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휘(林輝)
강청은 중국공산당의 전최고지도자 모택동의 네번째 부인이다. 모주석이 일으킨 문혁때 중요한 지도자중 한 사람이다. 1976년 모주석이 사망한 후, 화국봉(華國鋒), 섭검영(葉劍廉)등은 정변을 일으켜, "사인방"을 체포한다. 강청은 "사인방"의 우두머리로 지목된다.
1981년, 중국최고인민법원은 특별법정을 성립하여 "사인방"에 대한 공개재판을 진행한다. 그들을 모두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문혁의 죄책을 그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상응한 형벌을 부과한다. 강청은 사완(死緩, 사형집행유예)의 형에 처해졌다가,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1991년 5월 14일 강청은 자살하니 향년 77세이다.
중국최고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강청은 불복했다. 강청은 일찌기 공소인의 기소장에 대하여 법정에서 스스로 변호한 바 있다. 그때 공소장을 "시비를 뒤집고, 흑백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찬개(纂改)했으며, 사실을 은닉하고 날조했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그녀의 성명은 몇 번이나 중지당했지만, 그녀가 제기한 내용에서 우리는 약간의 진상을 알아낼 수 있다. 중국이 이 재판에서 확실히 "역사를 왜곡하고 찬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인방"이 문혁의 주요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강청은 성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문혁이 1966년 발동된 이후 모주석이 사망할 때까지, "무슨 자신의 강령이 없었다." 그녀가 한 모든 일은 모두 모주석의 지시와 정책을 집행하는 일이었다. 강청은 이렇게 질문한다: "너희는 구대(九大)와 십대(十大)를 인정하느냐 아니냐. 만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대한 역사적 배경을 벗어난 것이고,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은닉한 것이다..."
강청의 불복은 확실히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 문혁은 모주석이 발동한 것이고, 강청이 한 모든 행위는 모주석의 지시를 받든 것이다.
"사인방"이라는 단어가 나타난 것도 더더욱 문혁이후이다. 그리고 모주석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1974년 7월 17일, 모주석은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강청)은 상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주의해야 한다. 사인소종파(四人小宗派)를 형성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12월하순, 모주석은 왕홍문(王洪文)에게 말한다: "너희는 사인방을 만들지 말라!"
모주석이 정의한 "사인방"에서 강청은 일찌기 악명이 높은 중앙문혁영도소조 부조장이고, 중공9대이후 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된다; 장춘교(張春橋)는 문혁시기 상해공사의 영수이고, 중앙문혁영도소조 부조장이며, 나중에 정치국상임위원, 국무원 부총리등으로 선임된다; 왕홍문은 문혁시기 상해최대의 공인조반파의 조직두목이다. 십대때 국가부주석 정치국상임위원이 된다. 모주석이 기른 후계자이다; 요문원(姚文元)은 그 저명한 글로 문혁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나중에 정치국위원에 선임된다. 이 네명은 완전히 모주석이 발탁하고 비호했다. 그들의 모주석에 대한 충성심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확실히 "사인방"은 중공십대(1973년)이후에 형성된다. 그들은 문혁의 발동에 주요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비록 그들이 문혁에 의지하여 정치무대의 윗자리로 기어올라갔고, 적지 않은 나쁜 짓을 하기는 했지만. 강청이 재판과정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그저 모주석의 한 마리 개에 불과하다. 모주석이 누구를 물라고 하면 그를 무는 것이다. 그녀가 유소기 부부를 박해한 것은 모주석의 윤허없이 근본적으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중국의 공식입장도 이렇게 인정한다: "사인방"은 문화대혁명 후기에 모택동이 그의 정치사상을 관철하는데 주요한 조수(助手)였다. 조수라면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이다. 바로 모주석의 지시하에, "사인방"은 1974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을 전개한다. 동시에 "사인방"은 모주석의 묵인하에 운동의 방향을 병이 위중하여 입원해있던 주은래(周恩來)에게 향한다.
1975년, 역시 모주석의 지시하에, "사인방"은 사회불평등과 정치권력의 토론을 전개하고, 여러 경제발전총체전략, 교육방침, 국외기술도입, 노간부복직문제등에 간여한다. "사인방"은 자산계급권리를 대거 비판하고 이에 대하여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독재를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모주석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주은래, 등소평은 "사인방"을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중국공산당은 문혁의 죄책을 "사인방"에게 떠넘겼다. 그것은 원인과 목적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수한 중국인을 해쳤고, 중국애 재난을 가져다 준 문혁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이다. 다만 만일 책임을 모주석에게 지운다면, 중국공산당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은 고의로 모주석의 죄책을 벗겨준 것이다.
기소장에서 임표와 강청을 함께 "임표강청반혁명집단"으로 적었다. 이에 대하여 강청은 이렇게 반박한다. "너희 기소장에는 임표라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을 나의 소위 집단의 구성원으로 넣었는데, 어찌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넣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임표와 너죽고 나살기 식의 투쟁을 벌였다. 내가 이 매국노와 투쟁할 때, 너희는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강청이 말한대로 문혁때 임표와 사인방은 한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협력관계였던 적이 없다. 반대로 양자간에는 충돌이 많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임표는 강청이 있던 중앙문혁영도소조를 상당히 배척했고, 여러번 황영승(黃永勝)으로 하여금 강청이 군대에 손을 뻗으려는 기도를 좌절시키게 했다. 그리고 강청은 임표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문혁의 발발은 근본적으로 임표와 관련이 없다. 유소기를 타도하고 임표를 발탁한 사람은 바로 모주석 본인이다. 문혁의 발동문제와 문혁에 대하여 임표는 한편으로 공개적으로 모주석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친히 군위팔조(軍委八條)를 서명하여 내려보내 군대는 문혁에 '불개입'해야 하며, "일완수단평(一碗水端平, 한 그릇에 담겨진 물쳐럼 편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태도이다.
1969년, 임표는 모주석의 후계자가 된 후, 모주석과 대미관계에서와 어떻게 중공의 권력기구를 재건할 것인가의 문제 예를 들어 국가주석의 직위를 둘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불일치가 일어난다. 의심이 많은 모주석은 임표가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래서 임표가 자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특히 그 후에 모주석이 일으킨 "비진정풍(批陳整風)"운동(진백달)에서 임표는 모주석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회의에 출석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저항태도를 보인다. 이는 모주석으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임표를 끌어내리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주은래는 다시 한번 모주석의 방조자역할을 한다. 임표일가가 죽어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만든다.
1971년 9월 13일, 임표가 탄 비행기가 몽골에서 격추된다. 그후 모주석은 새로운 숙청을 시작한다. 임표를 지지했던 20여명의 고위장군은 홍콩으로 도망가던 도중에 체포된다. 21명의 정치국위원중 11명이 직위를 박탈당한다. 임표는 모주석을 살해하려 했고, 군사독재로 '극좌'를 건립하려했다는 등의 죄목을 뒤집어쓴다.
그래서, 중공은 임표와 사인방을 함께 엮어서 말했다.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공산당의 죄악을 덮는 것이다.
강청은 변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기소장에는 일련의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짜맞췄다. 예를 들어 그녀가 등소평이 한간(漢奸)이라고 했다는 것인데, "한간이라는 죄명은 사실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나는 그가 한간이라고 말한 자료가 없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없다. 나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바로 이것이 유언비어이다." "나와 등소평간에는 투쟁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부인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어떻게 인정하느냐?"
등소평은 한간이라는 말에 대하여, 중국공산당사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매체에서 소련자료를 통해 이 주장이 그냥 아무런 근거없이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등소평의 딸 등용(鄧榕)은 이렇게 회고한다. 등소평이 자녀들 앞에서 그 자신의 부친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다고. 등소평은 고의로 회피한 것일까?
자료를 보면, 등소평의 부친인 등문명(鄧文明)은 20세기초 광안(廣安)의 풍운인물이다. 일찌기 4명의 처를 두었다. 등소평의 생모는 그의 두번째 처이다. 등문명은 일찌기 광안현 단련국장(團練局長)을 지냈다. 나중에 가로회(哥老會) 협흥향분회(協興鄕分會)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번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을 진압하고, 많은 공비(共匪)를 죽인다. 1936년의 어느 날, 부처에게 절하고 귀가하던 도중에 토비 혹은 원수에게 맞아죽는다. 등소평은 나중에 회고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동년의 생활은 모두 자유롭고 풍부한 귀공자생활이었다고. 등소평의 부친은 광안현 경위총판(警衛總辦)을 맡았었다고.
외부의 분석에 따르면, 친아버지가 고향에서 맞아죽었고, 그리고 등소평의 부친을 때려죽인 사람이 아마도 공산당원일텐데, 자신은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고향에 만일 돌아간다면 등소평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소장에서는 죄책을 '사인방'에게 물었는데, 강청은 거꾸로 등소평등 고위관료들에게 돌린다: "당중앙이 나에게 일정한 영도권을 수여한 후, 나는 시종 이 권력의 범위내에서 나의 일을 진행했다. 이런데 어찌 나에게 불법을 행했다고 하는가. 이렇게 말하겠다. 너희는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든 당중앙을 도대체 어디로 보내는가.너희는 도대체 구대와 십대에서 통과된 정치보고서와 당중앙의 일련의 중요문건과 모택동 주은래의 강화와 지시를 인정하는 것인가 아닌가?"
"내가 한 이 모든 것은 등소평, 화국봉, 현재 너희 재판대위에 앉아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찌기 이구동성으로 옹호했고, 참가했던 것이다. 너희는 어찌 너희들의 그때의 행위를 변명할 것인가?"
"너희가 말하는 소위 8기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을 모함했다는 일에 대하여, 이는 유사이래의 기담괴론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대혁명때, 군중은 각급기관과 부서의 지도자들에게 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했고, 여러가지 역사상의 추행에 대하여 고발했다. 나는 중앙문혁영도소조의 제1부조장으로서, 강노(康老)에게 문제있는 사람의 명단을 주었는데, 이것이 모함의 증거가 되느냐. 설마, 혁명군중이 고발한 그런 문제가 모두 나 강모가 만들어낸 것이란 말인가? 설마 여산(廬山)회의에서 팽덕회등에 대하여 고발한 자료도 나 강모가 기획한 것이란 말인가? 분명히 당중앙이 그들에게 판결한 사건이다. 나는 자료를 보고 살마들에게 말했을 뿐이다. 그게 나 강모의 모함인가. 그렇게 하면 역사와 후인들이 받아들이겠는가?"
"너희가 말하는대로라면, 문화대혁명 10년이래, 수억인민군중이 참가한 이 운동에서, 고발된 모든 주자파, 반도, 특무 및 우귀사신등등은 모조리 가짜사건,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이라는 것이며, 나 강모가 기획한 것이라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게 어찌 너희의 능력과 재능을 말살하는게 아니란 말인가. 나 강모가 정말 그런 큰 재주를 가졌다면 내가 어찌 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는가?"
"유소기의 반도자료는 그 자신이 세번 감옥에서 쓴 것이다. 설마 내가 날조했단 말인가? 그가 어떻게 출옥하고, 심지어 연안정풍때, 너희 현재의 중앙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의심을 품고 고발했지 않느냐..."
강청이 말한 대로 비록 그가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모주석을 따르던 중앙의 고위관료들 예를 들어, 주은래, 등소평, 화국봉 등등도 조주위학(助紂爲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강청이 문혁때 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그녀의 변론이 스스로 변명하는 부분도 안에 들어 있지만, 그녀가 토로한 사실은 무시할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공산당이 임표와 사인방을 묶어서 처리한 목적은 단지 하나이다. 바로 역사를 왜곡하고, 중국공산당의 죄악을 덮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모주헉의 가면이 벗겨지는 그날이 중공이 무너지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강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청(江靑)이 남긴 20자의 유언 (0) | 2022.01.11 |
---|---|
강청의 출생연도는? (0) | 2014.06.23 |
당납(唐納): 강청(江靑) 전남편 신분의 수수께끼. (0) | 2014.04.04 |
강청(江靑)의 자살원인 (0) | 2013.11.10 |
강청의 입당문제고증 (0) | 2013.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