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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당납(唐納): 강청(江靑) 전남편 신분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4. 4.

 

 

 

2012년 8월 23일, 이 날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이미 24주년이 되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의 몰락과 더불어 나라를 떠난지 여러해 되고, 거의 이름없이 지내던 당납이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이 마음대로 얘기하고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가볍게 여기다'

 

1970년대말로부터 현재까지, 신문에는 당납이라는 글자가 여러번 나타났다. 개괄해보면, 이들 글에서 당납과 같이 일을 했던 몇몇 옛날 신문계인사의 회고가 진실한 자료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포풍착영(捕風捉影)이나 말을 옮긴 것에 불과하고, 적잖은 부분은 만들어낸 것도 있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항단에 '다큐멘터리수법'으로 썼다는 <당납부침록(唐納浮沉錄)>도 있다. 그의 주요한 인생역정을 거의 사랑에 빠져서 부침하는 역사로 적었다. 스토리나 인물관계의 대부분이 허구이다.

 

와전되고 덧붙여지다보니 당납의 이미지는 전혀 원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표면적인 진실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 듯하다. 당납은 생전에 이에 대하여 늘상 당하는 일로 여겼다. 비록 원망과 분노는 있었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내의 모 간행물에서 당납의 1930년대 혼사에 관한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를 본 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20여년전에 이런 류의 글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다지 놀라거나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도 많이 보니 익숙해 졌다고나 할까. 말도 되는 얘기면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마음대로 베껴서 옮기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라.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겠다...이런 돈을 노리고 머리를 굴리거나, 오로지 이익만 추구하는 '작가'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그들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강청의 '전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당납의 부인 진윤경(陳潤瓊)이 편선(編選)한 <마계량(당납)문집>(화동사범대학출판사 1993년판)에는 이렇게 당납의 평생을 약술하여 소개하고 있다: "본명은 마계종(馬繼宗), 1914년 5월 7일 소주에서 출생, 부친 마배보(馬培甫)는 진포철로국의 양무 통역원이었다. 모친은 비문영(費文英)이다. 2살대 큰아버지 마함손(馬含蓀)의 양자로 간다. 어려서부터 시문을 좋아했다. 어릴 때 소주사립수덕초급중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후 성립소주중학에 들어간다. 1930년부터, 그는 거옥(巨鈺), 구각(瞿覺)등의 필명으로 <오현일보>에 일부 산문, 단시를 발표한다. "9.18"사변후인 1931년 11월, 그는 오현공청단위와 소주진보청년이 발기설립한 "사회과학자연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항일구국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진보청년 사증도(佘增濤, 史枚)), 항지적(項志逖, 胡繩), 오대곤(吳大琨), 원수박(袁水拍)등과 교류했고, 자주 국사를 의논하고, 구국의 길을 탐색했다. 1932년 3월, 중공오현현위와 공청단 조직이 파괴되면서, 마계종은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되어 상해로 도망치고, 이름을 마계량(馬季良), 기량(驥良)등의 이름으로 고쳐서 쓴다. 같은 해 여름 성요한대학에 입학한다. 1933년, 당납, 나평(羅平), 진타(陳陀)등의 필명으로 <신보>의 "매일영화", <신보>의 "영화전간", <신문보>의 "예해"등 부간(副刊)에 영화평론을 발표한다. 자주 독창적인 견해를 실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다음 해 가을, 화예영화회사에 편극으로 입사하여, 항일영화 <도망>의 주제가 <자위가>와 삽입곡 <새외촌녀>의 가사를 쓴다. 섭이(聶耳)가 곡을 붙여 널리 불리워진다. 나중에 전통영업공사의 편극, 선전주임으로 들어가고, 명성영편공사의 편도위원회 부주임이 된다...

 

당납은 외모가 준수하여 전통의 감독이 그를 봅아서, 코미디극 <도시풍광>에서 남자주인공 이몽화(李夢華)역을 맡게 한다. 그는 비록 처음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이지만, 연기가 상당히 뛰어났다. 전통이 <도시풍광>을 찍을 때, 당납은 산동 청도에서 오고 본명이 이운학(李雲鶴)인 남평(藍萍)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얼마 후에는 깜짝 놀랄만한 혼인풍파가 일어나서 신문의 가십란을 장식하는 남,녀주인공이 된다.

 

전기작가인 섭영렬(葉永烈)이 쓴 <강청전>(작가출판사 1993년판)에서는 풍파의 전인후과(前因後果)를 이렇게 상세히 적었다: 1936년 4월 26일 오전, 당납과 남평은 같은 배우인 조단(趙丹)과 섭노천(葉露茜), 고이기(顧而己)와 두소견(杜小鵑)과 함께 항주 육화탑 아래에서 집단혼례식을 거행한다. 감독 정군리(鄭君里)가 주재하고, 상해법학원 원장 심균유(沈鈞儒)가 증혼(證婚)이 되어 일시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5월말, 남평은 제남으로 가서 병이 든 모친을 찾아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서신을 보내어 관계를 단절하자고 말한다. 청천벽력을 맞은 것같은 당납은 6월하순 제남으로 간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남평을 찾을 수 없었다. 절망한 나머지 여관에서 불붙은 장작을 삼켜서 자살을 한다. 다행히 차방(茶房)이 발견하여 병원에 보내어 적시에 응급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살아난다. 기실 천진으로 전 남자친구 유계위(兪啓威)를 만나러 갔던 남평은 소식을 듣고 제남으로 돌아오고, 정군리가 설득하여 당납과 함께 상해로 돌아간다. 두 사람이 같이 생활한지 얼마 지나지 않다, 다시 다투게 되고 서로 별거하게 된다. 1937년 5월 22일,당납은 남평이 감독 장민(章泯)의 가정에 끼어든 것을 알고는 비분하여 화가 난 나머지 오송구에서 장강에 뛰어든다. 그러나 길가던 사람이 그를 구해낸다....

 

혼인과 사랑은 그저 인생의 일부분이다. 단순이 이 시각에서 한 사람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리고 쉽게 일면만을 보게 될 수 있다. 주의해야할 것은 남평이 상해에서 당납을 알게 되기 전에, 전 남자친구 유계위의 인도와 도움으로 1933년 2월 총도에서 이미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한때 조직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다시 상해에서 청년단에 가입한다. 영화업계에 종사하고 있을 때, 그녀는 절대적인 좌익문예소녀였다. 1937년, 그녀는 높은 정치적 이상을 위하여, 상해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조건이 극히 열악한 연안으로간다. 상해에서 남평을 위하여 처자식을 버린 장민은 더욱 일찌기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그후에 계속 좌익희극업무를 해왔다. 남평도 좋고, 장민도 좋고, 개인생활에서는 희신염구(喜新厭舊)한 기록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남평과 한때 동거하고 결혼했던 당납은 그때 어떤 정치적 면모였던가? 그가 나중에 '강청'으로 개명한 남평과 공동의 지향이 있었던가?

 

경시된 정치적 신분: 중공당원

 

1930,40년대 상해, 무한, 중경에서 다시 상해까지, 당납은 영화연극계, 신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상해에서 그는 <대공보>의 "희극과 영화" 전간을 펹비했고, 희극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전선기자도 지냈다. 무한으로 가서, 그는 항일연극 <중국만세>를 기획하고 연출하여 무한삼진을 놀라게 하였다; 중경으로 가서, 그는 영국신문처의 통역원이 되어 진보희극활동을 조직한다; 상해로 돌아와서, 그는 먼저 <시사신보>의 주필을 맡고, 다시 <문회보>의 총편집을 맡는다...당납은 중문, 영문이 오두 뛰어났다. 그는 공인된 댜재다능한 인물이다. 그에게 또 다른 명성을 가져다준 앞부분의 짧았던 혼인역사를 빼놓으면, 그는 영화연극 및 신문분야에서의 업정이 발군인 문화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납은 배우, 신문인의 직업,신분외에 당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였고, 나중에도 경시되는 정치적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중공당원.

 

<강청전>에서 "비비양양(沸沸揚揚)의 육화탑혼례"라는 부분에서 각주가 있다. 당납이 남평을 만났을 때, "기실 이미 공청단에 가입했다. 나중에 그는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한다" 또 다른 곳에는 하기언(夏其言)이 방문을 받고 회고한 내용을 실었다. 그는 일찌기 은행의 실습생에 합격했고, 동료인 마기선(馬驥善)과 친한 친구가 된다. 나아가 그의 형인 마기량(馬驥良) 즉 당납을 알게 된다. "그때 마기량은 'C.Y.'에 참가하고 있었다. 즉 공청단이다." 다만 당납이 언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다.

 

하기언은 당납의 청년시대의 가까운 친구로 싱가포르 <연합조보>의 요청을 받아 <당납과 나>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와 당납이 1936년에 알게 되고, 같이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구할 방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된다. 하루는, 당납이 말하기를 직업혁명가인 친구가 있는데, 금방 국민당 반성원에서 도망쳐 나왔고, 당국이 체포하려고 추격하고 있어서 몸을 숨길 믿을 만한 곳을 찾는다고 말하면서, 하기정에게 받아줄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하기언은 진보인사이며,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흔쾌히 응락한다.

 

당납의 이 친구는 이름이 사매(본명은 사증도)이다. 나중에 하기언과 함께 정자간에서 거주한다. 사매는 학문이 뛰어나서, 문사철경(文史哲經), 고금중외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기언은 그를 사장(師長)으로 받든다. 당납은 사흘에 두번꼴로 하기언의 집을 드나들었고, 바깥의 소식을 사매에게 전해준다. 두 사람은 같이 형세를 얘기하고, 나라를 구할 방법을 얘기하고, 문예를 애기했다. 얘기를 하다가 평론 한 편이 나온다. 당납은 그 때 <대공보>의 "희극과 영화" 전간(專刊)의 주편이었다. 거기에는 국방영화를 고취시키는 글을 많이 실었고, 구망도존(救亡圖存)를 선양하는 글을 많이 실었는데 모두 하기업의 집 정자간에서의 작품이다. 하기언은 그때는 그저 방청할 자격밖에 없었다. 계속 듣고 거기에 사매가 추천해준 진보서적을 읽으면서 혁명의 도리름 많이 깨우치게 된다.

 

하기언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혁명의 도로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만일 사매가 최초의 계몽인이라고 한다면, 당나는 최초의 길안내자(引路人)이다." 하기언 본인은 193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당납은 그의 '최초의 길안내자'로서 그보다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또 하나의 문자기록을 증거로 삼을 수 있다. 2005년 10월호 <상해탄> 월간에 <신문계노전사하기언>이라는 글이 실린 바 있다. 소제목은 "당납이 그를 혁명의 도로를 가도록 이끌었다"인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1936년 그(하기언)은 공산당원 당납을 알게 된다...." 이 글의 작자인 거흔여(居欣如)는 일찌기 중공화동국선전부, 상해시위선전부에서 일한 바 있다. 하기언은 소속기관보 <해방일보>에서 전후로 경리, 정문부 주임, 부총편집을 지내다가 은퇴한다. 그들은 서로 알았고, 글에서 이렇게 표현하는데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아직 불확정적인 것은 당납이 도대체 언제 정식으로 중공당원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1920,30년대 공청단에서 공산당으로 바꾸는 것은 비교적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즉 공청단이 입단한 후 일정한 시간의 시험을 거쳐 직접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하기언은 당납이 'C.Y"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실제로 그는 금방 "C.P"(공산당의 영문약칭)로 되었을 것이다.  이 추단이 성립한다면, 당납의 당령(黨齡)으로 따지면 1936년 혹은 그 이전부터 계산해야 할 것이다. 이를 보면, 당납과 남평이 금방 서로 갈라져서 딴 길을 걷게 되었지만, 처음에 함께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사상적으로 같은 진영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중공조직부문이 1937년 77사변으로 항전의 전면발발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에 따르면, 당납이 그 이전에 혁명에 투신하고 입당한 것은 '홍군시기' 간부라 할 수 있다. 그는 명실상부한 노혁명가이다. 만일 배우, 신문계인사라고 한다면 모두 당납의 직업신분이다. 그렇다면 중공당원은 이 문화인의 정치신분이다. 그러므로, 그의사상 저변의 색깔은 그가 하기언에게 전수해준 혁명이상과 마찬가지로, 구망도존,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을 해방시키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신중국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중공당원이라는 이 정치신분은 당납의 '인생비밀'을 푸는 관건적인 열쇠아다.

 

'잠복'한 신문업계인사

 

1949년 10월 1일, 중공이 정식 집권당으로 들어서기 전에(심지어 그후 한동안), 대다수의 중공당원은 비밀상태였다. 심지어 홍색근거지 혹은 혁명대오내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1948년 홍콩으로 가서 일을 하다가 멀리 해외로 더난 당납은 한번도 당원신분을 공개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다. 일부 당납이 관련된 회고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인 면모는 불명확하다. 다만 공산당원이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그것도 아주 독특한 역할을 수행했다.

 

해방전에 일찌기 부녀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는 동례연(童禮娟)은 <허광평과 같이 살던 나날>이라는 글에서, 1946년 설날이 지난 후 얼마되지 않아, 중공지하당 학위의 영도하에, 그녀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상해부녀연의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허광평, 호자영등이 상무이사로 선임된다. 영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부련은 간행물을 발간한다. 경비가 없어서, 처음에 유인기(油印機)로 인쇄한 2기의 간행물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허광평이 나서서 <시사신보>와 연결하고, 당조직은 그녀에게 허광평과 만나서 구체적인 업무를 진행하도록 안배한다. 한번은 허광평이 요청으로 그녀의 집에서 마계량(당납)을 만난다. "그날,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일찌감치 도착했다. 얼마후, 마계량이 왔다. 그는 중간키에 회색양복을 입고 있었다. 학자의 풍모였다. 우리는 앞의 반칸의 창에 붙은 탁자 둘러 앉았다. 주로 허광평과 마계량이 얘기하고 나는 곁에서 듣기만 했다. 허광평은 아주 겸손했다. 수시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항상 고개만 끄덕였다. 결국 모두 협의하여, 부간(副刊)의 반개 판면으로 1주일에 1기씩 내며, 간행물제목은 <부녀생활>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학생생활>, <공인생활> 부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명칭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 글에서는 <시사신보>는 국민당 4대가족중 1명인 공상희(孔祥熙)가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부간의 원고는 간행후에 원고료가 없다. 조판, 교정등의 업무는 모두 그녀가 신문사로 가서 처리했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부녀생활>이 몇 기 나온 후, 허광평은 다시 <연합만보>에 연락하였다. 이번에는 허광평이 몇 개의 쪽지를 써서 나보고 직접 연합만보사의 주편 풍빈부(馮賓符)를 찾아가가라고 했다. 풍빈부는 나와 구체적인 사정을 얘기하고, 간행물명칭을 <부신(婦訊)>으로 했다..... " 그리고, "<연합만보>는 항해 지하당이 지도하는 민영의 면복으로 출현한 신문이다. 만보(저녁에 나오는 신문)이므로, 모두 오전에 신문사로 가서 일을 했다. 허광평 선생이 평화, 민주, 독재반대, 내전반대를 견지하는 편집방침을 정하였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부간은 광대한 부녀독자를 단결시키고 교육시켰다."

 

<연합만보>는 원래 중공지하당이 지도하는 신문이다. 그러나, <시사신보>는 국민당 재벌 공상희가 장악한 신문이다. 다만 당납은 <시사신보>의 주필을 맡아서 일부 면에 중국공산당의 신문과 비슷한 선전작용을 하게 하였다. 노신의 부인인 허광평은 부녀계의 좌익영수인물이다. 그녀의 배후에는 중국지하당이 있다. 당납과 그녀의 합작은 당연히 개인행위가 아니다. 전술한 거흔여의 글에서도 당납이 <시사신보>에 들어간 일은 언급하고 있다: "당납이 주필을 맡은 것은 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의 직접 영도자는 문위(文委)책임자인 하연(夏衍)이다. 하연은 당납에게 국민당 내부의 파벌갈등을 이용하여, 이 신문을 아주 좋은 진지로 만들게 했고, 진보적인 주장을 선전하는데쓰게 했다." 당납이 이 신문사에 들어가서 주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공상희의 아들 공령간(孔令侃)이 성요한대학의 동창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한때 군인과 경찰이 극원에서 서로 싸운 스캔들을 보도한 바 있는데, 군인과 경찰 쌍방이 신문사를 때려부수겠다고 큰소리친 바 있다. 당납은 즉시 공령간으로 하여금 나서서 주선하게 해서 조용하게 된다. 이는 공산당원의 국민단 문화선전기구에 대한 '잠복'이다. 유사한 사례는 적지 않다.

 

당납이 <시사신보>에 있었던 기간은 길지 않다. 일부 문장이나 면의 내용이 너무 친공산당적이어서, 배후의 신문사오너의 주목을 끌어 결국 쫓겨나게 된 것이다. 그는 <문회보>의 총편집을 밭는데 총주필 서주성(徐鑄成), 부총주필 진우손(陳虞孫), 환향(宦鄕) 및 취재주임 맹추강(孟秋江)등과 이 좌익적인 입장의 신문을 주재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뛰어난 업적을 남긴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국공평화협상이 철저히 결렬되어 중공대표단이 남경을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기 전날인 1946년 11월 19일, 당납은 돌연기차를 타고 상해에서 남경으로 가서, 남경주재기자 정영흔(鄭永欣)과 함께 매원신촌으로 가서 중공대표 주은래를 만난다. 정영흔의 회고글인 <석두고성"축록"기>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전체 과정은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납은 그저 한 가지 문제를 묻는다: 주선생, 당신이 연안으로 돌아가면 국공평화협상결렬은 불가피하다. <문회보>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은래가 대답한다: "너희는 원래대로 일을 해라. 그것은 임시응변을 요한다. 아마도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정영흔은 이어서 물었다: 주선생이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옵니까. 평화협상의 문이 다시 열릴 희망이 있는가? 주은래의 대답은 "우리는 빨리 돌아오면 올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민당이 정치협상결의를 실현할 성의가 있느냐에 달렸다. 전쟁형세의 발전을 보면 개략 내년 봄이다. 반년여이후에는 아마도 너희들과 남경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납은 특별히 왔으니, 그날 밤에 야간기차를 타고 상해로 돌아간다. 소식을 전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비밀을 유지했다. 이것은 보통의 방문이 아니다. 당납이 급히 가고온 경과를 보면 주은래에게 직접 지시를 받기 위한 것이다. 환경이 악화될 때 국민당당국과 투쟁하는 전략을 가르침받기 위한 것이다. 서로간에 마음으로 알고 있었고, 서로 묵계가 있었다.

 

나중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문회보>의 편집부내에 16,7명의 지하당원이 있었는데, 3,4개이 서로 다른 계통에서 왔고, 모두 조직내에서 상하급관계에 있었다. 다만 신문사의 출군시에는 서로 모른 척 했다. 예를 들어, 진우손과 하기언도 서로 잘 알았지만 그러했다; 그리고 동일한 계통이 아니고 조직관계가 없었던 경우는 하기언과 당납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문회보.는 특수한 신문이다. 당납은 특수한 신분을 지닌 신문인이었다.

 

홍콩<문회보>창간을 위하여 막후에 연결시키고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 같이 일한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다만 처음에 쓴 말은 간접필법이다. 그는 1980년대초에 쓴 <보해구문>(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정언보>"라는 부분이 있다. 거기에는 1947년 6월 <문회보>가 국민정부에 의해 정간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대만으로 같이 놀러간다. "일이 교모하게 되느라,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상해에 성립되었다. 기관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하라고 강하게 말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이다.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는 임조(任潮)이다. 여기서 언급횐 '한 당원동지'는 누구인가? 서주성은 여러해이후에 쓴 <내가 아는 이제심>이라는 글에서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1947년 5월 상해 <문회보>가 정간된 후, "다음해 봄, 노동지 마계량동지(당납)가 돌연 홍콩에서 상해로 와서, 나에게 말했다: '이임조 선생이 이미 홍콩에 국민당혁명위원회를 성립했고, 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한다. 이임조는 반드시 당신이 와서 총편집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곳에서 쓴 내용은 같은 이야기이다. 이를 비교해보면, 앞의 책에서 말한 "한 당원동지"가 바로 당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주성은 홍콩<문회보>와 관련한 회고글이 몇 가지 대동소이한 글이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버전에서는 당납이 당시 홍콩에서 상해로 온 임무가: "다음 해 3월(1948년), 내가 아무 할 일없이 무료해서 갑옷에 좀이 쑤실 때에 돌연 어느 날 오후, 청하지도 않은 손님 마계량동지가 왔다. 그는 원래 <문회보>의 총편집이다. 신문이 정간된 후, 홍콩으로 갔다. 왜 돌연 돌아왔는가? 나는 한참을 놀라서 멍하니 있었다. 좌정한 후, 그는 나에게 말한다. 이번에 온 것은 화강(華崗)동지를 호송하여 상해를 지나 산동해방구로 가기 위함이다. 오는 길에 당신에게 한 가지 메세지를 가져왔다. 이 구두메세지는 바로 전술한 '민혁'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발간할 준비를 하며, 이제심은 서주성이 와서 주재하도록 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글에서 언급한 화강은 1924년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25년 공산당원이 되었으며, 중공남방국선전부장, 국공담판시 중공대표단 고문을 맡고, 1947년 국공평화회담결렬후 중공대표단을 따라 연안으로 물러갔다가, 1948년 봄에 홍콩으로 가서 병치료를 하고, 중공홍콩공위의 통일전선공작을 했다. 당납이 이번에 그를 해방구로 호송하는 도중에 상해에 들렀다는 것은 리스크를 안은 행동이다. 이는 설명한다. 그는 이때 비밀스럽고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전해에 <문회보>가 문을 닫아서, 당납, 진우손, 환향등은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었다. 그래서 각각 몸을 숨기거나 타향으로 도망쳤다. 당납은 당시 소주 고향집으로 갔다가 얼마후 홍콩으로 나갔다. 이때도 위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몰래 상해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서주성은 '한동안 깜짝 놀라서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당납은 상해로 가는 길에 서주성에게 구두메세지를 전해준다. 그것은 출로를 찾고 있던 <문회보>의 일부 동지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는 홍콩으로 가서 '민혁"과 합작을 협의하려는 서주성에게 장건량(張建良), 하연의 연락방법을 알려주고, 장건량을 통하면 반한년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바로 반한년이 막후에서 '민혁'과 <문회보>의 합작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납이 제공한 연락방법으로 서주성은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간 다음, 장건량, 하연과 반한년을 차례로 만나고, 이제심, 채정개(蔡廷鍇), 담평산(譚平山)등 민혁 고위층을 만나고, 상해 <문회보>를 대표하여 순조롭게 합작건을 협의한다. 결국 당납은 홍콩 <문회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을 뿐아니라, 총편집도 맡는다. 편집업무를 책임지는 외에, 총주필 겸 경리부를 관장하는 서주성의 경제적 압력과 대외연락도 분담했다. 만일 반한년이 전체 방안의 기획자라면, 당납은 한걸음 한걸음 추진한 실천자이다. 당납을 이미 환갑이 넘은 홍콩 <문회보>를 태어나게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2012년 7월, 홍콩의 신문계원로 용약(容若)은 <명보월간>에 글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홍콩 <문회보>는 처음부터 공산당이 '지배'한 신문이다. 당납은 '이 신문 인력조직의 막후 연락인이다" 앞의 말은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뒤의 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반한년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서주성은 무당파의 직업 신문인이다. 상해 <문회보>에 있을 대 동료들중 누가 중공지하당원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홍콩 <문회보>시기에 그는 과거에 이름만 듣고 알지는 못했던 하연 및 반한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장건량도 알게 된다. 이들 공산당인들과 접촉이 많아졌다. 그는 회고글 <홍콩문회보창간초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반한년 동지는 자주 <문회보>의 상황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업무가 아주 바밨다. 자주 각 민주당파와 민주인사와 연락했고, 기타 중요한 업무를 했다. 그는 자주 나와 만날 수는 없었다. 나는 일이 있으면 장건량 동지와 연락하거나 마계량 동지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이미 쓰여져서 나온 것이다. 필자는 1982년 2월부터 서주성 선생의 지도하에 연구생으로 있었다. 그때 글로 쓰지 않은 이야기도 들었다. 그중에 당납은 반한년 계통의 사람이라는 말도 잇었다. 반한년, 장건량과 당납은 결의형제이다. 반이 큰형이고, 장건량이 둘째, 당납이 셋째이다 등등.

 

당납의 이 두 "결의형제"는 당시에 모두 신통광대하고 명성이 혁혁한 인물들이었다. 반한년은 공적이 적지 않다. 그의 억울한 사건이 명예회복된 후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문화인이다. 중앙 "특과(特科)"에서 정보와 보위업무를 책임졌다. 항전시기와 해방전쟁초기, 장기간 적점령구역 및 국통구역에 출몰했다. 공개된 통일전선공작과 비밀의 정보공작을 결합하여 출신입화했다. 삼교구류의 친구들과 모두 사귀고, 아주 가치있는 정보들을 획득한다. 은폐전선에서 공적이 탁월한 지도자이다. 장건량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명 "화극지(華克之)"는 전설적이다. 그가 아직 공산당원이 아니던 1935년 11월, 손봉명(孫鳳鳴)을 기자신분으로 국민당 제4기 6중전회 회의장에 들어가게 기획하고 파견한다. 원래 암살목표인 장개석이 나타나지 않자, 왕정위를 암살하여,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한다. 학재금(在今)의 <중국비밀전>(작가출판사 2005년판)의 기술에 따르면, 1937년 5월 4일, 모택동이 연안에서 투신하러 찾아온 화극지를 접견한다. 국공의 협상이 무르익을 시기인 점을 고려하여 그를 남겨두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그를 화남으로 보내어 중궁과 이제심등과의 연락업무를 맡긴다. 그리하여 그는 화남에 간 후, 장건량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반한량의 영도하에 일을 한다. 일본인, 장개석, 왕정위의 세력간에 여러가지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난이도가 높은 사명을 적지 않게 완수했다.

 

상해,홍콩에서 당납과 두번이나 같이 일을 한 바 있는 <문회보>에서 퇴직한 편집인 임가요(任嘉堯)도 <당납: 가슴에 조국을 품고, 정은 고향에 이어진다>는 글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당납과 원목지(袁牧之), 정군리, 조단은 뜻이 맞아서 결의형제가 된다. "다시 반한년과도 의결금란(義結金蘭)한다" 다만 장건량은 언급되지 않았다. 전술한 반한년, 장건량, 당납이 '결의형제'라는 주장은 한 사람의 말일 뿐이므로 더 많은 자료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당납과 반한년, 장건량 특히 반한량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잇다. 그들은 같은 참호의 전우였다.

 

해방직전에 왜 외국으로 멀리 떠났는가?

 

홍콩 <문회보>는 1948년 9월 9일에 창간된다. 당납은 12월초 돌연 사직하는데, 그가 총편집을 맡은지 3개월도 되지 않은 때였다. 이때, 인민해방군의 승리소식이 속속 전달되고 잇었다. 신문사의 동료들은 모두 흥분하여 언젠가 대륙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주성은 놀라서 묻는다: "현재 전국해방이 이미 시간문제이고, 동료들은 모두 '청춘결반호환향'을 준비하고 있는데, 너는 어찌 멀리 나라를 떠나려 하는가?" 그리고 간절하게 만류한다. 다음 날, 반한년은 서주성에게 말한다: "마계량은 떠나야 한다. 너는 붙잡을 필요가 없다." 나중에 신문사에서 연회를 열어 당납을 환송하고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긴다. <서주성회고록>(삼련서점1998년판)에는 이 일을 기술하면서 한 마디를 추가했다: "몇십년후, 나는 비로소 마계량이 선견지명을 지녔음을 홀연 깨닫는다."

 

임가요는 <고사억당납>에서 역시 이 일을 언급한다. 당납은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다: "해방전쟁이 승리하면, 나의 바램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돌아갈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당납은 사적을 젊은 편집자에게 말했다: "그 이미 떠나가버린 여자를 위해서이다. 내가 만일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강청과 알고 지내던 정군리, 왕영, 조단, 욱풍등이 '문혁'때 모두 비참한 처지에 놓인 것을 보면 당납은 미리 미래에 발생할 일을 확연히 내다보았던 것같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일종의 '사후제갈량'식의 가설이다. 1980,90년대의 정치환경에서 강청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당납이 출국했다는 것은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정확한 해답이었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따져보면 그 말이 성립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평'의 첫번째 남자친구인 유계위는 나중에 황경(黃敬)으로 개명하는데, 청도에서 출옥한 후 북경으로 가서, '12.9"운동을 이끌고, 여러해동안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해방후 천진시 시장, 제일기계공업부 부장, 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을 지내고, 1958년에 병사한다. 비록 그는 업무에서 모택동의 엄중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강청과는 확실히 무관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감독 장민은 나중에 처자식의 곁으로 돌아간다. 해방후 중앙전영국 예술위원회 주임, 북경전영학원원장, 당위서기를 맡는다. '문혁'때도 아무 일이 없었고 1975년에 사망한다.

 

사실상, 당납이 출국한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소주중학 동창이자 나중에 경제학자가 된 오대곤이 쓴 <삼십년대초기 소주혁명투쟁을 회고한다>를 보면, 동창들의 소년시기, 당납, 사매등이 앞장서서 항일구국선전을 했던 옛 이야기를 적고 잇다. 당납에 대하여 각주에 이렇게 적었다: "소주중학을 떠난 후, 당납은 계속 혁명사업과 문화사업에 적지 않은 일을 했다. 해방직전, 멀리 해외로 간다. 건국초기, 나는 상해에서 반한년을 만났는데, 반한년은 나에게 말했다: '당납은 내가 해외로 파견해 보낸 것이다. 그는 국민당 외교관의 딸을 처로 맞이했다' 기실 당납도 강청이 나중에 그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할까봐 멀리 피한 것이다." 이 주석에서 말해주는 한 가지 사실과 한가지 추측이 있다. 사실은 바로, 반한년이 당납을 미국으로 보낸 것은 그가 파견한 것이라는 것이다. 추측은 바로, 당납이 그렇게 떠난 것이 강청이 그에게 해를 가할까봐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추측에 대하여 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실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당납이 당시 미국으로 간 것은 전략적인 안목을 가지고 반한년이 해외정보공작을 위하여 정보망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대곤의 말은 바로 서주성이 회고하는 반한년이 그에게 '붙잡으려 하지 말라'는 것과 서로 인증이 된다. 당납이 미국으로 간 것은 반한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영문수준이건 사회경험이건 교제능력이건, 당납은 해외로 파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하물며, 그는 이미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일하는 애인 진윤경과 만나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진윤경의 부친은 전 국민정부의 고위외교관이다. 이런 가정배경 및 이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인맥관계를 고려하면 등불을 켜고 찾아다녀도 찾기 힘들 것이다. 당납 본인은 공사를 두루 살펴서 모두를 이룬 것이다. 반한년이 오대곤에게 한 '그가 국민당외교관의 딸을 처로 취했다'는 것은 당시 상해시 부시장이라는 지위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부사정을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잇다. 만일 당납이 당시 동료들과 함께 대륙으로 되돌아갔다면 십중팔구 1955년 반한년사건이 발생했을 때 연루되었을 것이다. 반한년사건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수백명이고 전국각지에 걸쳐 있다. 당납과 반한년의 관계가 밀접하므로 반드시 장건량(화극지)와 같이 체포되고 형을 받았을 것이다. 설사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명에회복은 아마도 24년후인 1979년에나 가능할 것이다. 즉, 당납이 만일 국내에 있었다면, 그의 악운은 '문혁'보다 10년전에 이미 닥쳤을 것이다. 이것은 그때 얼굴을 내미는 일이 적었던 강청과는 그다지 관계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에 살았던 것이 당납에게는 행운이었다.

 

1948년말, 당납은 홍콩에서 미국으로 간 후, 뉴욕의 중문신문, 인쇄공장에서 2년도 일을 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 진윤경과 결혼하고 딸을 하나 기른다. 그들 둘은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며,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1988년 8월 23일, 당납은 폐암으로 병사하니 향년 74세이다.

 

<강청전>의 말미부분에는 몇몇 관련인사의 최후를 설명한다. 그중에는 '사인방'이 몰락한 후, 당납이 일찌기 중국대륙으로 돌아가서, 상해를 다시 돌아보며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몇번 돌아왔지만 행적은 기밀이었고, 공개적인 장소에 나타난 적은 없다."

 

섭검영, 나청장의 비밀스러운 접견

 

당납이 처음 귀국한 것은 1978년이다. 하기언은 사적으로 말한 바 있다. 당납이 처음 상해에 도착했을 때, 하기언부부와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정군리 부인 황신이 데리고 정군리의 묘소로 가서 헌화하고 애도했다. 그후에 북경으로 간다. 당납은 확실히 조용히 다녔다. 공개적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아니라, 다른 친구와 동료들도 만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생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납이 북경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까? 국외인이 추측하거나 판단하기는 힘들다. 다만 여러해 이후 그 단서가 나타난다. 2008년 12월 18일 <남방주말>에서는 '개혁팔현(改革八賢)'이라는 특집글을 실었는데, 그중 한편인 <섭검영: 최후십년>에 붙은 4장의 사진이 있다. 그중 1장은 여러명이 같이 찍은 사진인데, 문자설명은 이렇다: "1978년 12월, 섭검영은 북경에서 프랑스화교 당납(좌3)을 접견하다. 우1은 나청장(羅靑長), 좌2는 섭선녕(葉選寧), 좌1은 섭선기(葉選基)이다" 사진에서 당납은 한가운데 위치한다. 이것은 깜짝 놀랄 일이다.

 

현대혁명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섭검영 원수는 중공중앙 부주석, 중앙군위 부주석 및 전국인대상임위원장을 지낸 덕고망중(德高望重)의 지위가 높은 인물이다. 전쟁시대에, 그는 방면군 혹은 전군참모장을 지내고, 여러번 중대사변에 참여하고, 일찌기 중공남방국의 영도자로 일했으며, 남방지구, 홍콩 마카오 및 해외의 정보를 관장했으며, 통일전선업무도 관장했다; 나청장은 당시 중앙조사부 부장이다. 국가정보안전부문의 최고책임자이다; 섭선녕은 섭검영의 차남으로 이후 해방군 총정연락부 부장을 지낸다; 섭선기는 섭검영의 조카로, 일부 기요에 참여한다. 약간만 생각해보면 바로 생각할 수 있다. 만일 단지 프랑스에서 식당을 열고 있는 늙은 화교라면, 여러해만에 귀국하여 어찌 섭검영과 같은 당정군의 주요지도자를 만나볼 수 있겠는가? 국가정부안전기구의 책임자를 만나볼 수 있겠는가? 교포업무를 관장하는 사람도 아니고. 당납이 1978년말 북경에서 받은 이런 예우의 규격, 이렇게 특수한 인물들과의 접견은 그가 일찌기 신비한 신분을 가졌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이런 보통이 넘는 안배는 그에게 있어서 '인조(認祖)'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귀종(歸宗)'이라고 할 수는 있다.

 

이번 접견에서 섭검영이 뭐라고 햇는지, 당납이 뭐라고 했는지는 당납이 회고록에 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관련내용은 단지 모 부서의 자료에 들어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는 확정할 수 있다. 당납은 일찌기 공산당원이었고, 또한 특수한 전선에서 활약한 일원이었다

 

이 일생이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여러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역사인물의 얼물에 덮인 면사를 철저히 벗겨낼 수 있을까? 관련자료가 공개되는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