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백련교(白蓮敎)는 사교집단인가?

중은우시 2018. 1. 12. 00:11

글: 이안루(李顔壘)


영화 <황비홍의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에서 가장 많은 장면은 우매하고 무지하며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백련교이다. 그들은 중국인의 민족주의 정사와 낙후함과 우매함을 이용하여, 교회를 불지르고, 철로를 파괴하며, 대사관을 부수고, 항구를 빼앗으며 무고한 서양인을 죽인다. 심지어 서양말을 배우는 중국학생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백련교의 역사는 연원이 길다. 역대 통치자들은 사교(邪敎)로 규정하였다. 원나라말기, 백련교가 정식 형성하기 이전에 "흘채사마(吃菜事魔)", "요적(妖賊)"등 여러가지 사교가 나타난다. 많은 경우는 사회현실과 들어맞지 않는 이단종교였다. 그리고 종교의 기치를 내건 민간비밀교파, 미신단체였다. 백련교가 형성된 후, 비교적 정규적인 의미에서의 사교가 출현한다. 교도들이 "안분수기(安分守己)"했는지 아닌지, 그들이 도(道)를 모셨는지, 아니면 불(佛)을 모셨는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직, 경권(經卷), 교의(敎義)와 활동은 모두 현실사회질서와 들어맞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측면에서 보자면 민간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반정부활동에서 보자면, 그들은 비밀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반사회층면에서 본다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암흑으로 백성이 살아가기 어려워지다보니, 교파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반사회, 반정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은 상호혼합된 백련교, 미륵교(彌勒敎), 명교(明敎)등 비밀종교가 일으켰다. 이들 비밀종교는 미륵강세(彌勒降世), 명왕출세(明王出世)등의 주장을 내세워서 민중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때의 구호로 삼아, 구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이들 비밀종교는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는 무기가 된다. 원나라말기에 우후죽순으로 일어난 농민반란은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참신한 대명제국을 건립한다. 주원장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주원장은 일개 초민으로 "사교"가 일으킨 반란에 참가한다. 처음에는 백련교, 미륵교, 명교등 비밀종교를 많이 신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세력이 커지면서, 그의 정치적 입장은 점차 변화한다. 그는 통치자로 일약 변신한 것이다. 그는 쉽게 반란에 이용될 수 있는 비밀종교(혹은 사교)에 대한 태도가 하루하루 신봉에서 소원으로 심지어 반대로 바뀌어 간다.


주원장은 하층출신의 정치적 두뇌가 있는 인물이다. 민간교파가 현행질서에 끼치는 해악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나라 지정26년(1366년), 주원장은 저명한 토장사성격문에서 백련교를 공격하는 언사를 명확히 한다: "우매한 백성들이 요술에 잘못 빠져서, 그 말이 황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미륵이 정말 있다고 믿어서 세상에 내려와 통치해주고 고통에서 건져주기를 바라고, 모여서 향불을 사르는 무리들이 여(汝), 영(潁)을 근거지로 하여, 하(河), 락(洛)에 만연하고 있다. 요언이 돌아다니며 흉악한 음모를 실행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사대부를 살육하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원래 신봉했던 백련교와 미륵교, 명교등 비밀종교를 "요술" "요언"이라고 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그가 얼마나 미워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원장이 정식으로 명왕조를 건립한 후, 엄격한 법률로 사교를 다스린다. 주원장이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교파의 활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다만 백련교등 교파활동은 계속 되었다. 그들은 대강남북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고, 전체 명왕조에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중 하나가 된다.


백련교는 하층민중이 정부의 포악에 항거하는 조직형식일 뿐아니라 그들이 나타나는 형태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백련교는 갈래가 아주 많았다. 여러 지파들은 각각 활동하고 통일된 적이 없다. 그들은 활동내용, 방식에서 통치자에 대한 태도까지 왕왕 제각각이었다. 일부 지파는 여전히 민중들에 의하여 현행질서에 대항하는 도구가 되고, 일부 교파의 수령은 변신하여 백련교를 돈을 긁어모아 부자가 되는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심지어 사회상층으로 가는 도구로 삼는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일부 백련교파는 "변구(邊寇)"가 중원을 침략할 때, 간첩역할을 하여 민족의 패류로 되었다는 것이다.


청나라군대가 중원으로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라는 이 이전정부를 골치아프게 했던 사회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순치연간에 각지의 "사교"는 속속 봉기하여 갈수록 활동이 많아졌고 반청이 색채를 띄고 있었다. 실은 민족갈등이 격화된 결과이다. 막 건립된 통치질서를 유지보호하기 위하여 청나라조정은 "사교"에 대하여 엄격하게 진압하는 정책을 쓴다. 순치13년 십일월,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사교"를 엄금한다.


청왕조가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왕조가 남겨놓은 난장판을 정리해야 했고, 강대한 민족반항정서에도 막부닥친다. 그래서 수도 없이 많은 사교를 뿌리뽑을 여유가 없었다. 강희제, 옹정제 두황제는 어느 정도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정책을 취했고, "사교"에 대하여 그다지 큰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백련교도 상대적으로 안정된다. 건륭제이후,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백성들은 조정으로부터의 압박이 심해져서, 살기가 어려워진다. 건륭, 가경 두 황제때 전후로 왕륜(王倫), 임청(林淸)과 이문성(李文成) 및 천섬오성(川陝五省)의  "교비(敎匪)"가 대규모로 거사를 일으킨다.


청나라때 백련교의 난은 왕총아(王聰兒)의 양양의거가 장렬했다. 왕총아는 여성으로서 교주와 총사령관이 되었는데, 몇 가지 원인이 있다. 한편으로 그녀는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백련교 교도들은 그녀의 남편인 제림(齊林)을 존경하고 옹호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백련교 교의 자체에 있다. 백련교 경문(寶卷)에 이런 말이 있다: "혹시남(或是男), 혹시녀(或是女), 본래불이(本來不二). 도장착(都仗着), 무생모(無生母), 일기선천(一氣先天)" "촉부합회남화녀(囑咐合會男和女), 불필니문분피차(不必你們分彼此)" 전자는 남자이건 여자이건 선천적으로 평등하다는 말이고, 후자는 백련교 내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거리를 둘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련교의 많은 분지창시인 중에는 여자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비구니 여씨(呂氏)는 서대승교(西大乘敎)를 창시했고, 청나라때의 김씨(金氏)는 탁양교(托陽敎)를 창시했으며, 유씨(劉氏)는 홍양교(弘陽敎)를 창시했는데 모두 여성이다. 민간종교와 농민반란이 서로 결합할 때, 다시 적지 않은 여성우두머리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청나라 건륭연간의 일지화(一枝花)등이 있다.


왕총아는 호북 양양의 의군을 이끌고 청군을 계속 격파한다. 실력을 보존하여 오랫동안 청나라조정과 싸우기 위하여, 그녀는 군대를 이끌고 호북에서 섬서를 거쳐 사천으로 전략적이동을 한다. 청군의 삼면협공을 막아내는 전투에서 왕총아는 백제성(白帝城)에서 청군과 삼일밤낮동안 격전을 벌인다. 결국 청군의 방어망을 뚫고 돌파한다. 그후에 왕총아는 군대를 이끌고 사천과 섬서의 경계를 오가면서, 매번 예상밖의 방법으로 청군을 공격한다. 그래서 청군은 계속 피동적이 되고, 사상자가 참중했다. 남은 군인들도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가경제는 분노하여, 왕총아를 "적중역수(賊中逆首)"라고 욕하며, 청군에 반드시 포위섬멸하라고 명령한다. 여러번의 고전을 거쳐 왕총아는 군대를 이끌고 호북으로 돌아온다. 운양(鄖陽, 지금의 운현) 삼차하(三岔河)의 사화파(卸花坡)에서 청군과 만난다. 8로의 강적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왕총아, 요지부(姚之富)를 우두머리로 하는 30여명의 영웅자매들은 하나하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한다.


시궁절내현(時窮節乃見), 옥쇄색유백(玉碎色猶白). 명청 두 왕조의 백련교는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면서 사회에 해악을 많이 끼친다. 다만 왕조교체기에 잔혹한 통치에 반항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은 칭송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