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동림서원은 전일제학교가 아니었고, 성인야학도 아니었다. "월교(月校)"였다. 강학은 대회(大會)와 소회(小會)로 이루어지는데, 매월 한번의 소회가 있고, 한번에 3일을 진행한다. 매년 1회 대회를 여는데 봄 또는 가을에 열었다. 소회는 매월 1사람을 추대하여 주최하게 하고, 대회는 매년 1사람을 추대하여 주최하게 한다. 즉, 동림서원의 "원장"은 당시에 전통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산장(山長)"인데, 고헌성(顧憲成)이 제1대 산장이고,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매번 대회의 주최자는 반드시 산장이 아닐 수도 있었고, 추대제로 추대했다. 이를 "주맹(主孟)"이라 부른다. 그리고 매번 강회를 주최하는데 요즘으로 하면 대회조직위원장같은 자리이다. 매번 회강(會講)은 주맹이 강연자를 초청하게 된다. 강연을 하는 외에 질문이 있으면 질문하고, 토론할 것이 있으면 토론했다. 그리고 매번 회의에는 다과도 나왔고, 점심 저녁 식사도 4인 1석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집도 냈다.
회기가 있고, 주최가 있고, 강연이 있고, 접대가 있고, 다과가 있고, 문집도 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의 대형세미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동림서원의 강연형식은 당시로 봐서는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었다. 다만 강연내용은 완전히 색달랐다. 일반적인 학당이나 서원에서는 대명의 과거지정교재인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하여 강의했다. 과거시험준비용이거나 순수한 학술용이었다. 그러나, 동림서원에서 강연하는 내용은 학술에 한정되지 않았고, 당시 정치에 관련되었다. 당시의 사서상의 말로 하자면 바로 "풍의조정(諷議朝廷), 장부인물(臧否人物)" 즉 조정의 일을 비평하고 조정인물의 좋고 나쁨을 평가했다. 매번 회의에서 강연자는 <사서>의 1장을 얘기하고 그 후에 회원들이 주변부터 얘기를 시작해서 거일반삼(擧一反三)으로 당시 정치와 연결시켜서 국가정책의 시시비비를 평가하고, 정치인물의 좋고 나쁜 점을 평가했다. 동림서원에서 초청한 강연자는 대부분 관료사회에서 쫓겨났거나, 밀려난 관리들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시국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았고, 대담하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이런 강연기풍은 많은 청중을 불러모으게 된다. 특히 젊은 선비들과 하급관리들에게 특히 흡인력이 있었다.
동림서원의 강연자를 얘기하자면, 고헌성의 친구인 조남성(趙南星), 추원표(鄒元標)는 우정출연했고, 그 외에 고헌성을 둘러싼 7명의 친우들이 주력이었다. 그들은 고헌성과 같이 강연하였다. 이 8명의 강연자들은 동림서원의 영혼이자 핵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동림팔군자(東林八君子)"라고 불렀다. 그들은 각각 고헌성, 고윤성(顧允成), 고반룡(高攀龍), 안희범(安希範), 유원진(劉元珍), 전일본(錢一本), 설부교(薛敷敎)와 섭무재(葉茂才)이다.
고윤성. 강소 무석 사람. 고헌성의 동생. 만력14년 진사. 처음에 남강부교수를 지냄. 만력21년, 국본논쟁때 고윤성도 적극적인 '입장파(立長派)'였고, 상소해서 직언했다. 절대로 장자를 폐하고 동생을 세울 수는 없다고. 얼마후 그는 좌천된다. 고윤성은 성지를 받아 부임하지 않고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력22년 즉 1594년, 고헌성은 삭탈관직당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고윤성은 형의 최대조력자였다. 동림서원의 중수를 기획하고 유식인사를 끌어모은다.
고반룡. 강소 무석인. 고헌성의 고향사람.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예절에 밝았다. 6살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12살때 팔고문을 썼고, 21살때 거인이 되었으며 만력17년에 진사가 된다. 청류삼로인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관료로서의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행인사행인이 되어 성지를 전달하거나 책봉을 행하는 등 예의관련 업무를 맡았다. 황상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상소문에 써서 올렸다가 지방의 하급관리로 좌천된다. 거기에 부친상을 당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친상을 지낸다. 그후 30년을 고향에서 지낸다. 즉 조정에서는 30년간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집에서 편안히 쉬면서 고반룡은 많은 책을 읽는다. 그리하여 심후한 경지에 이른다. 반나절은 글을 읽고 반나절을 정좌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다. 삼십년간 이를 쉬지 않았다. 고헌성이 고향에 동림서원을 만들어 강학을 한다는 말을 듣자 그는 바로 달려와서 도운다. 나중에 동림당의 제2대지도자가 된다.
유원진. 강소 무석사람. 만력23년 진사. 처음에 남경이부주사였고, 나중에 남경병부낭중으로 승진한다. 만력33년 즉 1605년에 '경찰(京察)"을 받는데 유원진이 그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저명한 정직한 관리였다. 국가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어두운 정치적 국면에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다. 유원진은 파면된 후 고향 무석으로 돌아가고, 고헌성, 고반룡등과 동림서원에서 강학하며 시정을 비판한다.
안희범. 강소 무석사람. 만력14년 진사, 처음에 행인사 행인이 된다. 만력21년 즉 1693년 안희범은 직언직간하다가 만력제의 분노를 사서 좌처된다. 안희범은 파직된 후 한편으로 고헌성등 친우들과 책을 평하고 도를 논하면서 심신의 학문을 닦는다. 한편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각지의 명승지를 유람한다. 만력30년 즉 1602년 안희범은 동림서원에서 강학을 시작한다.
전일본, 강소 상주 사람. 만력11년 진사. 초임은 노릉지현이었고, 나중에 어사가 된다. 나중에 황제에 상소를 올렸다가 모함을 당해서 민(民)으로 격하된다. 그후에 전일본은 집에 은거하며 <육경>을 연구했다. 특히 <역학>에 뛰어났다. 나중에 고헌성의 요청을 받고, 동림서원의 강연을 맡는다.
설부교. 강소 무진 사람. 만력17년 진사. 상소를 올렸다가 황제의 뜻에 어긋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만력20년 즉 1592년 여름 설부교는 다시 기용되어 풍상교수가 된다. 얼마후에는 국자감조교로 발탁된다. 다음 해, 조남성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불평하다가 좌천된다. 모친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후에는 다시 출사하지 않는다. 설부교는 귀가후에 시종 집에 은거하며 나중에 고헌성형제와 고반룡의 요청으로 동림서원에서 강연을 한다.
섭무재. 강소 무석사람. 만력17년 진사. 형부주사를 수여받았다. 만력40년, 조정당쟁에서 동림당을 배척하면서, 그는 불만을 가지고 관직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후 섭무재는 동림서원에서 강의한다. 그는 공론정신을 제창했다. "천하의 일은 한 집안에서 사적으로 논의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는 동림서원에 정치를 논하는 창문을 활짝 열어준 계기가 된다.
이상의 팔군자는 시종 동림서원의 기둥이었다. 그들의 화상은 동림의 복도에 계속 걸려 있었다. 동림서원이 새로 생길 때부터, 그리고 이름없는 서원에서 천하에 이름을 떨칠 때까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동림의 기반은 바로 이 8명이 세운 것이라고. 창업원로라고 불러도 될 정됭다.
1604년 즉 만력32년 봄 동림서원에서 대회를 거행한다. 제1대산장인 고헌성이 제1차대회의 주맹으로 추대된다. "동림선생'으로 불린다. 그는 조남성, 추원표 이 두 사람의 청류와 함께 '동림삼군(東林三君)'으로 '동림팔군자'와 나란히 불리웠다. 이들은 동림서원의 문도들이 존경하는 교주격인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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