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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강청의 출생연도는?

by 중은우시 2014. 6. 23.

글: 복녕객(福寧客)

 

강청의 연령에 관하여 현재 최소한 3가지 판본이 있다. 첫째는 강청 본인이 1944년 연안에서 표를 작성할 때 써넣은 것으로 1914년이고; 둘째는 미국의 저명한 기자 스노우의 <서행만기>에 쓰여 있는 1912년이며; 근 6백만의 클릭수를 자랑하는 바이두백과에서는 강청이 1915년에 출생했다고 적혀 있다.

 

바이두 백과에는 강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강청은 1915년 산동 제성(諸城)에서 태어났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일찌기 상해에서 체포되어 당조직을 이탈한 바 있다. 항전 발발후, 강청은 연안으로 가서, 나중에 모택동과 결혼한다. 문화대혁명이 개시된 후, 그녀는 중앙문혁소조 제1부조장, 해방군문혁소조 고문을 맡는다. 적극적으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함하고 타도하는 것을 기획했으며,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과 '사인방'을 결성하여, 당과 국가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 1976년 10월 중앙정치국의 조사를 받는다. 1977년 7월, 강청은 영구출당을 당한다. 1981년 사형, 2년집행유예에 처해진다. 나중에 법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1991년 5월 14일 북경에서 병보석으로 있던 강청은 거주지에서 자살한다.

 

강청은 일찌기 미국작가 비트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1914년 한 가난한 수공업가정에서 태어났다. 3월생이다. 어느 날에 태어났는지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기밀이다. 사람들이 생일축하활동을 할까봐 우려된다."

 

그녀는 1944년 연안에서 입당신청서의 표에 기재할 때, 출생연월은 "1914년 3월"이라고 적었다. 1950년 간부이력표에 기재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적었다.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의 판결문에도 "피고인 강청, 여, 현재나이 67세, 산동제성현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시 1914년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기자 스노우는 <서행만기(1968년 증보판)에서 "1912년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스노우의 저작은 비교적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찌기 코민테른의 연락원이던 프라디미로프는 연안에서 강청과 접촉을 많이 가졌다. 그는 나중에 <연안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1942년 12월 3일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강청은 아주 우호적이다...그녀가 나에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그녀는 1913년 제성(산동)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기는 당시의 원시기록이다. 그러므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강청은 어느 해에 태어났는가? 필자는 1930년대에 강청과 긴밀하게 접촉한 바 있는 정군리의 부인 황신을 인터뷰했다. 황신의 회고에 따르면, 강청(당시에는 남평이라 불림), 강청의 전남편 당납, 그녀 및 강청의 친구인 하기언(夏其言)은 모두 호랑이띠라고 한다. 즉 모두 1914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필자는 하기문을 방문하여 물어보았는데, 그도 그들 4명이 모두 호랑이띠로 기억했다.

 

필자는 또한 1935년 8월 28일에서 9월 1일까지의 상해 <민보>에 기자 이성(李成)이 쓴 연재글 <남평방문기>를 찾아보았다. 그 안에는 나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남소저 올해 방령이..."

"백살이예요" 그녀는 크게 웃기 시작한다. 이어서 다시 나에게 반문했다: "당신이 보기에는...?"

"...."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에게 모르겠다고 답했다.

"말해주겠습니다. 늙었습니다. 이미 스물둘입니다. 아..." 장탄식을 한 다음에, "정말입니다. 여자가 스물다섯이 넘으면, 다 끝난 거지요. 금방 늙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강청이 람한 "스물두살"은 허세(虛歲)이다. 만21살로 계산하면, 바로 1914년생이다.

 

필자는 당시는 강청이 막 상해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이고 그녀가 말한 호랑이띠라든지, 기자의 물음에 답한 것은 비교적 진실하고 믿을만하다고 본다. 이것은 그녀가 나중에 연안에서 입당신청서에 기재한 내용과도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