까지 보존되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많은 확실한 사료에서 말하기를 이 전전을 대표로 하는 아방궁건축군은 후세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