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유파(劉巴): 유비가 전중국을 쫓아다녀 가장 힘들게 얻은 인재

중은우시 2018. 5. 10. 17:49

글: 모운서(慕雲舒)


사람들은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삼고초려"한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유비의 수하에 있는 인재중에서 얻을 때의 난도로 따지자면 제갈량의 삼고초려는 첫째가 아니다. 첫째는 당연히 유비가 중국의 거의 절반을 돌아다녀서야 겨우 얻은 유파라고 해야할 것이다.


유파는 자가 자초(子初)이고 형주(荊州) 영릉(零陵) 증양현(蒸陽縣) 사람이다.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조부는 유요(劉曜)로 동한의 창오군태수를 지냈다. 부친인 유상(劉祥)은 강하군태수, 탕구장군을 지낸다. 유파는 젊었을 때 아주 유명했고, 당시 형주목이던 유표는 여러번 그를 불러서 유파를 무재(茂才, 다른 시기에는 秀才라고 불렀으나, 동한의 창업황제 유수의 이름을 피휘하여 동한시기에는 무재라 했음)로 삼고자 했으나, 그는 매번 거절했다. 유파의 재주와 학문에 대하여는 제갈량조차도 "장막에 앉아서 전략전술을 세우는데는 내가 자초보다 훨씬 못하다."고 했을 정도이다.


유비가 형주에 온 후에 자연히 유파라는 이 인재를 눈독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러번 유파를 불렀지만, 유파는 유비를 무시했다. 그의 말을 들은척 만척 한 것이다. 유비는 일찌기 삼국시대 둘째가는 신동이라고 불리는 주불의(周不疑)를 위하여 유파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유파는 죽어라 사양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학식은 별 게 아니다. 그에게 나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는 것은 봉황의 아름다움을 깨버려서 일거이 제비나 참새무리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나 같다. 이렇게 해서야 어찌 그를 더욱 총명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유비는 체면을 말도 안되게 구기게 된다.


건안13년, 조조가 남정을 하고, 유표는 병사하며, 유표의 아들 유종이 투항한다. 유비는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형초(荊楚)의 명사들은 속속 유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오로지 유파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고, 거꾸로 북상하여 조조를 배알한다. 조조는 당연히 유파의 명성을 일찌감치 들었고, 유파가 와서 투신하려 한다는 말을 듣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유파를 연(掾)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형주 남부의 장사, 영릉, 계양의 3군을 거두어들이도록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바로 조조가 적벽에서 대패한 것이다. 그리하여 형주남부의 4군이 유비의 손에 들어간다. 유파는 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유비가 영릉을 차지한 후, 유파가 그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인재를 아끼는 유비는 이전의 일을 문제삼지 않고 유파를 방문한다. 그러나 유파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그리고 아주 멀리 도망쳤다. 교주(交州)까지 간 것이다. 즉, 지금의 월남이다.


유파는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 유비가 자기를 찾아올까 걱정하여 이름과 성도 바꾸어 버린다. 스스로를 장(張)씨라고 한다. 그러나, 유파는 오나라와 친한 교주의 선비들과는 이념이 맞지 않았고, 그리하여 다시 익주로 도망친다. 익주를 통과하여 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이 노선은 2만5천리나 되는 먼 길이다.


그런데, 익주군에서 태수에게 붙잡힌다. 태수는 원래 이 장씨성의 사람이 간첩이라고 여겨서 죽이려 한다. 그때 주부(主簿)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니, 죽여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유파를 유장(劉璋)에게 보낸다. 유장의 부친 유언(劉焉)은 유파의 부친에 의하여 효렴에 천거된 적이 있어서 유파를 만나자마자 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유파는 익주에 남게 된다.


나중에 유장은 장송의 건의에 따라 유비와 연합하여 장로에 항거하려 한다. 이때 유파는 유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비는 영웅이다. 그를 불러들이면 반드시 해가 될 것이니, 불러들이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유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비가 촉에 들어온 후, 유파는 다시 유방에게 간언한다: "만일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하면, 그것은 호랑이를 숲 속에 풀어놓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유장은 또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유비에게 가맹관(葭萌關)으로 가게 한다. 결국 익주는 유비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일찌기 전군에 이런 명을 내린다: "누구든 유파를 해치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나중에 전사들은 도망칠 길이 없어진 유파를 생포하고, 유비는 크게 기뻐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거의 절반을 돌아다닌 유파는 마침내 유비와의 '악연'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유비는 다시 성대하게 그를 환영하고, 제갈량도 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함께 일할 것을 권한다. 부득이하게 유파는 마침내 유비에게 귀순한다. 좌장군서조연(左將軍西曹掾)의 관직을 내린다.


유비에게 귀순한 유파는 기실 유비나 그의 휘하 무리들에게 여전히 곱게 대하지 않았다. 장비는 유파의 명성을 앙모하여 유파의 집으로 달려가서 유파에게 그가 예전에 유비와 그랬던 것처럼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했다. 즉 의형제를 맺자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유파는 유비조차 무시했으니 장비는 말할 것도 없다. 과연 유파는 장비의 요구를 거절한다. 나중에 제갈량이 유파에게 너무 장비의 체면을 봐주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질책하자 유파는 이렇게 한 마디 한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영웅들과 사귀어야지, 군바리와 사귈 수는 없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유파가 자기마저도 무시한다는 것을 알고는 고민한다.


유파의 능력은 역시 대단했다. 유비가 촉에 들어온 후에, 3년동안 전투를 벌이게 되니 멀쩡하던 천부지국인 촉은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익주를 취한 후에 국고가 텅텅 비어 있어서, 걱정이 많았다. 그때 유파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별 게 아닙니다. 세 가지만 하면 됩니다. 첫째, 백전짜리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둘째, 전국의 물가를 통일시키며, 셋째, 공매제도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유비가 그의 말에 따라 조치를 취하자 몇달만에 비었던 국고가 차기 시작했다.


유비가 등극한 후, 모든 문고책명(文誥策命)은 유파의 손에 쓰여진다. 유계흥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제갈량, 법정, 유파, 이엄, 이적(伊籍)이 "공조촉과(共造蜀科)"했다고 한다. 촉과의 제도는 이 다섯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유파의 재능을 알 수가 있다.


유비가 칭제한 다음 해, 즉 222년, 유파는 병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