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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왕양명(王陽明): 삼불후(三不朽)

by 중은우시 2015. 3. 5.

글: 고성(高成)

 

 

 

 

중국고대에 어떤 사람이 불후의 인물이었을까?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숙손표(叔孫豹)는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중 하나도 하기 힘들다. 위청, 설인귀, 이정, 반초등등의 선현도 겨우 그중 한두개만을 완성했을 뿐이다. 이 모두를 했다고 공인된 사람은 단지 두 명 반이다. 한 명은 공자이고, 반명은 증국번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왕양명이다.

 

대명의 중엽 왕수인(王守仁)이라는 관료자제가 나타난다. 그의 별호는 양명(陽明)이다. 천부가 비범하고, 군사(軍事)를 논하기 좋아했다. 부친이 장원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꿈을 품고 있었다: 나는 성인(聖人)이 되겠다. 일반인이 보기에 성인은 그저 숭배의 대상일 뿐이다. 당시 조정은 비교적 주희(朱熹)의 학설을 숭상했고, 주희의 책은 과거시험에 참가하는 학자들의 필독서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야 한다고. 세상의 만사만물에는 모두 이치가 있고, 노력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뛰었다. 친구 한 명을 찾아서, 대나무를 연구(格)한다. 두 소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대나무만 쳐다본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여긴다. 삼일째가 되는 날 친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 쓰러진다. 왕양명은 그래도 계속한다. 사일째 되는 날, 그도 영광스럽게 병으로 쓰러진다. 왜 주희의 방법으로는 안되는 것일까? 이때부터 왕양명은 이 학설에 의문을 가진다. 이때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17세때, 왕양명은 남창으로 간다. 자신의 부친이 친구인 제양화(諸養和)의 딸고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미성년자이지만, 당시에는 조혼이 유행했다. 동방화촉야(洞房花燭夜), 금방제명시(金榜題名時). 이는 모두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러나 혼례를 시작하려 할 때, 왕양명은 신비스럽게 실종된다. 그리하여 가족들은 조급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방법이 없어, 그저 그를 찾았다. 마침내 다음 날, 장인이 그를 발견한다. 장소는 철주궁(鐵柱宮)이라는 도관이었다. 왕양명은 한 늙은 도사와 신혼밤을 지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신부보다 그의 마음을 끌었을까? 그래서 신랑이 신혼방으로 돌아오는 것마저 잊었을까? 원래 양생지술잉ㅆ다. 지난번 격죽자(格竹子)가 남긴 화근이었다.

 

정덕원년, 천자는 명무종 주후조였다. 명나라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명나라때는 기인황제가 많이 나왔다. 명무종은 그중에서도 걸출한 인물이다. 특히 개성이 있었다. 병력을 이끌고 전쟁하는 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자신을 대장군에 봉했다. 그리고 자신의 예명을 주수(朱壽)라 짓는다. 별일이 없으면 몇 사람을 모아서 북경주변을 며칠간 놀러가거나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다. 수레 하나하나 자신의 노력의 성과가 쌓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을 쓰는데서, 비교적 환관 유근을 신뢰한다. 유근은 왕진의 뒤를 이어 또 한 명의 권력을 잡은 환관이 된다. 백관이 속속 상소를 올려 탄핵하나, 그들은 혹은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유배를 갔다. 병부에 임직하고 있던 왕양명도 상소를 올려, 유근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곤장 사십대를 맡고 감옥에 갇힌다.

 

엉덩이는 엉망진창이 되고, 어둡고 습기많은 감옥에 갇혀 있게 되니, 왕양명의 인생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폐병도 심해졌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유근은 어떻게 왕양명을 처치해야할지를 생각해낸다. 귀주(貴州) 용장(龍場)으로 보내어 역참 참장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을 개조시키려는 것이다. 왕양명이 남하하여 항주에 갔을 때, 유근은 그를 그냥 두려 하지 않고, 살수를 파견하여, 참초제근하려 한다. 왕양명의 친구가 몇 몇의 행적이 수상하다고 여기고, 말투를 들으니 현지사람이 아니며, 얼굴에 살기가 넘친다고 느꼈다. 그들이 좋은 자가 아니라고 여기고, 이들을 청하여 술을 마신다. 술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한 마디 한다: "너희는 왜 양명을 죽이려 하는가?" 금의위 살수는 술을 마시자 진심을 말한다: "유공공(유근)의 명을 받들었다." 친구는 이 일을 왕양명에게 얘기하고 왕양명은 급히 도망쳐서 목숨을 구한다. 금의위는 그래도 계속 추격한다. 앞에 전당강이 보이자 왕양명은 기지를 발동하여, 신발 한켤레를 강가에 놓아두고, 하나는 강에 던져 버린다. 살수가 도착했을 때, 그가 이미 강에 몸을 던진 것으로 생각하여 북경으로 돌아간다.

 

왕양명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겠다고 여긴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여겨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 누가 알았으랴. 비바람을 만나서, 해안에 도착할 때 조금 더 나가서 무이산에 도착하자, 이미 하늘이 어두워졌고, 배고 고프고 목도 말랐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는데, 돌연 한 사묘가 눈에 들어온다. 문을 두드리니 스님이 나와서 말을 한다. 그는 왕양명의 낭패한 모습을 보고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숙박을 거절한다. 왕양명은 거의 절망하여, 할 수 없이 곁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사묘에서 잠을 청한다. 다음 날 깨어나니, 어제 밤에 보았던 스님도 사묘에 있었다. 그 스님은 깜짝 놀란다. 왕양명이 죽지 않은 것이다. 원래 이 곳은 호랑이가 사는 곳이고, 그가 매일 아침 이 곳으로 오는 이유는 시신을 수습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남긴 짐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왕양명은 대난불사(大難不死)로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한다.

 

스님은 왕양명을 절로 초청한다. 노스님을 만나니 익숙한 느낌이었고, 어디선가 만난 듯했다. 도사는 너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원래 신혼날 밤에 철주궁에서 얘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이었다. 이렇게 많은 풍우를 겪고서, 왕양명은 솔직하게 말한다. 그도 속세를 떠나서 은거하고 싶다고. 도사는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너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할 뿐아니라, 가족, 친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유근은 너를 국가를 배반하고 적에 투항했다고 하며 너의 부친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왕양명이 귀주 용장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황량했다. 이곳은 여러 산에 둘러쌓여 있었고, 편벽되며 폐쇄된 지역이었다. 곳곳에 독사와 맹수가 있어서 원시적인 모습이었다. <동물의 세계>를 찍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현지에 사람은 있는가? 있다. 다만 약간의 소수민족이 있었고, 한어는 할 줄 몰랐다. 그리고 한족관리에 대하여 적의에 충만했다. 여기서 생존하려면, 현실적인 서바이벌게임을 찍어야 했다. 촬영시간은 하한만 있지 상한은 없다. 왕양명은 할 수 없이 산동(山洞)에 거주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그저 정좌하고 앉는다. 하루는 그가 돌연 크게 깨닫게 되어 환호작약한다. "성인의 도는 오성자족(悟性自足)이다,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치양지(致良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속의 이치를 찾아야 하고, 이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향이 심원한 양명심학(陽明心學)을 개창하게 된다.

 

보검봉종마려출(寶劍鋒從磨礪出), 매화향자고한래(梅花香自苦寒來). 유근은 왕양명을 해쳤지만, 그 고생을 통하여 왕양명은 단련되고, 그의 영혼은 승화된다. 도대체 유근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원망해야 하는가. 십년후, 왕양명은 파양호에서 1만명이 안되는 군대로 영왕의 십만반군을 물리친다. 말년에는 광서의 반군을 격패시킨다. 그의 직업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철학가, 정치가, 동시에 군사가이다. 한 서생이 용병여신(用兵如神)하고 문무를 겸비했다. 그리고 극치를 추구했다. 그가 죽은지 여러해가 되었지만, 강호에는 그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해군을 물리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이렇게 말한다: "일생저수배양명(一生低首拜陽明)" 타이페이시에는 양명산이 있는데, 이는 장개석이 그를 존경한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