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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소인물(3): 고람(高覽), 저평가된 원소의 부장

by 중은우시 2018. 1. 7.

글: 살사(薩沙)


고람은 일부 사서에서 "고환(高奐)"으로 적혀 있다. 원래 원소 휘하의 부장으로 안량(顔良), 문추(文醜), 장합(張郃)와 나란히 후세에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로 불린다. 관도지전에서 원소군의 오소에 보관하고 있던 군량이 조조가 친히 이끄는 정예부대에 기습을 당해 불타버린다. 원소는 한편으로 경기병을 보내어 오소를 구원하는 한편, 동시에 장합, 고람 두 장수에게 주력을 이끌고 조조군의 본영을 공격하게 한다. 전투에서 실패한 후, 고람은 장합과 함께 소속부대를 이끌고 조조에 투항하여 편장군(偏將軍), 동래후(東萊侯)가 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사서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면 장합은 조조에 투항 한 후에도 계속 병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투에서 여러번 뛰어난 전적을 거두고 공을 세워서 위나라의 "오자양장(五子良將)"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장합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고람은 그후에 아무런 소식이 없다. 전쟁터에서건 정치판에서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후로 역사의 긴 강에서 소실된 것처럼.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고람의 능력이 정말 장합과 그리 많은 차이를 보였단 말인가? 혹은 그가 더 이상 살육이 지겨워지고, 정치투쟁의 명창암전(明槍暗箭)과 이우아사(爾虞我詐)가 지겨워져서 강호에 은퇴하여 여생을 편안히 보낸 것일까?


확실히 이런 의문은 기나긴 역사에 매몰되어 진상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유한한 사료기재에서 출발하여 고람이 왜 그렇게 되엇는지를 추측해보기로 하자.


가능성의 하나는 고람의 집안이다. 그는 아마도 하북의 명문거족 고가(高家)의 일원일 것이다. 고간(高干)등과 일족일 것이다.


고간은 원소의 외조카이다. 일찌기 원소의 휘하에서 북방사주중 하나인 병주목(幷州牧)을 지낸 ㅏ 있다. 원소의 세 아들이 각각 나머지 3주의 주목을 지냈으니 지위는 그들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고씨집안의 하북에서의 지위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원씨집안의 "사세삼공(四世三公)"에 못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원소는 그와 정략결혼했고, 두 가족의 힘으로 북방사주를 통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조가 북방을 차지할 때, 왕왕 현지의 명문거족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쓰고, 그들의 재산을 남겨주고 인심을 얻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방의 정치국면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조는 일반적으로 이들 지방명문거족세력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력을 너무 크게 떨치는 것을 경계했다. 일단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수습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조조가 나중에 형주에서 한 일을 보자. 비록 처음에는 수군장수가 부족한 곤경을 벗어나기 위하여 부득이 채모(蔡瑁), 장윤(張允)으로 하여금 계속 형주군대를 지휘하게 하지만, 나중에 일단 이유를 찾자마자 자신의 심복으로 바꾼다(<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주유의 반간계에 걸려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고 나온다). 기실 이런 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군주가 군대를 자신의 손에 확실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휘하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어렵다. 그래서, 만일 고람이 절망 고씨집안의 사람이라면, 조조는 그에게 계속 병권을 휘두르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가 고씨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씨라는 것만으로도 조조의 의심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거꾸로 장합은 이런 방면의 우려가 없었다. 그는 빈한한 집안 출신이고, 그의 뒤에 무슨 혁혁한 대가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조는 대담하게 발탁하고 임용한 것이다. 그래서 장합은 조조에게 투항한 후 계속 군대에 남아있을 수 있었고, 계속 그의 군사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고람은 그저 관직이 오르고 제후에 봉해지기만 한다. 표면적으로는 관직도 높고 봉록도 많았지만, 실제로는 한직이다. 군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고람은 정치적인 안목이 있는 것이다. 그는 형세를 잘 읽었고, 물러날 줄 알았다.어떻게 하여야 주군의 마음에 드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그가 이런 것을 모르고 계속 군권을 가지고 놓지 않으려 했다면 아마도 살신지화를 불러왔을 것이다.


당연히, 이상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고람이 고간의 친족이고, 고씨집안의 일원이라는 사료의 방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원인이 아니라면, 조조가 더 이상 그에게 군대를 맡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고람의 능력문제라고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 설명해야할 것은 "하북사정주"라는 명호는 사서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장국량(張國良)의 <평화삼국(評話三國)>에 나오는 개념이다. "하간사장(河間四將)"이라고 쓰기도 한다. 중국전통문화에서는 특별히 "사(四)"를 숭상한다. 그래서 "사대전신", "사대금강", "사대미녀", "초당사대가"등의 말이 있는 것이다. 근대에도, "사대명단(四大名旦)", "사대재자", "민국사공자"등의 말이 있다. 이를 보면, "사"라는 숫자는 자주 비교적 빛나고 대단한 사람이나 사건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어떤 때에는 어떤 물건을 형용하기 위하여 숫자를 "사"로 맞추어서 패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평서에서 고람을 안량, 문추, 장합과 나란히 "하북사정주"라고 불렀다. 이는 극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그가 앞의 세 사람과 동급의 인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유한한 사료를 기준으로 보면, 고람은 원소의 군내에서 그저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장군일 뿐이다. 능력이 아주 두드러진 것은 아닐 것이고, 최소한 장합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삼국지.위서.장합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장합은 원래 원소 휘하에서 전적이 아주 뛰어나고, 특히 공손찬을 평정하는 전투에서 공을 적지 않게 세웠다(원소는 장합을 교위로 삼아 공손찬을 막게 한다. 그는 공손찬을 무너뜨리는데 공이 많아서 영국중랑장이 된다.) 이는 장합은 확실히 능력있는 장수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대장의 재목이다. 고람의 이전 전적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삼국연의>에서 허구로 그가 허저와 1:1로 싸웠다고 적엇다(허저가 칼을 휘두르고 말을 몰아 바로 앞으로 나가서 싸웠다. 고람이 창을 들고 나가서 맞이한다).


그래서, 고람의 군사능력이 아마도 정말 별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장합과 비교하여 많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게다가 성격이 상대적으로 평범하여 개성도 없엇을 것이다. 그래서 장합은 '임인유현(任人唯賢)'의 조조에게 중용되고, 잘나가지만, 고람은 인재가 많은 환경하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고, 결국 사서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아마도, 고람이 조조에 투항한 후 조용해진 이유는 이런 것들일 것이다. 그의 출신문제이거나 그의 능력문제이거나. 다만 이런 것이 사서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저 내가 추측한 것일 뿐이다.


확실히 우리는 고대에 사서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기록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럴 시간도 정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어떤 것은 수수께끼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후인들이 추측하고 상상항 공간이 생기는 것이니까.


참고: 삼국시대에 많은 인물들은 사서에 최후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관도지전 및 그 후에 조조에게 투항한 하북장수들 여광(呂曠), 여상(呂翔), 초촉(焦觸), 장남(張南), 마연(馬延), 장의(張顗) 여기에 고람까지 합쳐서 총7명은 모조리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 없다. 오히려 나관중(羅貫中)이 <삼국연의>에서 이 7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안배했다. 이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것에 부합한다.


여광과 여상은 신야로 진공할 때 조운과 장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초촉,장남, 마연, 장의의 이 몇몇 인물은 일찌기 조운과 장판파에서 만난다. 나중에 동오와 전투할 때, 초촉은 한당에게 피살되고, 장남은 주태에게 참해지고, 마연과 장의는 감녕의 칼아래 죽임을 당한다. 고람은, <삼국연의>를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조조를 따라 여남에서 유비를 막을 때, 몇회합만에 유벽(劉辟)을 참하지만 조운의 기습에 말아래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허저의 칼을 막아냈으면서, 왜 조자룡의 창을 막아내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소설의 허구이다. 나관중이 원소진영에서 투항한 장수들로 하여금 각각 맹장들의 칼아래 죽는 것으로 안배한 것이다. 목적은 그저 스토리전개상의 필요 때문이고, 책에서 두드러지게 해야할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을 써야할 곳에 다 쓴다"는 식이다. 이것도 예술적 가공에서 상용수단중 하나이니,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