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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유구(琉球)국이 일본 시마즈(島津)군에 함락될 때 명나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by 중은우시 2018. 1. 9.

글:신유융(愼由戎)


"수나라의 군대가 힘으로 위협해도 굴복하지 않았던(隋兵劫之而不服)"하던 유구국이 명나라가 건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귀순하여(首效歸附)" 주원장에게 조공을 바치고 가장 우대받는 번속국(藩屬國)이 된다. 유구는 명나라의 비호와 지지하에 동남아, 조선, 일본등과 중개무역을 하였고, 자칭 "만국진량(萬國津梁)"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 유구국의 자신감과 대외무역의 번영을 보여준다. 동시에 유구국은 조공무역을 통하여 거대한 이익을 얻는다. "당십배(唐十倍)"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복은 화를 부른다. 이처럼 풍성한 무역이윤은 인근 일본의 다마요(大名)들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했다. 명신종 만력37년(1609년), 마침내 사쓰마(薩摩) 시마즈씨가 유구를 침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시마즈씨의 가신인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 히라다 마쓰무네(平田增宗)는 3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유구국을 함락시킨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유구에 관한 책 <남도지(南島誌)>에서 이 역사를 기록하며 탄식한다: "(시마즈)군대가 출정한지 사십여일, (유구)의 종사는 마침내 지켜내지 못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시마즈씨의 유구출병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구를 무역중개기지로 삼아 명나라와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회복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구침략전에, 난포 분시(南浦文之)가 카바야마 히사타카를 대신하여 초안한 <정유구국왕서(呈琉球國王書)>에 이미 나타나 있다: "귀국의 땅은 중화에 인접하여 있고, 중화와 일본이 통상을 하지 않은 지 지금까지 30여년이 되었다. 우리 장군께서는 우려를 하신 나머지 이에히사(家久)를 시켜 귀국과 상의하고자 한다. 매년 상선이 귀국으로 가서 대명과 일본이 교역을 하면 우리나라에도 이익이 있고, 귀국도 사람마다 부유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도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어찌 태평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 장군의 뜻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시마즈 이에히사는 상녕(尙寧)을 가고시마(鹿兒島)에 구금한 첫째해의 겨울에 상굉(尙宏), 모봉의(毛鳳儀, 일본명 이케구스쿠 우에카타 안라이(池城親方安賴))를 석방하여 귀국시켜, 명나라에 조공은 하는 건을 처리하고 명과 일본의 무역이 다시 열릴 수 있도록 알선하게 한다. 모봉의 일행은 만력38년(1610년) 정월하순 유구에서 출발하여 복건(福建)으로 간다. 전해지는 바로는 모봉의 일행이 명나라와 무역교섭을 전개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같은 해 윤2월 십일, 시마즈씨로 하여금 왜구의 방식으로 복건에 출병하여 명나라에 압력을 가하라고 교사하였는데, 시마즈씨가 출병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신종은 유구의 자문(咨文)을 통하여 이미 유구가 시마즈씨에게 함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쿠가와 막부와 시마즈씨의 요구를 무시하고, 직접 상녕에게 칙유(勅諭)를 내린다. 그로 하여금 귀국한 후 국정이 안정되면 유구와 일본과의 전후사정을 상세히 보고하도록 하고, 그 후에 결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칙유는 <역대보안>에 보존되어 있다.


황제칙유유구국중산왕상녕(皇帝勅諭中山王尙寧):


최근 복건의 순무 안찰사들이 아뢰고, 사신으로 온 왕의 외숙 모봉의가 표문을 들고와 아뢰기를, 왕국이 왜란으로 조공기한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대가 난리를 겪은 점을 감안하고, 조공을 제대로 못바친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하여 짐은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이에 특별히 칙유를 내려 그대를 위로하노라. 그대는 귀국하는 날 흩어진 사람들을 잘 다독이고, 강토를 잘 복구하고, 예전처럼 조공을 바치며 영원히 공순하며, 조정에서 먼 나라를 도와주려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그대 나라와 왜국과의 전후사정은 그대가 다시 보고하면 그에 따라 결정하여 처리하겠다. 왕의 외숙 모봉의와 장사, 통사등은 모두 조례에 따라 하사품을 내리니 그대도 알라. 이에 칙유를 내린다.


만력38년 십이월 십육일


모봉의는 다음해 여름에 가고시마로 돌아간다. 그 후에 사루가(駿河)로 가서 교섭상황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보고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신종의 칙유를 매우 중시한다. 그리하여 시마즈씨에게 빨리 상녕을 석방하여 귀국시키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시마즈씨는 "정십오조(掟十五條)"를 제정하고 "천벌영사기청문(天罰靈社起請文, 서약서)"를 강제로 서명하게 하는 등의 수단으로 유구를 장악한 후에 상녕을 석방하여 귀국시킨다.


경장(慶長) 16년(1611년) 십월 이십팔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시마즈 이에히사는 금방 귀국한 상녕에게 서신을 보낸다: "....귀하는 과인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 옛 맹서를 지켜서 하루빨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상왕래를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여 공로로서 이전의 잘못을 용서받으라. 그리고 그대가 관동에 인사할 때, 대장군 이에야스공이 서해도 9국의 무리로 명을 치라고 하였으나, 과인이 인의의 말로 설명하여 중지하게 했다. 유구에서 통상문제는 논의한 후에 병력을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이는 곽씨(郭氏, 郭國安)가 알고 있고, 아마도 귀하도 들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병력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과인의 힘이다....그대는 명나라에 글을 올려 일본과의 3가지 일을 간청하라: 첫째, 바다의 동떨어진 섬 하나를 내서 우리나라의 선박이 사용하고 각자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한다; 둘째 해마다 배를 유구에서 만나 일중무역을 한다. 셋째, 누구든지 사신을 보내어 서로 좋은 뜻으로 예의를 갖추어 교류하는 것이 좋다. 이 세가지는 우리의 일이면서 양국의 백성에게 혜택이 가는 일이고, 사직이 오래동안 보전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장군이 덕을 베풀었는데도 복속하지 않으니, 전선을 보내어 연해의 성읍을 함락시키고 생령을 죽일텐데, 그대의 군신이 걱정없이 살 수 있겠는가? 통상을 하는게 좋을지 침략을 받는게 좋을지 이해관계는 분명하다. 그래서 그대에게 급히 알리는 바이다." 이에히사는 상녕에게 명나라와 세 가지 일을 교섭하도록 요구한다. 즉, 명나라에 연해의 섬 하나를 대일무역에 개방하라는 것이고, 혹은 유구에서 호시무역(互市貿易)을 해도 좋고, 혹은 명과 일본과의 감합조공무역을 복원해도 좋다는 것이다. 만일 명나라가 응락하지 않으면 출병하여 명나라의 연해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나라에 무역을 다시 재개해줄 것을 압박한 것이다.  


다음 해, 상녕은 "개속진공사은(繼續進貢謝恩)"의 명의로 마량필(馬良弼, 일본명 나고 우에카타 료호(名護親方良豊))는 명나라에 자신이 신종황제 칙유의 위엄으로 인하여 이미 석방되어 귀국해싸는 소식을 전하면서, 조공의 일에 대하여 아뢴다. 그러나 유구의 시마즈군이 침략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조공품을 제대로 준비할 수가 없어서, 이번 공품에는 "마4필(馬四匹), 유황일만근(硫黃一萬斤)"외에 기타 "요도, 창, 갑, 진금묘유병"과 같은 일본특색의 공품을 모두 시마즈씨가 준비했다고 말한다.


복건순무 정계사(丁繼嗣)는 마량필 일행을 복건에 붙잡아 두고, 조정에 글을 올린다: "...어찌 돌연 일본의 물건을 유황 마포 외에 공물로 바치는가? 조공으로 오는 인원의 수가 있는데 어찌 따라온 사람이 백여명이 넘는가? 이런 상황을 보면 이미 평소의 공손한 뜻이 아니다. 하물며 왜인들이 시킨 것임에야. 그러나 막게 되면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으니, 정사와 수행원 수명을 남겨서 처분을 기다리고, 나머지는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비통상적인 공물도 함께 돌려보내어 천조의 위엄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진왜란때, 복건순무 김학(金學)은 일찌기 심유용(沈有容)을 일본에 보내어 소식을 정탐하게 한 적이 있는데, 비록 최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계속하여 일본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때 절강참장의 신분인 그는 이미 일본이 3천의 병력을 출병하여 유구국왕 상녕을 붙잡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총병 양숭업(楊崇業)을 통하여 조정에 보고까지 하였다. 그런 고로, 이번 유구의 조공은 여러 방면의 관심을 끌었다. 병과급사중 이근(李瑾)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유구국왕이 귀국하여 조공을 올리는 연유는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왜가 남해에서 설치면서 우리 강토를 넘보는게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중산왕이라는 자가 어찌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하는데도 석방되었으니 왜의 위세를 잊고 중화의 의리를 멀리 숭상하겠는가. 조공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방물을 추가하여으니 이는 분명 왜가 시킨 일이다." 병부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수십년동안 왜가 군침을 흘린 것은 조공이다. 그래서 유구를 거두고, 다시 중산왕을 귀국시킨 것은 조공의 길을 열기 위함이다. 그들의 뜻은 우리가 왜의 조공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지만, 유구의 조공은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혹은 여전히 38년의 모봉의 채견(蔡堅)의 일과 같을 것이다." 모두 이번 유구의 조공은 일본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마침, 유구가 이번에 조공을 바치기 전에, 곽국안이 사쓰마에서 복건으로 돌아와 모친을 뵌다. 암중으로 이에히사가 상녕에게 보내는 서신중에서 요구한 3가지 일 및 출병위협의 말을 전하고, 명나라에 방비를 하도록 말한다. 기실, 이전에도 유구에서 조공을 바칠 때는 자주 일본물건을 가져왔다. 정계사는 분명 곽국안이 흘린 소식을 듣고 유구의 이번 조공은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보(首輔) 섭향고(葉向高)에게 보고하여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3가지 일이라는 것은 명나라를 협박하여 무역을 하자는 것이다." 섭향고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명신종에게 글을 올린다: "순무가 한 말 중에 왜가 유구를 협박하여 무역을 하도록 요구하고, 또한 민절에서 망명한 곽국안도 그의 집에 서신을 보내었는데, 말이 광망하여 감히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신에게 써서 보냈는데, 동남의 일이 심히 우려됩니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황상의 비준을 기다립니다."


명나라는 이처럼 상호무역을 협박하는데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신종의 주목하에 예부는 처리방법을 내놓는다. "유구의 상황은 예측불가하니, 마땅히 관계를 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들은 조공을 명목으로 하고 있으니 우리가 거절하고 돌려보내면, 그들에게 빌미를 주게 ㅚ니, 이는 먼나라를 회유하는 정책에 어긋납니다. 청컨데 칙유를 내려, 그 나라로 하여금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수리하여 십년을 기다린 후에 물자가 풍족해지면 다시 조공을 회복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구의 이번 조공을 거절한다. 그리고 유구에게 10년후 다시 조공하라고 규정한다(십년일공). 겉으로 보면 유구에 대한 조치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대한 제재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시마즈 이에히사는 난포 분지가 상녕의 명의로 초안한 <여대명복건군문서(與大明福建軍門書)>에서 다시 한번 상녕으로 하여금 명나라에 교섭하게 한 3가지 건을 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세가지가 만일 모두 허락되지 않으면, 일본은 서해도 9국의 수만의 군사로 대명을 공격할 것이다. 대명의 수십주는 일본에 인근해 있으니 반드시 우려할 일이 발생할 것이다. 이는 모두 일본대장군의 뜻입니다." 그리고 상녕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조공의 명의로 복건으로 보내게 한다. 얼마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 상녕에게 이 일을 묻는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이 서신의 말투가 너무 공손하지 못하여, 상녕은 감히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해 유구의 조공사절이 거절당하고 귀국했을 때, 대명의 거절한 이유를 보고한다. 이제 도쿠가와막부가 시마즈씨의 유구출병을 묵인하며 명왕조와 무역을 진행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 명나라가 조선에는 병력을 보내어 지원하면서, 같은 속국인 유구에 대하여는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기실 만력41년(613년) 회시(會試) 책문(策問) 제5문(第五問)" "노왜(虜倭)" 정문(程文, 范文)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책왜자(策倭者)가 말하기를: 예전 조선을 유린하고 우리 담장을 훼손했다. 이제는 중산(유구)를 삼켰다. 이백년간 공손했던 속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할 수가 없다......아하, 탄환지도(彈丸之島)이며, 창명지격(滄溟之隔)이어서 병력을 해외로 보내어 예전 조선의 일을 따라하는 것은 불가하다." 즉, 유구는 조그마한 나라인데다가 너무 멀리 바다로 떨어져 있어서 조선을 지원한 것처럼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게다가 시마즈씨는 출병이 신속하여 일개월여만에 유구를 점령했다. 명나라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유구국왕 상녕이 도진씨에 의하여 사쓰마로 끌려가서 갇혀 있을 때이다. 이때 출병하여 도운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상녕을 석방하여 귀국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나라는 이미 일본이 유구를 침략한 주요의도가 무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잘 알아서, 유구이 진공기한을 제한해서 "십년일공"으로 하는 정책을 쓴다. 그 목적은 일본이 유구를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