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명청사(明淸史)를 잘 아는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청나라는 1616년에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고 하였고, 여진족의 한 갈래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건립했다. 이 정권은 중국을 통치하기 전에, "황조"를 이루기 전에, 중국의 지방소수민족 자치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청(前淸)과 만명(晩明)은 동시에 존재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30년동안 명나라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고, 청나라는 명을 따라잡고 다시 넘어섰으며, 결국은 명나라를 대체한다. 이는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3대 국가지도자의 자질에서 비롯된다.
1.
만력제(萬歷帝) 주익균(朱翊鈞) vs 금대칸(金大汗) 누르하치(努爾哈赤)
1616년, 명청 두 나라의 재위황제들이다.
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비슷하다. 만력제가 53세, 누르하치가 57세였다. 모두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섰다. 고대에는 노인에 속한다. 인생경력과 정치경력이 모두 적지 않은 나이이다.
다만, 정치포부와 정신상태에서 그들의 차이는 분명했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지만, 기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력제는 바로 이런 상태였다.
이 만력제에 대하여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익숙할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끝에서 네번째 황제이다. 명신종(明神宗)이라고도 불린다. 본명은 주익균이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크지 않고, 역사적으로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명나라황제로서 두 가지 역사기록을 세웠는데, 하나는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는 것이다. 바로 48년이나 된다. 둘은 업무를 보지 않은 기간이 가장 길다는 것이다. 28년간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만력년간에 많은 대신들은 관직에 나서서부터 은퇴할 때까지 황제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 국가지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지도 못했다.
확실히, "게르음"은 이 황제의 첫번째 특징이다.
"게으름"외에 또 하나 "어리석음"이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스승이자 명나라때 유일하게 정치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장거정(張居正)을 대한 것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엿볼 수 있다. 장거정의 "고성법(考成法)", "일조편법(一條鞭法)"등 개혁은 확실히 명나라에 영원히 퇴색되지 않는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만력제는 이를 폐지한다. 멍청하면서도 부지런한 황제는 쓸모가 없지만, 멍청하면서도 게으른 황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만력제는 바로 후자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그의 적수인 누르하치는 촌음을 아껴가며 "석시여금(惜時如金)"했던 인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현명한 인물이었다. 부지런하면서도 현명했다. 성공하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누르하치의 성공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부지런함. 둘째는 응집력이다. 그의 성공역사를 보자. 25세의 누르하치는 그저 중급장교일 뿐이었다.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 그는 조부 각창안(覺昌安)이 남겨놓은 13벌의 갑옷을 물려받아 단련할 때 병력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만, 30여년의 시간동안 힘들게 노력하여, 이 중급장교는 건주여진의 각부족을 통일하였다. 그가 의지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부지런함과 응집력. 명나라말기 여진의 각부족 우두머리는 모두 부족을 통일하여 영웅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재능, 군사재능은 누르하치에 훨씬 못미쳤다. 그는 죽기살기로 덤비는 정신과 끈기있는 의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처음에 100명도 되지 않던 군사를 금방 여진 여러부족중 가장 강대한 군사력으로 발전시킨다. 누르하치의 성공은 전투를 통하여 하나하나 얻어낸 것이다. 그는 호소력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매번 전투를 할 때마다 그는 앞장서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전쟁후에 상을 내릴 때는 각 부족을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무릇 귀순하면 바로 관직을 주고, 관용을 베풀어 모두가 단결하도록 했다. 이런 행동과 말은 상당한 호소력, 응집력을 지녔다. 황제로 되는데 충분한 인망을 갖추게 된다.
이런 위망을 어찌 어리석고 게으른 만력제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2.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 vs 후금 2세칸 홍타이시(皇太極)
이들은 1626년 명,청 양국의 최고지도자이다.
주유교는 25세이고, 홍타이시는 34세이다. 나이가 그다지 많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치수준은 차이가 아주 컸다.
주유교는 기본적으로 집정능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였다. 그는 준문맹의 문화수준을 지녔다. 내각에서 초안한 성지조차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부득이 국가대사를 모조리 곁에 있던 태감(太監)들에게 넘겨버린다. 웃기는 일이라면, 그가 가장 신임하던 병필태감(秉筆太監) 위충현(魏忠賢)도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반문맹인 인물은 높이 황제의 보좌를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순문맹은 황제의 붓역할을 하면서 황제를 대신하여 주비(朱批)를 쓴다. 이게 어찌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명나라때 중국정치의 사실이다.
명나라의 끝에서 두번째 황제인 천계제는 왜 이렇게 자질이 엉망이었을까?
얘기하자면 전부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성장환경때문이다. 왜냐하면 부친인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만력제 주익균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주유교라는 황장손(皇長孫)도 자연히 만력제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죽을 때 그는 비로소 황태손(皇太孫)에 책봉되고, 정식으로 스승에게 글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금방 공부를 시작해서 1달도 되지 않아 그의 부친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황권의 합법성을 따져서 그가 황제의 자리를 넘겨받게 된 것이다. 이를 보면 그는 황제로서의 지식이나 심리적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주유교는 나이 겨우 16살이었다.
16세의 주유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청년이었지만, 그의 문화수준은 초등학생보다 못했다. 얼렁뚱땅 국가의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후의 7년동안 그의 심지(心智)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놀이였다. 사료에 따르면, 그가 황제가 된 후 7년동안 글을 읽지도 않고, 상소문을 읽지도 않고, 군기를 살펴보지도 않았다. 가장 좋아한 것은 목공일이다. 매일 목공방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소한 가구나 놀이기구를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 황제야말로 천하제일목수라고 말한다. 솜씨가 노반(魯班)에 못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목조공예품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그의 목공실력이 송휘종의 서화처럼 그다지 일류는 아니었던 것같다. 사서에 따르면 그의 목제품은 "뛰어난 장인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추켜세워준 것이고, 언과기실(言過其實)한 것일 것이다.
명나라의 끝에서 두번째 황제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적수인 적국의 앞에서 두번째 황제는 어떤 수준의 인물이었을까?
홍타이시는 누르하치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여덟째이다.
유목민족은 "중무경문(重武輕文)"하는 전통이 있어서, 그의 문화수준은 주유교보다 그다지 많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책과 실전을 결합시킬 줄 알았다. 확실히 능력이 뛰어났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어렸을 때, 홍타이시는 공부를 통해서 만주어를 통달하고 한문도 어느 정도 익혔다. 특히 명나라사람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연의>를 즐겨 읽었따. 심지어 주화입마의 지경에 이르러, 일처리를 하면서 자주 삼국인물을 본받았고, 그것을 아주 잘 활용했다.
홍타이시는 누르하치가 아끼는 아들이지만, 그는 편안하게 살면서, 집안에서 향락이나 음주만 즐기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여진족 소년과 마찬가지로 5,6세부터 말타고 활쏘는 것을 배우고, 8살부터는 산 속을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했다. 홍타이시는 12살때부터 집안일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의 가정관계는 아주 복잡했다. 홍타이시는 10여명의 서모가 있었고, 16명의 형제가 있었고, 8명의 자매가 있었다. 여기에 막료, 호위, 문서보는 사람까지 합쳐서 모두 홍타이시가 관리한 것이다.
대가정을 다스리면서 홍타이시는 풍부한 관리경험을 쌓는다. 그리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세상과 인심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뛰어난 관리능력을 갖추어 간다.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그의 정권은 이미 다원적인 부족을 가진 국가가 되어 있었다. 홍타이시가 직면한 것은 바로 내부갈등이 복잡하고 대립이 날로 첨예해져가는 국가였다. 그는 한편으로 누르하치가 창제한 팔기제도를 계속 발전시키고, 만주팔기외에 몽골팔기와 한군팔기를 만든다. 이렇게 각 민족의 인구를 모조리 팔기제도에 편입시킨다. 각각의 민족의 습속에 맞추어 통치하고, 한인으로 하여금 한인을 다스리고, 몽골인으로 하여금 몽골인을 다스리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여진족에 대하여는 그의 칸의 권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만주어와 기마궁술로 민족동질성을 만들어간다. 한 정치인물의 표지는 전략적인 안목이다. 홍타이시는 바로 이런 안목을 갖추었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북경을 취하는 것은 큰 나무를 베는 것과 같다. 먼저 양쪽에서 베어가면 큰 나무는 스스로 쓰러진다." 이를 보면, 그의 정치,군사수준은 전술가가 아니라 전략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는 청군의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차지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대통일전략은 임종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명은 황실의 목수이고, 한 명은 전쟁터의 거장이다. 둘을 같이 비교할 수조차 없다.
3.
숭정제(崇政帝) 주유검(朱由檢) vs 전청 섭정왕(攝政王) 도르곤(多爾滾)
이들은 1644년 명,청 양국의 최고지도자이다.
주유검은 33세, 도르곤은 32세이다. 도르곤이 주유검보다 1살이 어리다. 그러나 그의 위세는 주유검이 미칠 바가 못된다. 한 명은 영토를 확장한 영명한 군주이고, 다른 한 명은 강산사직을 잃은 망국지군이다.
숭정제 주유검이 죽기 전에, 대명의 강산은 이미 갈기갈기 찢겼고, 수하의 대신들은 속속 도르곤에게 투항했다.
그렇다면, 숭정제와 도르곤의 차이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지도자로서 가장 중용한 것은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쓰는 능력일 것이다.
숭정제의 통치시기에, 대명은 엄중한 '인재유실'이 나타난다. 우리는 숭정제를 대신하여 한번 계산해보기로 하자. 숭정제가 집권한 후, 노상승(盧象昇)부터 원숭환(袁崇煥)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고굉지신(股肱之臣)을 잃어야 했던가
1627년부터 1644년까지, 숭정제가 재위한 17년간, 앞뒤로 50명의 내각구성원이 바뀌고, 14명의 병부상서가 바뀐다. 죽여버리거나 압박을 받아 자결한 독사총독(督師總督)이 11명에 이른다. 순무(巡撫)는 11명을 죽이고, 1명이 자결한다. 그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구타당하고, 간접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거나, 전사하거나 자살하거나 형을 받은 고위관리가 수십명에 달한다. 숭정14년 즉 망국 3년전에, 감옥에 갇혀 있는 대신급의 인물이 145명에 달한다. 이 숫자는 당시 대신급의 관리들 중 10%가량에 해당한다. 즉 숭정은 자신의 신하 10명중 1명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숭정제 시기를 되돌아보면,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숭환, 조대수(祖大壽), 노상승, 손전정(孫傳庭)등등. 모두 걸출한 장수이다. 문관들 중에서는 문진맹(文震孟), 유종주(劉宗周)등등이 모두 쓸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최후는 모두 비극이었다. 홍타이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원숭환과 직언으로 조정에 유명했던 한림원 서길사 정만(鄭鄤)은 모두 천도만과(千刀萬剐)의 혹형을 받고 죽었다. 전쟁터에서 고영상(高迎祥)을 포로로 잡고 하마터면 이자성의 군대를 전멸시킬 뻔했던 노상승과 손전정은 참언을 받아 한명은 중벌을 받고 한명은 3년이나 감옥에 갇힌다. 결국은 감군태감의 엉터리 지휘에 두 사람은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만다. 죽을 때 노상승은 39세이고, 손전정은 51세에 불과했다.
능력있는 신하의 운명을 보면 군주의 인품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숭정제는 뜻은 컸지만 재능은 없었다. 심성이 의심이 많고 생각을 자주 바꾸었다. 이상과 능력이 심각한 불일치를 보인 것이다. 더욱 문제였던 것은 그가 부지런했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을 많이 만드는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런 지도자의 아래에서 신하들이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희생, 하나는 투적(投敵). 결국 이런 군주와는 오래 같이 있을 수 없다. 오래 같이 있다보면 참혹하게 죽는 길 뿐이다.
숙장 노상승을 놓고 보면, 숭정제의 중용은 받았지만, 숭정제의 신임은 못받았다. 숭정이 그를 파견하여 전투에 참가할 때는 병권을 다 내주지 않았다. 노상승은 당당한 총독이면서, 그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던 인마는 겨우 6천명이었다. 이 인원으로 국가대 국가의 전투에서 어떻게 승리한단 말인가? 결국 이 고굉지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죽는 일 뿐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조정에 돌아가면, 자신은 언젠가 "제2의 악비"가 될 것이라는 것을. 결국은 주군에 의하여 멍청하게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는 것을. 차라리 전쟁터에서 전사하는게 낫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문관이 재물을 탐하지 않고, 무장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천하는 태평하다고. 그러나, 황제로서 고굉지신의 마음이 죽어버리게 만들면, 결국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멀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설사 홍승주(洪承疇)와 같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신(貳臣, 명청 두나라를 섬긴 신하를 이렇게 부름)도 숭정의 압박을 받아서 피치못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홍승주는 알고 있었다. 패전한 후에 돌아가면 절대로 숭정제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차라리 방향을 바꾸어 투항하는게 낫다는 것을.
주군의 스타일은 신하의 업무스타일을 결정한다. 숭정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쓰면서 믿지 않고, 사람을 쓰면서도 항상 바꾼다. 이런 황제는 일을 성공시킬 수 없다. 대신은 안전감이 없고, 조정의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보신하기에 바쁘다. 공을 세우기를 바라지 않고, 과를 만들지 않기만 바란다. 이것은 주군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복무상한 군주의 밑에서는 '희생'만이 가장 좋은 평을 얻어낼 수 있다. 숭정제는 신하들이 '희생'으로 황은에 보답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만일 네가 '희생'하지 않는다면, 상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최후가 좋을 수도 없다.
이런 변태정인 '희생숭배'의 분위기하에서, 대신은 황제에 의해 망쳐지기를 원치 않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편으로 짐짓 '희생준비장'을 써서 제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살길을 찾는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아무런 가치없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본능적인 반응이다. 대신들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책임을 묻는다면 마땅히 숭정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르고, 대신들에게 너무 높은 댓가만을 요구했던...
도르곤은 어떠했는가? 그는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쓰고, 사람의 마음을 회유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고수였다.
청병입관을 주재한 사람으로서, 도르곤의 인심회유능력은 가희 일류라 할 수 있다. 오삼계(吳三桂),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상가희(尙可喜)의 4명 한신(漢臣)에 대하여 회유능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홍타이시의 곁에서 성장하면서 몸으로 교훈을 얻은 도르곤은 어떻게 한족관리, 한족장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해야하는지를 깊이 깨달았다. 그의 형인 홍타이시는 숭정의 총신인 홍승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부인인 효장까지도 내보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장비는 홍승주가 감금되어 있던 삼관묘에서 전후로 며칠 밤낮을 머물렀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홍승주의 투항을 얻어낸다. 어떤 사람은 장비가 하루낮밤에 해결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는 홍타이시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뭐든지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누라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장부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천하를 얻기 위해서라면 일체의 댓가를 다 내놓을 수 있다는 또 다른 패도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도르곤은 이를 보며 자란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배워간다.
홍타이시가 죽은 후, 그는 형수 효장을 '승계'하였을 뿐아니라, 형의 농인술(籠人術)을 노화순청으로 발전시킨다.
도르곤은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을 정복하려면, 반드시 형인 홍타이시의 전략을 승계해야 했다. "이한공한(以漢攻漢)" '한간(漢奸)'의 역량을 이용하여 명나라벙부군과 농민군의 항거를 물리쳐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한인들이 죽어라 청나라황실을 위하여 목숨바치게 할 수 있을까?
도르곤에게는 수완이 있었다. 첫번째는 봉관허원(封官許願). 청병입관후, 도르곤은 명나라의 4대항장을 왕에 봉한다. 오삼계는 평서왕(平西王), 공유덕은 정남왕(定南王) 경중명은 정남왕(靖南王) 상가희는 평남왕(平南王). 각각에게 금책금인을 수여하고, 호화로운 의장을 거행하며 성대한 의식을 행하면서 '사왕'을 위하여 친히 상을 내린다.
두번째는 난심관회(暖心關懷). 통일전쟁이 지속될 때 도르곤은 특별히 오삼계에게 당부한다. 앞으로 전투를 할 때, "그저 지시만 내리고 앞장서서 싸울 필요는 없다." 도르곤은 조정을 대표하여 이런 지시를 내린다. 오삼계와 같은 한족장수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청나라조정이 그들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아끼고 있는지.
새로운 주인이 높이 평가해주고 아껴주다보니, 명나라의 항장인 오삼계등의 몸값은 몇 배로 불어난다. 그러다보니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운다. 그들은 과연 도르곤과 조정의 고심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한멸한으로 국면을 신속히 개척한다. 후기에 천하를 평정하는데는 거의 대부분 한족 장수와 한족관리들이 나선다. 그들은 새로운 주군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전투를 하고, 서로 협조했다. 마침내 만만치 않았던 항청세력을 진압해낼 수 있었다. 일거에 건주여진을 위하여 근 300년의 강산을 마련해준 것이다. 도르곤은 이렇게 하여 부형이 그에게 맡긴 대업을 완성한다. 갑신년에 중국정권이라는 이 과실을 얻어낸 것이다.
전청과 만청의 3대 국가지도자의 자질을 비교한 것을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계시를 얻을 수 있을까?
큰 방면에서 보자면, 개략 이런 계시일 것이다: 만일 적합한 사람을 적합한 위치에 배치한다면, 특히 연속 3번 국가최고지도자로 선발되게 한다면 한 민족의 비약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다. 반대라면, 한 민족은 억겁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
.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창제(泰昌帝): 명나라의 최단명황제 (0) | 2018.02.15 |
---|---|
이성량(李成梁): 누르하치를 생포한 적이 있는 대명의 명장 (0) | 2018.01.17 |
여리(黎利): 안남(安南)을 월남(越南)으로 바꾼 여조(黎朝)의 창업자 (0) | 2017.11.30 |
탕화(湯和)는 어떻게 선종(善終)할 수 있었는가? (0) | 2016.01.05 |
왕양명(王陽明): 삼불후(三不朽) (0) | 201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