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주원장(朱元璋)은 왜 유기(劉基)를 죽였을까?

중은우시 2018. 1. 10. 18:16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유기(劉基, 劉伯溫)은 절동(浙東, 절강성동부) 청전(靑田)의 명문거족이다. 원나라 지순연간에 진사가 되고, 일찌기 고안승(高安丞), 강절유학부제거(江浙儒學副提擧)등의 관직을 지냈다. 방국진(方國珍)이 거병한 후, 행성은 유기를 원수부도사(元帥府都事)로 추천한다. 유기는 무력으로 방국진을 평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방국진은 겁을 먹고 사람을 보내 원나라 대도의 권력귀족들에게 뇌물을 주어 유기의 병권을 박탈하게 한다. 유기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 청전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방국진의 군대를 방어한다.


주원장이 금화(金華)등지를 점령한 후,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절동의 명문거족을 자신의 편으로 거두려 한다. 그리하여 손염(孫炎)을 보내어 유기, 송렴(宋濂)등을 응천부(남경)으로 모셔왔다. 유기등 지방세력파의 가입으로 원나라조정으로부터의 압력이 감소되었을 뿐아니라, 절동의 사회질서도 안정되어 간다.


홍무3년(1370년), 주원장은 유기를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짐이 처음 절동에 왔을 때, 그대는 나에게 크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짐이 경사로 돌아간 후, 그대가 친히 와서 투항했다. 이때 절동의 백성들이 아직 나에게 깊은 신뢰가 없었는데, 그대가 오니 안정되었다."


유기가 스스로 주원장의 진영에 투신한 후, 장기적인 군사전략계획을 제정하였을 뿐아니라, 그의 예민하고 정확한 판단력으로 많은 뛰어난 전투를 지휘했다. 용봉6년(1360년) 윤오월, 진우량(陳友諒)이 태평을 함락시킨 후, 전함을 이끌고 채석에서 장강의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는데, 기세가 엄청났고, 응천부는 혼란에 빠진다. 주원장은 장수들을 모아서 대책을 논의했다. 어떤 사람은 투항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종산으로 도망가자고 주장한다. 이에 주원장은 극히 실망한다. 이때, 유기가 분노하여 소리친다: "투항이나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해야 합니다."


주원장은 마치 서광을 본 것처럼 바로 묻는다: "선생은 어떤 적을 격파할 계책을 가지고 있는지요?"


유기가 대답한다: "적은 비록 인원수가 많지만, 극히 교만합니다. 만일 우리가 적을 깊이 유인하는 방식를 채택하여 복병으로 기습한다면 가볍게 적을 격패시킬 수 있습니다."


주원장은 유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우량을 용만(龍灣)으로 유인한 후 성공적으로 그를 궤멸시킨다.


얼마후, 진우량이 권토중래하여 안경(安慶)을 함락시킨다. 유기의 주장에 따라, 주원장은 친히 병력을 이끌고 실지회복에 나선다. 다만 성안의 군사들이 결사적으로 항거했기 때문에 하룻밤낮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유기는 적시에 주원장에게 계책을 제시한다: 아군이 견고한 성에 막혀 있어서 오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병사의 사기가 꺽일 것입니다. 차라리 안경의 포위를 풀고 직접 강주로 진격하여 진우량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줜장은 그의 말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서진한다.


진우량은 어쩔 줄을 모르고 가족을 데리고 무창으로 도망친다. 강주의 수비군은 중과부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용흥의 수비장수 호미(胡美)는 그의 아들을 보내어 담판을 벌이면서, 그의 부대를 해산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주원장은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유기가 뒤에서 가볍게 의자를 찬다. 주원장은 바로 깨닫고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호미가 투항한 후, 강서의 여러 군현도 그 소식을 듣고 속속 투항한다.


유기는 운주유악, 결승천리할 뿐아니라 상술(相術)에도 정통했다. 파양호결전때, 쌍방의 군대가 파양호에서 삼일을 대치하고 있었다. 유기는 군대를 호구로 옮겨서 파양호의 요충지를 막고, 금목상범일(金木相犯日)에 결전을 벌인다. 그리고 진우량은 패망한다.


유기같이 심모원려를 가지고 귀신같이 앞일을 내다보는 인물은 전쟁에서는 없어선 안될 존재이다. 그러나 평화시기에는 정권에 위협이 된다. 주원장은 유기를 여러해동안 의사결정때 참여시켰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속이 깊은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용만대첩, 강주기습에서 유기는 뛰어난 지모를 보여주었다! 안풍구원을 거절하고, 소명왕을 척주에 따로 두는데서, 유기의 정치적 안목이 드러났다. 그 변화막측한 점성술은 주원장마자도 겁을 먹게 만들 정도였다.


이렇게 예측불가한 인물이 곁에 서서 주씨의 강산사직을 '내려보고 있으면' 주원장이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홍무원년(1368년) 사월, 주원장은 변량을 순행한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유기와 좌승상(左丞相) 이선장은 응천부를 지키고 있었다. 유기는 송나라와 원나라가 너무 관대한 정책을 써서 천하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기강을 다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중서성 도사 이빈(李彬)의 부정부패사건이 터진다. 당연히 참형에 처해야할 죄였다.


그런데 이빈은 이선장과 교분이 깊었고, 이선장은 가볍게 처벌해달라고 부탁한다. 유기는 이선장의 말을 신경쓰지 않고 주원장에게 보고한 후 이빈을 사형시킨다.


형을 집행할 때, 관청에서는 마침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주원장이 돌아온 후, 유기에 원한을 품은 이선장은 유기가 기우제를 지내는 신단 아래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대불경(大不敬)에 속한다고 고자질한다. 유기에 원한을 품고 있던 일부 사람들도 이 기회에 나서서 그를 모함한다. 주원장이 대노한다. 그리하여 유기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주원장과 유기의 사이는 이렇게 금이 간다.


유기가 관직을 버린 후, 그의 친구인 양헌(楊憲)은 어사중승 자리를 넘겨받는다. 양헌은 검교릉등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주원장에게 이선장의 나쁜 점을 일러바치도록 한다. 시간이 길어지고, 여러번 듣게 되자 주원장도 점점 이선장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그에 대하여 약간은 경계하게 된다.


그해의 십일월, 주원장은 유기를 다시 불러들여서 중임을 맡긴다. 그리고 유기의 조부, 부친을 영가군공(永嘉郡公)에 추증한다. 이선장은 다시 힘을 모아서 회서(淮西)집단의 관리들로 하여금 힘을 모야 유기를 모함한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듯이 주원장은 점점 유기를 의심하게 된다.


주원장은 양헌을 재상에 임명하려 했고, 유기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유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양헌은 재상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상의 도량은 없습니다. 재상은 당연히 흉금이 넓고 물처럼 공평해야 합니다. 의리를 일처리하는데 표준으로 삼고, 사심과 잡념을 석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양헌은 그렇게 넓은 흉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를 재상으로 삼으면 아마도 대사를 그르칠 것입니다."


주원장은 유기가 양헌과의 사적인 교분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다 들은 후에 아주 기이하게 생각한다.


주원장은 이어서 묻는다. "왕광양(汪廣洋)은 어떠한가?" 유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도량이 좁고 견식도 넓지 않습니다."


주원장이 다시 묻는다. "호유용(胡惟鳙)은?" 유기는 이렇게 대답한다:"그는 지금 한 마리의 송아지입니다. 다만 장래는 반드시 쟁기의 속박을 벗어날 것입니다."


아무리 고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맹점은 보지 못한다. 유기의 이번 대답은 시의적절하지 못했다. 주원장이 제시한 세 사람의 재상후보자를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경력이 짧고, 통제하기 쉽다는 것이다.


주원장이 중시한 것은 정무처리의 재능이 아니었다. 그의 명령을 그대로 집행할 수 있느냐였다.


재상은 주원장의 눈에 그저 장식품일 뿐이다. 다만 아주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 주씨왕조에 위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유기는 확실히 주원장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원장은 이때 경계심을 갖고 유기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묻는다: "나의 재상 자리는 선생만이 가장 적합할 것같습니다."


유기는 아마도 스스로 느낌이 좋았던지, 아니면 사직을 위하여 심신을 바칠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주원장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버린다: "저는 제가 재상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번잡하고 격렬한 일은 할 수가 없어서 황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원컨데 황상께서 세심하게 찾아봐주십시오. 현재 말씀하신 이들은 확실히 재상을 맡을 그릇이 아닙니다."(<명사.유기전>)


유기의 대답은 안하무인적인 측면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미 전제황권에 대한 실질적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기의 현명한 재상을 뽑아서 임금의 권한을 나눠갖는다는 이념은 주원장의 권력독점의 사고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이번 대화이후, 유기는 점점 주원장에게서 소외당한다.


홍무3년(1370년), 주원장은 공신들에게 작위를 하사한다. 이선장, 서달, 상무, 이문충, 풍승, 등유등은 모두 공(公)의 작위를 받는다. 스스로 재상감이라고 생각한 유기는 겨우 성의백(誠意伯) 즉 백(伯)의 작위에 그친다. 이는 유기가 천하를 얻는데 세운 엄청난 공로와 비교할 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유기의 봉록이 백작 중에서도 가장 낮았다는 것이다. 봉록240석이다. 이선장이 4000석의 봉록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이는 확실히 주원장이 유기를 꺼려서 그의 작위도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얼마후, 유기는 다시 한번 주원장으로부터 또 다른 은사(恩賜)를 받는다. 고로환향(告老還鄕). 유기의 지지를 잃자 양헌도 혼자서는 버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에게 살해당한다.


유기는 고향에 은거하며 집의 문을 걸어닫고 손님도 만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면서 보낸다. 비록 그가 이렇게 도광양회하고 있었지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유기가 관직에 있을 때, 일찌기 이렇게 건의한 바 있다: "구(甌), 괄(括)의 사이에 담양(談洋)이라는 빈터가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복건과 인접하고, 염도(鹽盜)가 모이는 곳입니다. 이곳에 순검사를 두어서 지키십시오."


마침 탈영병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방관리가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유기는 장남 유련(劉璉)으로 하여금 중서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원장에게 이 일을 보고하게 한다. 이때 호유용이 중서성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예전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그는 수하를 시켜서 유기를 모함한다: "담양이라는 곳은 왕기(王氣)가 있는 곳입니다. 유기는 거기에 분묘를 만들고자 했고, 현지 민중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검사를 두라고 해서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주원장은 비록 유기에게 죄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점복술을 생각하니, 마음 속으로 불안해졌다. 그리하여 명을 내려 유기의 봉록을 박탈한다.


유기는 그 소식을 듣고 무척 두려워한다. 급히 조정으로 가서 주원장을 배알한다. 감히 쟁변하지는 못하고 그저 자신의 잘못임을 자책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얼마후 유기는 병을 얻는다. 주원장은 호유용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유기를 만나게 한다. 유기는 약을 먹은 후, 주먹 정도 크기의 무엇인가가 가슴을 막는 것처럼 느낀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병세를 아뢰지만, 주원장은 못들은 척 한다.


몇 개월후 병세가 악화된다. 주원장은 다시 사람을 보낸다. 유기의 병이 이미 회복불능이라는 것을 알고는 선박을 마련해서 그를 청전으로 돌려보낸다.


홍무8년(1375년), 명나라 개국원로 유기가 사망한다.


호유용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중승(中丞) 도절(塗節)을 이렇게 진술한다. 호유용이 그로 하여금 유기를 독살하게 했다고. 그리고 왕광양도 이 일을 알고 있다고 했다.


주원장은 왕광양을 광남으로 유배보내고, 태평에 이르렀을 때 그를 사사한다. 유기의 사인에 대하여 주원장은 일찌감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호유용이 결당하였고, 유기는 호유용이 준 고(蠱)를 먹었다. 하루는 와서 내게 말했다; 황상, 신의 뱃 속에 크고 단단한 뭔가가 있습니다. 아마도 치료가 불가능할 것같습니다.' 나는 사람을 시켜서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집에서 죽었다."


왜 호유용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주원장은 유기가 독살당한 진상을 드러냈던 것일까? 왕광양의 죽음은 당연히 죽을 죄를 지어서일까, 아니면 입막음용으로 죽인 것일까?


이런 여러가지 의혹은 아마 한가지 답밖에 없을 것이다. 호유용이 대담하게도 유기를 독살한 것은 설사 주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주원장의 묵인은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호유용이 비록 유기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철천지원수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유기가 죽을 때, 호유용의 권세는 아직은 한손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은 개국원로를 독살할 만큼의 자격과 담량이 없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유기는 이때 이미 은거한 상태이고, 더 이상 지위나 권세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호유용과 같이 똑똑하고 일잘하는 사람이  승상관직이 날아갈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아무런 댓가없는 거래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