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가목비원(佳木非元)
삼국시대에 지능이 뛰어나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이런 신산(神算)은 몇명이나 있었을까?
개략 헤아려보니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개략 아래의 5명 정도인 것같다.
첫째, 제갈량(諸葛亮)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갈량은 신기묘산으로 유명하다. 초선차전(草船借箭), 차동풍(借東風)등 날씨, 적에 대한 예측은 모두 아주 정확했다. 융중책의 '천하삼분"도 현실로 실현된다. 그래서 제갈량은 삼국시대 최고의 예언가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의 공력은 절대로 "일람중산소(一覽衆山小)"이다.
둘째, 사마휘(司馬徽)
그는 유비에게 제갈량과 방통을 추천한다. 그리고, "두 사람중 하나를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제갈량의 출산시에 이렇게 탄식한다: "주인은 제대로 얻었으나 시기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得其主而不得其時)"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셋째, 곽가(郭嘉)
곽가가 조조를 도와 북방을 평정할 때, 그가 낸 계책은 모두 효과를 볼 정도로 뛰어난 판단능력을 나타냈다. 조조가 오환을 정복할 때 곽가의 계책을 써서 거의 모두 성공을 거둔다. 그의 신기묘산은 제갈량보다 아래가 아니다. 조조가 요동을 정벌할 때 도로가 행군하기 어려워, 잠시 이주(易州)로 물러나 주둔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곽가는 이미 병사했다. 요동을 쳐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원희(袁熙), 원상(袁尙)은 요동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반드시 후환으로 남을 터였다. 이때 곽가의 하인이 곽가의 유서를 조조에게 바친다.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손강(公孫康)이 곧 원희,원상의 수급을 바치러 올 것이다. 조조는 비록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공손강은 조조가 그를 칠 것이라는 말을 듣자, 계책을 세워 원희, 원상을 붙잡아 둘의 수급을 목합에 담아 이주로 보낸다. 조조가 이주에서 병력을 움직이지 않자, 하후돈, 장료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요동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면 병력을 허도로 회군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표가 빈틈을 노리고 기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원희,원상의 수급이 오면 그 때 회군합시다." 사람들은 조조의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돌연 요동의 공손강이 사람을 보내어 원희, 원상의 수급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조조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봉효(곽가)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구나!" 그리고는 공손강의 사신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공손강을 양평후, 좌장군에 봉한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조조에게 물어본다: "봉효가 생전에 뭐라고 예측했습니까?" 조조는 곽가의 유서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찬탄해 마지 않는다: "죽은 곽가가 병력을 하나도 쓰지 않고 요동을 평정하다니, 주공께서는 안타깝게도 인중신선을 하나 잃으셨습니다."
넷째, 최염(崔琰)
최염은 삼국제일류의 서예가일 뿐아니라, 모략과 예측능력도 남달랐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장기였다. 당시 조위의 문무관리중에서 사마랑(司馬朗)이 있었는데, 그는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하루종일 시를 짓고 노는 명사였다. 그의 눈에 드는 사람은 몇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염은 높이 평가했고, 두 사람은 별 일이 없으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다. 하루는 최염이 사마랑의 집에 간다. 사마랑은 집안사람들을 최염에게 소개시켜준다. 최염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염은 술을 한참 마신 후에 그에게 정중하게 말한다: "당신의 동생 사마의(司馬懿)는 총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니, 절대로 인물이다. 장래에 형인 당신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사마랑은 그냥 듣기만 하고는 술을 계속 마셨다. 그의 말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최염이 술취해서 하는 말이겠거니 여긴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사마의는 조위 3대의 탁고중신이 되어 대권을 손아귀에 쥔다. 사람들은 모두 사마의의 이름은 알지만, 사마랑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섯째, 감택(闞澤)
손권은 자신이 젊어서 조조, 유비가 먼저 죽는다. 220년, 조비(曹丕)가 한헌제의 선양을 받아 위문제가 되는데 그의 나이 33세였다. 당시 손권은 이미 38살이었다. 조비는 어려서부터 문무를 겸비하여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손권은 자신이 조비보다 일찍 죽을까 우려했다. 자신의 아들은 조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한번은 그 생각을 대신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러자 감택이 이렇게 말한다: "대왕께서는 걱정하실 것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비는 앞으로 10년을 못넘깁니다."
감택의 이 말이 나오자 모두 깜짝 놀란다. 감택이 어떤 인물인가? <삼국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모두 알 것이다. 적벽대전때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서를 써서 조조를 속여넘긴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리고 이릉지전때 손권에게 육손을 추천하여 유비를 대패시킨 인물도 바로 그이다.
실제로 감택은 모사만이 아니라, 거유이다. 감택은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책을 베껴쓰는 일을 했다. 그래서 박학다식했다. 한나라말기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전당장(錢塘長)을 지내고, 침현련(郴縣令)을 지낸다. 손권이 표기장군으로 있을 때, 그를 불러 서조연(西曹掾)을 삼는다. 나중에 관직이 중서령, 태자태부에 이른다. 우반(虞翻)은 그를 "촉의 양웅"이고, "오늘날의 동중서"라고 말한다. 감택은 일찌기 <건상역주>를 썼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감택은 원주율을 깊이 연구했고, 나중에 조충지(祖沖之)가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은 바로 그의 성과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조비가 10년을 못산다고 말했을까. 손권이 연유를 묻자, 감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조비의 비(丕)자를 살펴보면, 십(十)에 미치치 못하면(不) 바로 비(丕)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명수입니다." 감택선생은 탁자법(拆字法)으로 조비가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예측했고, 과연 조비는 그 후에 7년을 더 살고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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