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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강청(江靑)의 자살원인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섭영렬(葉英烈) 

 

강청은 마지막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약간 의외이다. 

강청이 자살한 소식은 신화사에서 발표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신화사(1991년) 6월 4일전

 

본보 기자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임표,강청반혁명집단의 주범 강청이 보외취의(保外就醫, 우리나라의 "병보석")기간인 1991년 5월 14일 새멱, 북경의 그녀 거주지에서 자살로 사망했다. 강청은 1981년 1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사형, 2년집행유예, 종신정치권력박탈의 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1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4년 5월 4일 보외취의되었다.

 

6월 5일자 <인민일보> 제4판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소식이 실린다.

 

강청종년칠십칠세(江靑終年七十七歲)

 

최초로 강청의 자살소식을 보도한 것은 1991년 6월 1일에 출판된 미국 주간지 <타임즈>였다. 북경에서 온 소식이라고 하며, "강청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타임즈"는 소식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다. 강청의 자살원인은 "인후암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다가 더이상 견디지 못했다"고 하였다.

 

일본의 주간 <문예춘추>에서는 강청의 소위 "절명서(絶命書)"를 발표했다:

 

"모주석은 인민을 영도하여 이십여년간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여 혁명의 승리를 거두었다. 현재 등소평, 팽진, 양상곤의 반혁명수정주의 일당이 영도권을 집어삼켰다. 주석은 유(소기)는 제거했지만 등(소평)은 제거하지 않아서 후환이 무궁했고, 국가와 민족에 재앙을 끼쳤다. 주석, 당신의 제자이며 전우가 당신을 보러 갑니다!"

 

일본의 <문예춘추>에는 강청의 "절명서" 수적(手跡)을 싣지 않아서, 이 '절명서'의 진위는 판단하기 어렵다. 단지 말투는 강청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강청은 '문혁'의 강령성문건인 "5.16통지" 25주년 전날에 자살했다.

 

강청은 5월 10일, 돌연 그녀의 회고록 원고를 찢어버린다. 이것은 그녀의 행동이 이미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월 13일, 강청은 그날자 <인민일보>에 "역사상 기념할 만한 날"이라고 썼다. 강청이 이 날을 기념할 만한 날이라고 한 것은 25년전 그녀가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제1부조장으로 지명되었기 대문이다.

 

5월 14일 새벽, 강청은 간호사가 떠난 틈을 타서, 몇 개의 손수건을 묶어서 밧줄고리를 만들고, 화장실 내에서 목을 맨다.

 

5월 18일, 강청의 유해는 화장된다.

 

강청의 자살은 사람들에게 의외였다. 왜냐하면 자살을 재촉할만한 무슨 특별한 원인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죄는 이미 확정되었고, 형도 이미 판결내렸다. '외죄자살(畏罪自殺)'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물며, 법정에서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그녀는 '2년집행유예'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이것은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991년 그녀는 이미 체포된지 15년이 되었다. 이미 '승리'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마침내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당연히 자세히 '고증'해보면, 일찌기 그녀가 당납(唐納)과 싸웠을 때, 1937년 5월 31일 <한통의 공개서신>을 썼다. 그 안에는 자신이 당시에 자살할 생각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나는 마비환자처럼 멍하니 땅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푸른 하늘의 구름조각. 아, 나는 영원히 한조각 한조각 지나가던 하얀 구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나갈 용기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극도로 나빠졌다. 동시에 나는 마음 속의 고통을 얘기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자살의 생각은 나의 일기에 썼다. 그러나, 나는 이미 채초생 선생에게 <왕노오>를 찍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일종의 책임감과 동시에 한 가닥 희망이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일종의 아주 무서운 조울증 속에 빠진다. 나는 자주 자신의 머리를 치고, 자신을 때렸으며, 아무 이유없이 발광한 것처럼 성질을 부렸다....(주: 1937년 6월 5일 권4기 상해 <연화화보>에 실림)

 

54년전, 23세의 남평(藍萍)은 자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가닥 희망이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54년후, 77세의 강청은 더 이상 '한가닥 희망'이 없었다. 그녀는 자살한다.

 

강청의 죽음에 대하여, 당시 중국의 신문잡지에서는 신회사의 소식을 발표하는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필자는 주의해서 보았다. 유일한 예외는 상해의 <해방일보>였다. 잡문가 하만자(何滿子)의 <강청은 왜 자살했는가>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거기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강청자살은 당연히 뉴스가 되어야 한다. 천하에 알려서 이 십년재난의 화수(禍首)가 마침내 악이 차고 넘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모두 알게 해야한다. 이 요파(妖婆)는 자살했다. 자살은 여러가지 동기가 있고, 여러가지 상황이 있다: 박해로 비분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강청의 음위(淫威)하에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항의하는 길을 걸었던가. 강청은 당연히 이런 류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원래 죽어서 마땅하다. 그래도 그저 사형집행유예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나중에 다시 그녀를 보외취의해주었다. 이것은 관대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박해라고 할 수가 없다; 외죄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강청은 이런 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만일 죄가 두려워 자살했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공개재판전에 스스로 지옥에 갔을 것이다. 절망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대세가 이미 기울고, 옛날의 천당꿈이 철저히 파괴된 경우이다. 10년을 기다렸지만 희망이 없다. 그래서 이 남은 여생을 끝내는 것이다. 강청의 자살은 이런 유형에 속한다.

 

11기3중전회이후, 중공은 여전히 '문혁'을 철저히 부정한다. 다만 백각지충(百脚之蟲), 사이불강(死而不僵)이다. 천당을 잃은 무리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재기할 것을 헛되이 기도하는 자들이 있었다; 변신을 하여 욕을 참으며 도모하는 자도 있었다; 방식을 바꾸어, 새로운 병에 옛날 약을 담으려 하는 자도 있었다; 대아(大雅)에 오를 수 없으면, 뒤에서 자잘하게 일을 꾸미는 자도 있었다; 풍풍우우(風風雨雨), 화선번다(花鮮繁多). 다행히 난을 바로잡았고, 개혁개방의 대국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옛날에 연연하는 것은 더 이상 세를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강청자살의 뉴스가 천하에 공표되었다. '여황' 자신도 이미 철저히 절망했고, 되돌릴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히틀러가 자살한지 40년후에, 독일에는 여전히 옛 나치의 잔재와 신 나치의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을. 강청 자살의 뉴스도 이렇게 반면교사의 작용을 한다. 사람들에게 철저히 '문혁'을 부정하도록 하는 교육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이를 귀감으로 삼아야 사회안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실 강청의 죽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옛날 '전성'기에 장옥봉에게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장래 나는 죽을 것과 감옥에 갈 것을 준비했다. 이것은 내가 겁나지 않는다. 그리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며 연명할 수도 있는데 그건 어렵다."

 

그녀는 "죽지도 살지도 않고 연명하는 것"에 싫증이 난 것이다. 마침내 마음을 정해서, 일찍 이런 삶을 끝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