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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소인물(6): 요화(廖化), 촉한의 명장

by 중은우시 2018. 1. 9.

글: 살소(薩蘇)


이런 말이 있다. "촉중무대장(蜀中無大將), 요화작선행(廖化作先行)". 실제로 삼국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요화는 삼국시대에 명장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가 명장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저 시운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요화가 명장이 되는 것은 우선 그의 무기를 보면 안다. 요화는 아주 독특한 무기를 썼다. 바로 삼쳠양인도(三尖兩刃刀). 이런 무기는 익히기 어렵지만 아주 독특하다. 보라 관우의 도, 장비의 모, 조운의 검, 황충의 궁, 여포의 극. 명장은 모두 독특한 무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아무렇게나 칼 하나를 들고 전쟁에 나서는 자라면 역사에서 쉽게 잊힐 수 있다. 고증에 따르면, 요화의 삼첨양인도는 당나라때의 저명한 무기인 맥도(陌刀)의 선구이다. 시대를 초월한 선진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만일 네가 기관총을 하나 들고 청나라로 간다면, 명장이 되기 싫어도 되었을 것이다. 요화가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년 앞선 무기를 들고 있었다면 명장이 되지 않으려고 하기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요화의 출신은 명장이 될 수 있는 중요 요소이다. 요화는 무릉 임원 출신이다(일설에는 호북 양번이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무릉설을 취하기로 한다). 이곳은 오늘날 호남 상덕이다.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풍족하다. 요화는 아마도 영양불량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생선을 많이 먹으면 머리가 잘 발달한다. 아마도 요화는 우매한 무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호의 요씨집안에는 총명한 인사들이 많다. 예를 들어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했던 요립(廖立), 그러나 그는 요화처럼 묵묵히 지내지 못했다.


자고로 이런 말이 있다; 무상불성군(無湘不成軍). 호남이 없으면 군대가 이뤄지지 않는다. 요화의 고향은 바로 이러한 명장의 고향이다. 천년이래 증국번이 나왔는데, 삼국시대에 요화 대장이 나오지 말란 법이 있을까?


요화는 명장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은 그의 경력에서도 증명된다. 요화가 무슨 대장을 참한 기록은 없는 것같다. 이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조자룡장군이 몇몇 명장을 죽였는가? 요화는 황건적과의 전투에서도, 그리고 형주에서 오위의 협공하에서도 그는 온전하게 목숨을 건졌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요화의 공격력은 혹시 낮을지 몰라도 수비력은 특히 도망능력은 아마도 천하무쌍이라는 것일 것이다. 최소한 요화는 아주 냉정하게 결단하는 두되를 가지고 있었다.


요화가 이런 자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원인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그의 식견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명장이 되는 큰 조건중 하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만일 적벽에서 주랑의 화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찌 삼군을 통솔할 수 있겠는가. 요화는 원래 황건적이었다. 그후에 촉한정권을 따른다. 형주에서 서천까지, 서천에서 한중까지, 그리고 관중에서는 전후로 장각, 유비, 관우, 제갈량, 관우를 모신다. 전쟁경험이 너무나 풍부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출신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무릉이다. 이곳의 무릉만(武陵蠻)은 바로 묘족의 조상이다. 치우씨의 후예이다. 치우가 패전한 후 부족은 하북일대에서 도망쳐 왔다. 호남으로. 이를 보면 패배하면서도 온전하게 보전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화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서 어려서부터 혼란중에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하하 물론 이것은 장난으로 하는 말이다.


역사상의 요화는 관우의 주부(主簿)였다. 전투때는 선봉에 섰다. 여포는 바로 주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관우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인물이니, 요화가 이런 자래에 앉았다는 것으로도 그의 가치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요화에 대한 사서의 평가는 "과열(果烈)"이다. 이는 아주 긍정적인 평가이다. 그는 형주를 잃은 후 거짓죽음을 설계하여 도망칠 수 있었고, 가족들까지도 모조리 데리고 간다. 강유의 중원정벌때는 기습전법을 건의하고, 관직은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에 이른다. 그는 지용을 모두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비의 군대내에서 요화는 부동(傅彤), 조융(趙融)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요순(廖淳)은 바로 그의 별칭이다. 강유의 군댕서는 장익(張翼)과 나란히 한다. 부동이나 장익의 무공을 보자면 요화가 대장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