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령신(陳令臣)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곁에서 모시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 이 말은 확실히 진실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공신, 대장군등이 잘 시작했지만, 잘 끝나지는 못하여,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던가? 당연히 역사상 이렇게 공신을 많이 죽인 황제는 그 수를 헤아릴 수없을 정도로 많다.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다. 그는 황제에 오르기 전에는 소치는 아이였고, 황각사에서는 스님으로 지내기도 했으며, 사는 것이 빈곤하고 형편없어서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주원장이 황제에 오른 후, 호의호식을 하게 되었지만, 그는 시기심이 강하고 각박했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주원장이 권력을 장악한 후 한 첫번째 일은 바로 공신을 대거 죽이는 것이었다. 어떤 공신은 죄를 뒤집어 쓰고 죽었고, 어떤 사람은 아무 죄도 없이 사사당했다. 예를 들어, 중서좌승상 이선장(李善長), 좌승상 호유용(胡惟庸), 태자태부 남옥(藍玉), 대장군 섭승(葉昇), 태자태사 풍승(馮勝), 한림학사승지겸지제조 송렴(宋濂), 태자태사 부우덕(傅友德)....그러나, 신국공(信國公) 탕화만은 재난을 피할 수 있었고, 선종할 수 있었다. 도대에 무슨 이유에서 그러할 수 있었을까?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신국공 탕화가 선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래의 4가지 원인이 있는 것같다:
첫째, 탕화는 원래 침온민첩(沉穩敏捷)하고 모략에 뛰어난 대신이다. 그리고 그는 주원장과 같은 고향사람이어서 주원장을 아주 잘 알았다. 명나라가 건국된 후, 탕화는 주원장의 문제를 잘 알았고, 주원장은 공,작,왕,후의 수중에 쥐어진 권력이 명황실에 위협이 될까봐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탕화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나이가 이미 많고,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해서 전쟁터를 누빌 수 없다"능 이유를 대어 군사권을 내놓는다. 그리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노후를 보낸다. 탕화는 주원장의 뜻을 잘 알고 그에 맞추어 준 것이다. 주원장은 그의 행동에 매우 기뻐한다. 즉시 돈을 보내어 탕화가 봉양 고향에 저택을 지을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탕화는 자신과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그후 탕화는 매년 1회 남경으로 가서 주원장을 알현한다.
둘째, 지정12년(1352년), 탕화와 주원장은 함께 곽자흥(郭子興)의 홍건군에 투신하여, 곽자흥의 휘하에서 일했다. 나중에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내어 우두머리가 된다. 당시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주원장과 동년배였고 그의 부하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탕화는 주원장보다 3살이 많았으나, 오로지 그만이 주원장의 지휘를 진지하게 따랐다. 주원장이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탕화는 중요한 순간에 솔선하여 주원장의 우두머리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 이 공로를 주원장은 평생 잊지 않았다.
셋째, 탕화는 보통사람이 갖기 힘든 평상심을 유지했다. 공명리록(功名利祿)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았고, 공을 세우려고 다투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일처리는 조심스러웠다. 주원장의 질책을 받고서도 전혀 투덜거리지 않았다. 주원장은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나중에 탕화가 신국공이 된 후에도 한번도 교만하거나 시끄럽게 군 적이 없다. 여전히 평상심으로 일처리를 하고 사람을 대했다. 그래서 주원장은 그에 대하여 안심하고, 그와 가족의 안전은 지켜준 것이다.
넷째, 탕화는 금의환향한 후, 조용히 살았다. 공신이라고 나대지도 않고, 자손과 노비들도 단속하여 법률과 기율에 어긋나지 않게 했다. 고향이웃들에게 잘 대해주어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 않았다. 특히 <명사.탕화열전>에 다르면 탕화는 말년에 더더욱 공경하고 근신했다. 조정에 들어가서도 국사를 논의할 때 한마디도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는 첩을 백여명 두었는데, 병이 든 후에는 모두 돈을 주어 돌려보내 버린다. 그는 조정에서 내린 하사품을 대부분 고향의 사람들에게 다시 나눠주었다. 탕화의 이러한 행위는 조금도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주원장이 안심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주원장의 독수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탕화는 홍무28년(1395년)까지 살다가 70세의 고령으로 사망한다. 명나라초기에 선종한 몇 안되는 공신중 하나이다. 탕화가 죽은 후, 주원장은 조서를 내려 그를 동구왕(東甌王)에 봉한다. 그의 묘는 안휘 방부시 용자하 동쪽의 조산 남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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