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묵지효(靜默之鴞)
월남이라는 나라를 얘기하게되면 아마도 교지(交趾), 안남(安南)등 일련의 나라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명나라때는 명나라가 잠시동안 월남을 통치한 적도 있다. 중국명왕조와 와 안남과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부득이 아주 유명한 한 사람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는 바로 당시의 안남을 이끌고 명왕조의 통치에서 독립한 여조의 건립자인 여리이다.
영락제시기에 명왕조는 군사행동을 통하여 당시의 안남을 독립국가에서 자신의 성으로 집어삼텼다. 여리는 남산(藍山) 지구의 호족 출신으로 명왕조 통치시기동안 당시의 많은 안남호족과 마찬가지로 명왕조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명왕조의 안남지역통치는 계속하여 반발에 부닥쳤다. 여리가 아직 거병하기 전에, 안남의 명나라군대는 반료(潘僚), 정공증(鄭公證)등의 반란을 진압한 바 있다. 확실히 오랫동안 독립해있던 안남지억은 더 이상 중원왕조의 통치에 굴복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지내고 있던 여리는 암중으로 여러 호족과 유민을 집결시켜 결국 남산향에서 정식으로 거병하여 명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스스로 "평정왕(平定王)"이라 칭한다.
그러나, 안남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이러한 현지인들의 거병을 그저 매번 있던 일 정도로 여겼다. 여리가 남산에서 거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명나라장수 마기(馬琪)는 즉시 병력을 이끌고 진압에 나선다. 여리는 스스로 자신의 군대가 명군과 정면으로 싸우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 하면서, 명군을 낙수(洛水)까지 유인한 후, 숨겨둔 매복으로 명나라군대를 격패시킨다. 그러나 그 후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남산을 버리고 영산(靈山)으로 옮겨간다. 도중에 명군의 추격을 받는다. 그래서 영산에 도착한 후에는 여리의 군대는 이미 절반 정도 인원손실을 입었다.
비록 명군이 전투격에서는 확실히 이들 안남의 반란군보다 앞섰지만, 안남을 병합한 후, 명군의 주력은 이미 안남을 떠났다. 그래서 여리가 비록 손실이 참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산 일대에서 점차 회복하고 병력을 키운다. 그후 여리는 명군과 계속하여 전투를 벌인다. 여리는 현지의 지형을 잘 활용하였고, 명군은 이 지역을 잘 몰랐다. 그리하여 쌍방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여리는 이 시기에 나중에 여조(黎朝)의 중신(重臣)이 되는 완천(阮薦)의 투항을 받아서 부하로 거둔다.
선덕초년, 교지총병관 풍성후 이빈(李彬)이 병사한다. 그리고 영창백 진지(陳智), 도독 방정(方政)이 대신하여 다스린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이 직무를 감당할 인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여리는 이때부터 세력을 키운다. 여기에 여리는 부하들을 엄격히 단속하여 당시 안남인들은 그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된다. 이와 상대적으로, 영창백 진지는 진사출신으로 병법을 몰랐다. 그리하여 여리에게 여러번 패배당한다. 여리는 이로 인하여 안남의 남부지역을 손에 넣는다. 진지는 선덕제로부터 삭탈관직의 징벌을 받는다. 그후 성산후 왕통(王通)이 정이장군인(征夷將軍印)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안남으로 들어간다. 이때는 마침 여리의 동생인 여선(黎善)이 동관성(東關城)즉, 지금의 하노이를 공격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왕통은 동관성의 포위를 풀어준 후, 즉시 대군에게 길을 나누어 출격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안남군을 기습하여 격패시킨다.
그러나 지형을 잘 알지 못하기 대문에, 왕통이 부장들과 회합한 후, 즉시 여리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쌍방은 줄동(崒洞) 축동(祝洞)전투에서 크게 전투를 벌이고, 명군이 대패한다. 왕통은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겨우 목숨은 건진다. 이 전투가 가져온 결과는 바로 여리가 연해의 요지와 강들의 사류와 운하항구를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명군은 북방의 몇개 도시로 밀려난다. 왕통은 이때의 국면에 대하여 절망을 느낀다. 지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남의 밀림에서 명군은 언제든지 안남인들의 기습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몰래 여리와 화의를 시도한다. 쌍방이 청화(淸化)를 경계로 하는 것이다. 비록 여리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이 화의제안은 명왕조의 현지관리와 장수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이와 동시에 선덕제도 명을 내려 제2차로 명군을 안남에 파병한다. 안원후 유승(柳升)을 정로부장군(征虜副將軍), 총병관으로 삼고, 보정백 양명(楊銘)을 좌부총병을 삼고, 도독 최취(崔聚)를 참장(參將)으로 삼고, 상서 이경(李慶)을 찬군무로 삼아 모두 7만의 육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한다. 이들로 하여금 검국공(黔國公) 목성(沐晟)과 함께 토벌하도록 한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거창한 군사행동은 선덕제가 안남의 국면을 일거에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그러나 이번 행동은 실제로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유승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다. 그래서 여리는 한편으로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 퇴각하면서 고의로 유승을 안남의 복지로 유인한다. 그러나 유승은 적을 가볍게 보고 방심한다. 겨우 백여기의 기병을 데리고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결과 안남군의 매복에 걸려 유승 본인의 마필이 늪에 빠진다. 유승도 이로 인하여 표(鏢)에 맞아 사망한다. 3일후, 대군이 서서히 도착했을 때 안남군대는 이미 철저히 준비를 마치고 명군과 결사의 일전을 벌인다. 이때 안남군대는 이미 병력에서 명군을 압도한다. 그리고 대량의 전상(戰象)도 참전한다. 이리하여 최종적으로 명군이 전멸한다.
유승의 부대가 전멸하였으므로 검국공 목성이 이끄는 부대는 수미(水尾) 즉 지금의 라오차이에 도착한 후에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렵게 된다. 이때 청화에 있던 왕통은 좌불안석이었다. 왜냐하면 유승이 패전하였으므로, 이때 청화는 자연히 안남인들의 다음 번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통은 먼저 여리에게 구화서(求和書)를 보내고 북경에는 사죄표(謝罪表)를 올린다. 이를 통하여 여리에게 화의의 뜻을 전한다. 같은 해 십월, 왕통은 청화의 명나라군민과 관리를 이끌고 성을 나선다. 그리고 임의로 여리와 결맹을 맺는다. 그리고 쌍방이 퇴각하기로 맹세한다. 당연히, 이는 여리에게 있어서는 잠시 떠나는 것이나, 명군에 있어서는 철저히 안남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왕통의 개인행위였다. 왕통은 명나라의 원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남과 화의를 할 수는 없었다. 과연 왕통이 광서로 돌아온 후, 이 일을 선덕제가 알게 된다. 이 일을 알게 된 선덕제는 안남에서의 이러한 결과에 깜짝 놀란다. 다만 동시에 확실히 알았다. 안남을 다시 중국의 일부로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리하여 안남에 대한 여리의 통치를 인정하게 된다. 왕통의 결말은 자연히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삭탈관직되었을 뿐아니라, 가산몰수를 당하고, 최종적으로는 하옥된다. 나중에 명영종이 그를 석방한다. 그리고 그는 경사보위전에 공을 세워서 다시 관직을 받고 가산을 돌려받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후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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