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이성량(李成梁): 누르하치를 생포한 적이 있는 대명의 명장

중은우시 2018. 1. 17. 17:04

글: 육기(陸棄), 손옥량(孫玉良)





대명왕조의 명신종(明神宗) 만력제(萬歷帝) 주익균(朱翊鈞)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깡패황제"이고, 역사학자들도, "명나라가 망한 것은 명목상으로는 숭정제때 망했지만, 실제로는 만력제때 망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역사상 주익균은 그다지 무능하지 않았다. 그는 명나라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고, 재위기간동안 "장거정개혁"도 있었고, "만력중흥"도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두 명의 명장을 기용하는데, 동북에는 "이성량(李成梁)" 동남에는 "척계광(戚繼光)" 그들이다. 이리하여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이 나타나서, 몽골이든, 여진이든 아니면 일본의 왜구이든 대명의 영토로 침범해 들어오지 못했다. 경제적으로도 전세계에서 앞서갔다. 이때는 영국도 명나라앞에서는 큰소리칠 수 없는 정도이다. 대명이 실질적으로 만력제때 망했다는 것은 기실 그의 휘하대장 이성량이 누르하치의 부친과 할아버지를 죽이고, 누르하치는 살려보내어 만청의 굴기에 화근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량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불세의 공신(不世之功臣), 천추의 죄수(千秋之罪首)"이다.


이성량의 신분을 얘기하자면, 그를 중국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한국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조적(祖籍)을 따진다면, 그는 당황실의 종친인 이연, 이세민과 같은 일맥이니 정통중국인이고, 섬서사람이다. 그러나 당나라말기의 전란으로 이성량의 선조는 조선으로 도망친다. 그리하여 '조선국적'을 가졌다. 그래서 이성량의 조적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량의 고조부인 이영(李英)은 나중에 한반도에서 요녕(遼寧) 철령(鐵嶺)으로 이주하여 대명의 관직을 받는다. 바로 철령위지휘첨사(鐵嶺衛指揮僉事)이다. 이성량은 바로 철령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그는 '인조귀종(認祖歸宗)'하여 다시 중국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영부터 시작하여 이씨집안은 철령위지휘첨사를 세습한다. "첨(僉)"은 무슨 뜻인가? 보조(輔助)라는 의미이다. '첨사'는 지휘를 보조하는 것을 가리킨다. 군사적으로는 부지휘관이다. 명나라때의 명장 척계광은 18세때 세습되는 등주위지휘첨사(登州衛指揮僉事)가 된다. 일반적으로 훈련, 군기등을 나누어 맡는다. 현재의 부사령관 혹은 참모장에 해당한다. 이성량의 부친인 이경(李涇)도 철령위지휘첨사를 지낸다. 이건 그다지 높지 않은 관직이다. 그래서 이씨집안의 사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성량이 40세 불혹의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생원(生員) 신분으로 부친의 직위를 물려받아서 이 첨사를 한다. 생원은 바로 수재(秀才)이다. 그러나 이성량의 이 수재는 보통의 수재가 아니다.


그는 "영의효건(英毅驍健), 대유장재(大有將才)"인 수재였다. 그는 처음에 험산참장(險山參將)으로 전공을 많이 세워서 융경원년 부총병관(副總兵官)으로 승진하여 요양(遼陽)을 협수(協守)한다; 융경4년에는 요동도독첨사(遼東都督僉事)로 발탁되어 광녕(廣寧)에 주절(駐節)한다. 융경5년, 서도독동지(署都督同知)로 승진하며, 천호(千戶)를 대대로 세습하게 된다; 만력3년에는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어 금의천호(錦衣千戶)를 세음(世蔭)하게 된다. 만력6년, 태보(太保)에 봉해지며 본위지휘사(本衛指揮使)를 세음하게 된다. 공로로 영원백(寧遠伯)에 봉해진다. 마지막에는 모질지년(耄耋之年, 8,9십세)에 이르러, 명나라조정은 여전히 이성량을 기용하여 요동(遼東)을 진수(鎭守)하게 하며 태부(太傅)에 봉한다. 40세부터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하여, 90세에 서거할 때까지 이성량은 몽골인 여진인과 50년을 싸웠다. 북경에 있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북방의 변방을 40여년간 종횡했다. 역사서에서는 이성량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이성량은 요동을 22년간 지켜냈고, 전후로 대업을 고한 것이 10번에 이른다." "변방 장수의 전공이 많은 것이, 명나라 이백년이래 없던 일이다."


이성량이 대적인 두 종류의 사람은 하나가 몽골인이고 다른 하나가 여진인이다. 이성량이전에, 명나라의 요동장수는 연이어 패배하고, 3명이 전사한다. 이성량이 요동의 지휘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이씨집안은 '철령위지휘첨사'를 지낸다는 한계를 벗어나 전투에서의 승리를 가지고  요동의 병권을 얻어냈다. 명나라조정에 영향이 큰 전투의 하나는 이성량이 청태조 누르하치의 외조부인 왕고(王杲)부자와의 전투이다. 왕고는 건주여진의 두령이고, 동시에 명나라조정에서 건주우위도독(建州右衛都督)으로 책봉된 인물이다. 이 왕고는 어찌된 일인지, 대명에서 내린 관직은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후로 무순비어(撫順備御) 팽문수(彭文洙), 부총병(副總兵) 흑춘(黑春), 지휘(指揮) 왕국주(王國柱), 진기부(陳其孚), 대면(戴冕), 왕중작(王重爵), 양오미(楊五美), 파총(把總) 온란(溫欒), 우란(于欒), 왕수렴(王守濂), 전경(田耕), 유일명(劉一鳴)등 수십명을 죽인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이성량은 부대를 이끌고 발호하던 왕고를 격패시킨다. 이번 전투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슈르하치(舒爾哈齊)는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이성량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그들을 거두어 노비로 부린다.


이성량의 외조부인 왕고는 그들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괴였기 때문이다. 북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한다. 그러나 왕고의 아들 아태(阿台)는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서 계속 명나라와 싸운다. 이성량은 다시 아태를 정벌한다. 아태가 누구인가? 누르하치의 외숙이다. 이때 누르하치의 부친 탑극세(塔克世)와 누르하치의 조부 각창안(覺昌安)은 이미 이성량에 귀순했고, 명을 받아 고륵채(古勒寨)로 가서 아태에게 명군에 투항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이성량의 부장 니감외란(尼堪外蘭)이 진공하게 하기 위하여 아태를 속여 성문을 여는 것을 책임졌다. 성을 함락시킨 후 잔인한 도살이 이어지는데, 이번 대규모 도살에서 아태는 피살되고, 누르하치의 부친과 조부도 난전중에 목숨을 잃고 만다.


만일 누르하치의 외조부와 외숙은 죽어마땅하다고 하지만, 탑극세와 각창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잔혹하게 도살된다. 이로 인하여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부친을 죽인 원수가 된다. 부친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다. 누르하치는 나중에 명나라에 반기를 들면서 "칠대한(七大恨)"을 내놓는데, 첫번째 한이 바로 부친을 죽인 원한이다. 이성량은 변방수비의 공이 있지만 그는 탑극세와 각창안을 잘못 죽이는 우를 범한다. 이는 확실히 크게 잘못한 것이다. 만일 명나라의 이익을 보호하려면, 이성량은 참초제근으로 누르하치까지 죽여버렸어야 한다. 그랬다면 만청입관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성량은 누르하치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부인지인(婦人之仁)이 발동하여 살려준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누르하치)와 그 동생(슈르하치)눈 병간(兵間)에 있지 않았다. 이성량의 처가 그들의 용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 몰래 풀어주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성량의 처가 몰래 그들을 풀어준 것이다. 이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누르하치가 도망친 후,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공격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누르하치의 여진부가 확장하도록 종용한다. "상소를 올려 누르하치에 관직을 내리도록 청하고," "영토를 주어 그들을 회유했다" 다른 몽골부락, 여진부락은 이성량에게 패배했지만, 유독 누르하치에 대해서는 이성량이 못본척 못들은척 했다. 이는 명나라의 멸망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성량은 전공이 혁혁한데, 그는 다른 공로가 높다고 자만하는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귀극이교(貴極而驕), 사치무도(奢侈無度)"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패전을 감추고, 양민을 죽여서 군공을 사칭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언관들의 탄핵을 받아서 한때는 파관면직된다. 그러나 이성량이 빠진 변방은 태평하지 못했다. 이성량이 변방을 떠난 10년동안, 8번이나 총사령관이 바뀌는 사태가 벌어진다. 조정은 할 수 없이 이성량을 76세의 고령임에도 다시 기용하게 된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그의 위세는 남아 있었다. 이성량이 노년에 변방을 지킨 8년동안, 몽골, 여진부락이 변방을 침범하는 일이 적었다. 이 기간동안 요동에서 비록 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성량이 두 가지 일처리를 잘못하게 된다. 하나는 누르하치가 여진부를 확대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명나라조정에 숨은 화근을 남겼다. 둘째는 그가 스스로 개척했던 관전육보(寬田六堡)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유로 댄 것은 관전육보다 해외에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어서 방어하기가 쉽지 않아 돈과 군량이 많이 들어 철수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전육보에서 철수한 것은 이 좋은 땅을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스스로 요동의 '장성'을 무너뜨린 셈이다. 이 두 가지 잘못으로 이성량은 평가에서 포폄이 반반인 인물이 된다. 변방을 지켜낸 영웅이면서 또한 명나라를 망하게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명나라의 장수 웅정필(熊廷弼)은 이성량을 탄핵하면서 그의 죄는 죽여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제는 그래도 이 명나라변방안전에 불세의 공을 세운 늙은이를 좋아했고, 그를 징벌하지 않았다. 


이성량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는데 모두 영웅본색을 지녔다. 특히 그의 장남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때 명나라군대를 지휘하여, 명성이 이성량보다도 높아, 부친의 명성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