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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강청의 입당문제고증

by 중은우시 2013. 10. 1.

글: 섭영렬(葉永烈)

 

여러가지 원인으로, 강청이라는 인물은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필자는 <강청전>을 쓸 때 수시로 진위판별업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청이 입당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강청의 입당경위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모택동의 위사장인 이은교(李銀橋)는 그가 쓴 책인 <모택동신변에서의 십오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강청은 연안정풍때 그에게 두 마디 말을 한 바 있다: "그때, 왕씨가 나를 소개해서 입당했다. 이름은 잊어버렸다. 현재 그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모른다." "나는 분명히 32년에 입당했는데, 억지로 내가 35년에 입당했다고 말한다."

 

강청이 도대체 1932년에 입당했는가, 아니면 1935년에입당했는가? 거기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에 대하여 상세히 자료를 조사한 바 있다. 기실, 강청은 1932년에 입당한 것도 아니고, 1935년에 입당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1933년 2월에 입당했다. 이것은 중공중앙의 1977년 강청에 관한 사건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입당소개인은 "왕씨"가 아니다. 그녀는 절대로 그녀의 입당소개인의 이름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읻당소개인은 바로 그녀의 전남편인 황경(黃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청도에서 입당했고, 당시 황경은 중공 청도시위 선전부부장이었다.

 

그 "왕씨"는 왕림(王林)이라는 사람이다. 원명은 왕도(王韜)이다. 그는 원래 청도대학 중공지하당지부서기였다. 황경이 청도해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후, 왕림가 같은 방에 살게 된다. 황경은 왕림의 영향을 받아 중공에 입당했다. 그래서, 왕림은 황경의 입당소개인이고, 황경은 강청이 입당소개인이 되었다.

 

강청이 입당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1933년 7월, 황경은 반도의 배신으로 체포된다. 강청은 상해로 갔다. 급히 떠나느라고, 그녀는 조직관계를 가져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해에 도착한 후, 중공과 조직관계가 없었다.

 

강청이 상해로 간 후, 신경공학단(晨更工學團) 서명청(徐明淸, 당시의 이름은 徐一氷)의 영도하에 일을 했다. 서명청은 이 공학단의 당지부서기였다. 필자는 서명청 노인을 인터뷰한 바 있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강청이 상해로 온 후, 그녀와 함께 작은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강청의 업무능력이 괜찮아, 강청을 공청단에 가입시켰다. 그녀가 소개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강청은 상핼 온 후 공청단원이 된다.

 

가장 우여곡절이 있는 점은, 강청이 상해에서 다시 입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입당소개인은 송개농(宋介農)이다. 강청은 1976년 10월 체포된 후, 중공특별사건팀이 그녀의 당적문제를 수사할 때, 그녀는 송개농이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중앙특별사건팀이 수사했으나 송개농이라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여러 곡절을 거쳐 송개농이 일찌감치 이름을 손달생(孫達生)으로 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도 고생을 해서 겨우 손달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의 본명은 송병전(宋秉全)이고, 상해로 온 후 농업을 전공해서 송개농으로 개명했었다. 나중에 그는 지하공작을 했고, 손오공처럼 계속하여 신분과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별명이 '손대성(孫大聖)'이었다. 그는 '손대성'이라는 이름과 발음이 같은 '손달생'이라는 이름을  그 이후에 계속하여 쓰게 된다.

 

손달생은 이렇게 말한다. 강청은 공청단에 가입한 후, 그와 서명청에게 그녀가 청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으며 조직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때 손달생은 상해좌익교련당위 겸 당단조직위원이었다. 조직에서 연구한 후, 강청에 청도에서 중공에 가입한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상해에서 새로 입당수속을 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손달생이 나서서, 강청과 두번 얘기를 한다.

 

손달생은 기억한다. 1934년 9월, 상해좌익교련당위는 이미 강청의 입당에 동의했다. 그가 조직에서 이 결정을 강청에게 말하려고 준비할 때, 강청이 상해 조풍공원에서 체포되어 버린다. 강청은 옥에서 1개월여 갇혀 있는다. 상해기독교여청연회가 나서서 보석된다.

 

나중에, 강청은 1937년 8월 하순 연안으로 간다. 강청은 그곳에 가자 당적회복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중공중앙조직부는 강청의 당적문제를 조사한다. 심사를 책임진 사람은 곽잠(郭潛, 지금은 郭華倫으로 이름을 고쳤고 필명은 陳然이다)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황경은 그때 산서 오대현에 있었다. 서명청이 연안으로 왔고, 황경은 그가 청도에서 강청이 입당을 소개했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서명청은 상해에서 강청이 공청단에 입당한 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2개월의 조사를 거쳐, 강청이 당적은 회복된다. 중공중앙당교 제12반에 들어가 학습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