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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아방궁의 역사진상

아방궁의 역사진상(3): 궁전건축과 왕조교체

by 중은우시 2018. 2. 23.

글: 진경원(陳景元)


먼저 강조할 것은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기 전에 사천은 일찌감치 진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화양국지.파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현왕(周顯王)때, 초나라가 쇠약해지고, 진혜문왕이 파촉(巴蜀)과 사이가 좋아졌다. 주신왕(周愼王) 5년, 촉왕(蜀王)은 저후(苴侯)를 토벌하고, 파(巴)는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진혜문왕은 장의(張儀), 사마착(司馬錯)을 보내어 저후를 구해준다. 장의는 파, 저의 부유함에 욕심을 낸다. 그리하여 파(巴)를 취하고 왕을 잡아 돌아온다." 이를 보면 사천의 땅은 일찌감치 진혜문왕의 세력범위였고, 진소왕23년에 정식으로 촉군(蜀郡)을 설치하고, 이빙(李氷)을 촉군태수로 임명하여 강하를 치리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게 한다. 이는 진나라가 일찌감치 파촉의 땅에 있는 삼림자원을 점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천으로 들어가서 벌목을 하기에 필요한 요건을 갖춘 것이다. 진혜문왕, 진소왕 시기에 진나라와 초나라의 양국관계는 역사상 가장 좋았다. 초왕은 여러번 진나라로 가서 진나라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고, 초나라왕의 딸도 삼대에 걸처 진나라 국군에게 시집간다. 진선태후(秦宣太后)가 진나라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 궁전건설의 필요로, 자신의 고국의 수로를 빌려서, 강을 따라 목재를 남하시키는 편의를 얻어내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거목을 함양으로 운송하면 즉시 사용할 수 있다고. 왜냐하면, 밀림의 깊은 곳에서 베어낸 목재는 강물에 계속 떠내려갔고, 도중에 비바람과 눈과 서리의 침습을 받는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원목" "생목(生木)"이다. <묵자.경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장인은 고목(槁木)만 알지, 생목(生木)은 알지 못한다." 소위 고목은 고목(枯木)으로 물기가 없이 말라버린 나무로 목재로 쓰기는 힘이 든다. 소위 생목은 원래 대량의 목질생명성분을 보유하고 있으나 수분함량이 기준치를 넘어서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활성목재이다. 목재에는 대량의 유기물질이 함유되어 있고, 각종 세균이 번식하고 생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있다. 만일 생목을 벌채한 후에 균을 없애고 죽이는 조치를 취하고, 건조처리를 거쳐, 목재의 수분함유량이 18%의 기준이하로 내려가게 만들지 않는다면, 균류가 계속 생존할 수 있어 목질이 점차 부식된다. 건축공사 및 일상용품으로 생목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그외에 목재는 각각의 방향에서 팽창율과 수축율이 모두 다르다. 특히 용량이 큰 목재일수록 건조전후의 수축과 변형정도가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여하한 건축공사의 시고에도 특히 목재구조건축의 시공에서는 반드시 함수율이 높은 목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건축목재가 높은 수분함유량을 지니고 있다면, 목재자체의 강도를 낮출 뿐아니라, 나중에 사용하는 과정에서 목재수분이 점차 빠지고 증발하면서 무늬방향으로, 각종 균열이 생기거나 목재에 비틀림이 발생하게 되어 목재구조물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목재의 이런 사용특성과 변화의 추세는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 실제사용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법칙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간에 만일 생목을 사용하여 가구를 만들거나 창문을 만들거나 궁전을 만든다면 문제가 반드시 생기게 된다.


북경의 천안문성루는 광장 추축선상의 주체건물이다. 또한 현재 국가의 각종 행사활동의 중심지이다. 이것은 1651년에 짓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농피가 33.7미터였다. 1970년에 중수할 때 약간 높여서 34.7미터가 되었다. 그때는 일을 하면서 결심이 중요했고, 경축행사에 바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진도를 앞당기기 위하여 서둘러 아직 건조표준에 도달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한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공사는 완공되고, 칠도 끝났으며, 채색화도 다 그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비틀림과 변형현상이 나타난다. 이제 어쩔 것인가? 1984년에 할 수 없이 성루를 돌려막아서 가리고 비밀작업방식으로 전부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이번에 성루에 사용한 기둥은 직경이 1.2미터, 길이가 12미터, 무게가 7톤이었다. 원래 해남도와 시쌍반나의 원시삼림에 있던 품질이 좋은 원목으로 구했다. 다만 이것은 모두 처리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목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일시에 목재건조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봉과 북보르네오에서 수입한 목재를 써서 시급한 불을 껐다.


기실, "생목"의 이런 특수한 성능과 건축에서 가지는 각양각색의 파괴적인 작용은 일찌감치 2000여년전에 세상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한비자. 외저설>에 보면 이렇게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우경(虞慶)이라는 사람이 생목으로 집을 짓겠다고 우겼다. 장인이 말하기를 쉽게 변형되는 생목으로 집을 짓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심각하게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경은 듣지 않고 집을 지었다. 결국 집이 무너졌다. <회남자.인간훈>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여씨춘추.별류>에는 고양응이 집을 짓는데 생목으로 지으려 했다. 장인이 말하기를 안된다. 나무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것으로 집을 지으면 반드시 틀어질 것이다. 생목으로 집을 지으면 지금은 비록 보기 좋지만, 나중에 반드시 망가진다."는 기록이 있다. 여불위는 진시황의 재상이다. 그가 이년가량의 시간을 들여 벌목하고 생목으로 진나라황궁을 건설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천신만고끝에 경성으로 옮겨온 목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목재의 균류를 완전히 배출하고, 목재의 수분함유량을 허용기준치내로 낮추려면 어덯게 해야 하는가? 첫째, 수침풍건법(水浸風乾法). 먼저 원목의 껍질을 벗기고, 수질이 깨끗한 강이나 맑은 물을 넣은 못에 넣는다. 그리하여 수목에 함유된 가용물질(可溶物質), 그리고 일부 수지(樹脂), 유질(油質)이 스며나오고(渗出) 용해되도록 한다. 이와 동시에 수목의 각종 균류가 전부 빠져나오게 한다. 그 후에 다시 나무의 직경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쌓아둔다. 그리고 수년간 바람으로 건조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해서 목재를 사용조건에 맞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자연건조법. 먼저 묵재의 표면의 껍질과 오물을 씻어낸다. 목재종류, 규격, 습기정도에 띠라 각각 넓고 건조한 곳으로 옮겨서 쌓아둔다. 목재는 3년 내지 5년동안 햇빛을 받고, 바람을 맞으면 천천히 자연건조된다. 명나라 천계5년(1625년), 통혜하의 공부랑 육담원(陸澹園)은 천진의 갈대밭에서 이 곳에서 건조처리하기 위해 버려둔 남목(楠木) 1000개를 발견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목재는 심각하게 모자란 상태여서 궁전건설공사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명나라 만력32년(1604년), 불에 탄 북경고궁의 삼대전은 목재가 없어서, 재건공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육담원이 천진에서 1000개의 남목을 찾자, 삼대전은 비로소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외에 청나라때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궁의 영무전은 최근들어 검수시에 비로소 발견했는데, 지붕의 많은 목재들이 일찌감치 썩어있었다. 심지어 맨손으로 잡아도 썩은 나무조각이 떨어져 나올 정도였다. 이는 동치연간에 이 건물을 만들 때 공사책임자가 규정에 어긋나게 제재로 말리지 않은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실제로 잘 말린 좋은 목재를 구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비교적 작은 목재를 연결시키고 외부를 포장, 분식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큰 기둥같이 보이게 하기도 한다. 기실 이것은 부득이한 대체품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일하다가 황제에게 발견되기라도 하면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시대는 계속하여 바뀐다. 왕조도 계속하여 바뀐다. 궁전건축도 계속하여 바뀐다. 은상시기의 국도(國都)는 처음에 하남 상구(商丘)에 두었다가 나중에 하남 안양(安陽)으로 옮긴다. 주문왕이 즉위한 후에 풍하서안에 풍도(豊都)를 건설한다; 주무왕이 황위를 넘겨받은 후에 풍하동안에 호도(鎬都)를 건설한다. 300년후에 주평왕은 낙양으로 국도를 이전한다. 경성의 궁전건축은 다시 새로 지어야 했다. 진양공이 제후로 봉해지고 정식으로 나라를 세워 진이 된다. 그는 패하부근에 패성궁(覇城宮)을 세운다. 진효공은 함양을 수도로 정하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국역사상 어느 왕조이건 대규모로 궁전을 건축하는데 열중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역대의 어느 군왕이건 토목공사를 대거 일으키려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거의 모든 왕조교체는 항상 새로운 궁전이 옛 궁전을 대체하는 일을 수반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고대의 많은 중대한 사회, 정치, 경제의 변혁과정은 모두 궁전건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진정한 건축과 건축기술의 발전사도 포함된다.


역사상 중국의 전통적인 군권사상에서 나온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정종(正宗)관념이 매번 왕조교체의 시기를 맞이하면, 전왕조에서 건축한 궁전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거나, 그것이 완공되었건 말건, 뒤의 왕조가 같은 곳을 수도로 정하건 말건 일반적으로 모두 철거했다. 목적은 바로 이를 통해 전왕조의 '왕기(王氣)'를 억누르고 잘라버리는 것이다. 진왕조가 멸망한 후, 항우는 불을 질러서 함양 위하이북의 궁전건축물을 불태워버린다. 서한말기의 왕망도 황위를 찬탈한 후, 명을 내러 한왕조의 건장(建章), 승광(承光), 포양(包陽), 대대(大臺), 저원(儲元)의 궁을 모로지 철거한다; 무측천은 냑양에서 대주(大周)황제로 등극하면서, 즉시 수나라때의 건양전(乾陽殿)을 철거한다; 당나라말기, 금벽휘황의 대명궁도 큰 불로 소실된다; 북송이 멸망한 후, 변경의 궁전도 금나라사람들에 의해 철거된다; 몽골군이 금나라수도로 쳐들어갔을 때, 금나라의 도성도 원나라사람들에 의하여 불에 타버린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북경의 궁전은 다시 명성조 주체에 의하여 모두 철거된다; 청나라사람들이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오다)하여 북경을 점령한다. 바로 불타버린 궁전기초위에 북경고궁을 중건했다.


중국역사상, 매번 왕조교체시기가 되면 대다수의 승리자는 왜 전왕조의 궁궐을 불태우거나 철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이것은 심각한 원인이 있다: 첫째, 다수의 통치자들은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 기고만장하여 백성들을 끌어오아서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금벽휘황의 궁전을 짓게 한다. 이를 통해 나중에 사서에 빛나는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자신의 이름을 천년만년 기록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둘째, 궁전건축 자체는 지고무상의 황권, 왕기의 상징이다. 강렬한 정치성과 시대성이 있다. 신왕조가 탄생하면, 반드시 '신도환구부(新桃換舊符)'한다. 새로운 궁전을 짓는 것은 새 황제가 즉위한 후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셋째, 전후 두 왕조의 군왕은 자주 서로 다른 민족에 속한다. 서로 다른 종교신앙을 가지고, 서로 다른 예의습속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닌 각종 궁전건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왕조의 치국이념, 건축제도에 맞추어 새롭게 자신의 새로운 수도와 새로운 궁궐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의 보편성과 필연성이 담겨 있다.  


다만 바로 이어서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가 새로 등극한 황제의 앞에 펼쳐진다. 전왕조의 궁전을 불태워버렸거나 정왕조의 궁전을 철거해버리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본왕조의 궁전을 건설하려면 그것은 아주 힘든 일이 된다. 특히 전왕조의 궁전이 모조리 불타버리거나 철거되면, 새로 건설한 왕조의 지도자들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 새로운 궁전이 단기간내에 완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군왕의 등극은 항항 융중하고 장엄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조하(朝賀)도 받고, 청정(聽政)도 하고, 조령도 반포해야 한다. 많은 후궁과 비빈들도 살 곳이 필요하다. 그래서 반드시 일부분 전왕조의 궁전은 남겨놓는다. 신왕조의 궁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과도기에 쓰인다. 청왕조는 북경을 수도로 정한 후에, 명나라고궁이 불에 탄다. 황제는 할 수 없이 태화문(太和門)에서 청정(聽政)하고, 사연(賜宴)을 열고, 대사면령을 반포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강희제 이전의 청나라황제는 모두 이곳에서 조정업무를 처리했다. 태화전이 준공된 후에 그것은 정문이 된다.


청나라의 건륭황제는 향년 89세로 재위기간이 60년에 달하다. 중국역사상 집정기간이 가장 길고, 가장 장수한 황제이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했다. 그는 최고의 제왕존엄을 누렸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얻었으며 항상 최고의 것 최대의 것을 얻었다. 다만 한가지는 시종 그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전왕조 명성조 주체의 장릉(長陵) 능은전(祾恩殿)이다. 그것은 특등의 금사남목(金絲楠木)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마음 속에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그래서 기획을 한 후에 명십삼릉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장릉등 옛날의 대전을 철거하고 바꿔치기하는 방식으로 이 금사남목을 얻으려 한다. 대신들의 반대와 간언으로 건륭제는 장릉의 옛 건물을 철거하려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래도 여전히 명세종의 영릉을 철거하도록 명령하여 얻은 남목으로 자기의 유릉(裕陵)을 건설한다. 청나라는 순치부터 강희, 옹정, 건륭등이 모두 명나라건축을 철거했다. 그리고 그때의 상등목재를 가지고 자신의 궁전과 능묘를 짓는다.


만일 역대왕조의 제왕이 충분한 목재를 준비하고 있다면, 새로운 궁전(능묘의 궁전 포함)은 언제든지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ㅇㄹ 자신에게 충분한 목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전왕조의 궁전을 허물면 된다. 그렇게 하여 새 궁전의 목재로 쓰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진나라의 초기 도성은 자주 이곳저곳으로 이전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옛날 진나라궁전은 점차 도태되고 철거된다. 대럄의 목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기실, 진나라는 일찌기 진혜문왕때부터 사천에서 벌채를 했다. 모아놓은 목재가 갈수록 많아져서 나중에 여러 진나라궁전을 만드는데 좋은 물질적 기초가 된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대량의 남은 목재는 한나라에 넘어간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 승상 소하가 단기간내에 한나라궁전을 지을 수 있었던 비밀이다. 역사상 모든 궁전건축은 사료기재에 짧은 몇년의 기간내에 완공했다고 하면, 실제로 모두 이런 견실하고 믿을만한 공사기술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히해야할 일이 있다.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진나라는 매번 제후를 격파할 때마다, 그 궁궐을 베껴그려서(寫放其宮室), 함양의 북판(北阪) 위에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가지고 진시황이 사람을 시켜 육국의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그 후에 함양에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것은 후인들의 오해이다. 진나라때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다. 진시황이 주절을 볼 때는 모두 죽간(竹簡), 목간(木簡)에 쓰인 것이다. 당시의 지도는 나무나 돌에 새긴 것이다. 죽간이나 목간, 혹은 나무나 돌에 궁전건축시공용의 도면을 그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사촉형지재개지(寫蜀荊之材皆至)"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사(寫)"가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아.헉고>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寫), 제(除)이다." 즉 철거한다는 말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는 한무제 유철이 재위할 때였다. 피휘를 위하여(황제의 이름과 같은 것, 발음이 같은 것은 다른 글자를 쓰는 것), '사(寫)'로 '탁(拆)'자를 대체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설명이 된다. 진나라도 옛날 궁전을 철거하여 새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진시황은 학실히 육국의 궁전의 목재를 철거해서 썼다. 함양의 북판지역에 진나라의 궁전을 세운다. 왕망이 황위를 찬탈한 후에 건장, 승광, 포양, 대대, 저원궁의 목재를 사용하여 그의 신조구묘(新朝九廟)를 짓는다. 무측천은 칭제한 후에 수나라 건양전을 철거한 거목으로 대규모의 명당(明堂)을 짓는다; 북송이 멸망한 후, 휘종,흠종 두 임금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다. 변경궁전의 대들보로 쓰이던 큰 나무, 아름다운 창문, 어원인 간악의 태호석등 건축재료는 모조리 금나라 중도로 가져가서 다시 쓰인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북경의 원대도 궁전은 모조리 명성조 주체에 의하여 철거된 후 모든 목재가 명나라의 북경고궁을 건설하는데 쓰인다.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한 후, 명나라 남경고궁을 철거한 건축재료로 자신의 웅장한 천조궁전을 세운다. 왜 많은 봉건제왕들이 짧은 시간내에 거대한 궁전을 만들 수 있었는가. 바로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 목재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공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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