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소인물(7), 오질(吳質), 조비의 고급참모

중은우시 2018. 1. 9. 23:51

글: 정순방(鄭純方)


필자는 자주 두 사람을 생각한다. 조위의 두 중요한 모사이다. 그들은 각각 학식도 뛰어나고, 모략에도 각각의 장점이 있었다. 총명도로 보아도 고하를 가리기 힘들었다. 그들은 적수이면서 그렇다고 원수는 아니었다. 그들의 장점과 결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최후를 보면 한 명은 피살되고, 한명은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어느 두 사람인가? 바로 양수(楊修)와 오질(吳質)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양수는 아주 유명한 편이다. 조조와 지혜를 겨루는 몇몇 장면은 정말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질의 명성은 그에 훨씬 못미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삼국의 영웅은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오질의 광망은 조금 미약한 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오질이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정반대이다. 그는 조위의 후반기에 큰 역할을 한다. 소인물이지만 건곤을 뒤집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사마의도 그에 못미쳤다.


오질은 어떤 대단한 점이 있었을까?


오질은 자가 계중(季重)이고, 문학을 좋아하고 음모에 능했다. 한때는 조비(曹丕)의 지낭(智囊)으로 조비가 세자로 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는 조비의 사적 친구였고, 동지였다. 그러나,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오질에게는 그다지 큰 상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질이 죽은 후, 황제가 그에게 준 시호는 놀랍게도 "추후(醜侯)"였다. 이는 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가 짙다. 설마 조씨삼대는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주구를 팽하는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진 것일까?


조조는 문장의 고수였고, 자연히 글을 잘쓰는 아들을 좋아했다. 조조의 아들중에는 글을 잘 쓰는 아들이 몇몇 있었다. 예를 들어, 조비가 있다. 그의 <연가행(燕歌行)>은 유명한 칠언시이다. 그리고 문학적인 재능에서도 뛰어났다. 그렇지만 조식(曹植)과 비교하면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조식은 당시에 건안지걸(建安之傑)로 불린다. 말을 하면 논(論)이 되고, 글을 쓰면 문장이 되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패시킨 후 일찌기 업성에 동작대를 만든다. 그 후에 자기의 아들에게 시부를 짓게 하는데 조식은 붓을 들어 바로 써내려간다. 그리고 조조에게 일별하게 한다. 확실히 좋은 글이어서, 조조는 조식을 특별히 좋아했다.


조비는 조조의 후계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자연히 곁에는 지모가 뛰어난 모사들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재능을 가져야만 조식과 싸울 수 있었다. 오질은 바로 그런 사람이고, 모략이 출중했으며, 일처리는 조용하게 했다.


오질은 글을 잘 썼다.그래서 조식도 오질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끙러들이고자 한다. 그러나 오질은 아무리 봐도 이 글재주가 뛰어난 조식은 정치적으로는 저능아라고 여겨져서 경이원지(敬而遠之)한다. 그는 한 마음으로 조비를 따른다. 그는 조비의 친구이면서 가장 믿을만한 모사였다.


기실 그는 조비를 위하여 두 가지 큰 일을 했다. 그리고, 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일거에 역사의 방향을 뒤집어 버렸다.


하나는 총명하기 그지없는 양수를 속인다. 오질이 조가령(朝歌令)으로 있을 때, 양수와 정씨형제는 모두 조조로 하여금 조식을 세자로 세우게 하려고 생각했다. 조조는 매우 겁을 먹고, 가마에 낡은 죽루(竹蔞)를 싣고 오질로 하여금 그 안에 엎드려 있게 한 후에 들어가서 일을 논의했다. 양수는 급히 조조에게 달려가 이를 보고한다. 조비는 놀라서 식은 땀을 흘린다. 오질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는다. 만일 부친이 알면 난리가 날 것이라며. 오질이 말했다: 겁날 게 무엇이냐. 내일 너는 이렇게 저렇게 해라...조비는 그의 계책대로 했고, 다음날 양수는 다시 고발한다. 그러나 조사했지만 죽루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비는 평안무사했다. 조식과 조조는 할 말이 없게 되었을 뿐아니라, 조식을 세자로 세우려는 당초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조비를 구하기 위하여 연극을 잘했다. 한번은 조조가 출정하려 했다. 여러 아들들이 나서서 배웅을 한다. 조식은 부친을 위하여 글을 한편 짓고, 부친이 하루빨리 개선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조비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글로는 조식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이때 오질이 그에게 말한다. 빨리 곡을 해라. 그래서 조비는 눈물 콧물 흘리면서 곡을 한다. 너무 슬프게 울어서 사람들이 감동할 정도였다. 조조와 좌우의 사람들도 매우 감동을 받는다. 그리하여 조식은 화이부실(華而不實)한 산부수재(酸腐秀才)일 뿐이고, 조비야말로 성실효순하여 대사를 맡길만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조비는 세자의 자리에 오르고 순조롭게 위왕이 된다. 오질의 이런 공로라면 승상의 자리도 주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질은 조위의 정치핵심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아니라, 그저 한직을 떠돌았다.


오질이 조비에게 밉보인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조비가 안면을 몰수한 것인가?


기실 둘 다 아니다. 이는 오질의 개인적 이유때문이다.


첫째, 출신이 한미하고, 상류층과 교류했다. 사람들은 오질을 시류에 편승했다고 조소했다. 특히 그의 고향사람들은 오질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는 문벌을 중시했다. 오질이 만일 행실을 올바르게 했다면 아마도 중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조부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가지고 횡행무기(橫行無忌)했다. 약간은 광오했던 허유와 닮았다.


둘째, 동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여 스스로가 자초했다. 오질은 조비에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밖에다 떠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숨어서 진행한 음모이다. 오질은 운주유악결승천리(運籌帷幄決勝千里)의 공로는 없다.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대신들을 모욕했다. 황초5년, 즉 220년 오질은 경사로 가서 조비를 만난다. 위문제 조비는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오질과 함께 술을 마시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이는 오질과 자신의 수하장수들간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술이 취하자, 오질은 주정을 부리며 조진(曹眞)을 모욕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배우들에게 살찐 인물과 마른 인물을 조롱하는 극을 공연하게 한다. 몸이 뚱뚱한 조진은 귀족장수로서 무척이나 화가 났다. 그래서 대노하여 오질에게 소리친다. 네가 감히 나와 무기를 들고 맞설 수 있겠는가? 이때 표기장군 조홍, 경거장군 왕충도 옆에서 거든다: 오대인은 당신이 늙은 뚱뚱이라고 인정하라는 것인데, 설마 당신이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조진은 갈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칼을 빼들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친다. 너 이 연극쟁이는 도망칠 생각은 말라. 내가 너를 베겠다. 오질은 검을 감싸며 말한다: 조자단(曹子丹, 조진), 당신은 그저 식탁 위의 고기이다. 오모가 너를 삼킬 때는 목구멍을 움직일 필요도 없고, 당신을 씹을 때는 이빨을 움직일 필요도 없다. 마르고 키가 큰 주삭(朱鑠)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폐하, 우리가 웃음거리입니까?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오질은 다시 주삭을 가지고 조롱한다. 생각해보라. 조홍, 조진이 어떤 인물인가? 조씨종친으로 군공이 혁혁하다 그들에게 밉보였다면 쓴맛은 자신이 봐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고관의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손만 뻗으면 쥘 수 있을 것같지만 실제로는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셋째, 군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소인득지(小人得志)했다. 오질은 군사, 정치적으로 재능을 펼쳐보여야 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공로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럴게 나대서는 조비가 발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하늘이 그를 돌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을 망친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오질이 죽은 후, 위명제 조예는 그에게 시호를 내리면서 "추후"라고 하였다. 이는 공신의 비극이다. 고금의 이치는 같다. 한 사람이 성공라혀면 단지 잔머리를 굴리는 수단만으로는 안된다.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득의망형(得意忘形)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속으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품성이 필요하고,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고, 양호한 수행이 필요하다.


오질은? 그는 정치가의 잠재적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