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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아편(鴉片)은 어떻게 구명약에서 탈명독이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 6.

글: 문재봉(文裁縫)


앵속(罌粟)은 아랍 사신이 대당(大唐)에 가져온 선물이다. 중국에 들어온 후 수백년동안 앵속은 보기 좋은 관상식물이면서 목숨을 구하는 치료의 양약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재산을 날리고 목숨도 잃는 독품이 된다.


아랍사신이 가져온 선물


앵속의 원산지는 서아라비아반도, 남인도등지이다. 중국은 앵속의 원산지가 아니다. 앵속과 그 제품인 아편은 모두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다.


앵속과 그 제품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당나라때이다. <구당서>열전에 따르면, "건봉2년(667년) 불림(拂霖)에서 사신을 보내어 저야가(底也伽)를 바쳤다"고 되어 있다. 독일학자인 Friedrich등의 연구에 따르면, "불림"은 "대진(大秦)" 즉 동로마제국이고, 그 중심위치는 개략 지금의 시리아에 있었다. 당나라때 아랍인들은 대거 확장하였고, 시리아는 아랍제국의 하나의 주였다.


"저야가"의 고대음은 "te ya ka"이고, 이는 당시 서방의 진귀한 약품이었다. 아랍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상등의 '저야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나온다. 서방에서는 자고이래로 '저야가'는 치료효과가 가장 뛰어난 해독약으로 여겼다. 그것은 600의 물질을 혼합하여 만들며, 이런 환 모양의 약의 작용은 모든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야가'의 주요성분은 아편, 용연향(龍涎香), 축사(縮), 육두구(肉豆구), 육계(肉桂)등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성분은 아편이다.


이들 사료를 보면 우리가 추단해볼 수 있다. 아편은 고대 아랍인들에 의하여 중국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을.


당나라때 급속히 확장중이던 아랍제국은 중국과의 무역거래가 아주 빈번했다. 아랍은 중국에 정식사신을 37번이나 보냈다. 고대아랍인들은 주로 육로, 해로의 두 길를 통하여 중국에 들어왔다. 육로는 저명한 비단길을 통해 장안으로 오는 것이고, 해로는 말라카해협을 거쳐 광주, 천주, 양주등지로 왔다. 10세기 상반기에 글로 쓰여진 불후의 명저 <천일야화>에서도 서아시아와 중국의 경제왕래와 문화교류가 나타난다. 이런 교류의 규모는 교통이 아주 발달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감탄할 정도이다. 그때 장안, 광주, 천주등지에서 장사를 하는 아랍인이 만명이상이었다. 아랍인들은 상아, 면화, 백당, 보철(寶鐵)등 특산품을 가져왔고, 앵속과 아편도 가져왔다.


문헌기록으로 고증하면, 건봉2년 아랍사신이 '저야가'를 바쳤는데, 이것은 아편이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기록이다. 다만 중국인들의 아편에 대한 인식은 이 문헌기록보다 훨씬 빠르다. 당고종 현경4년(659년)에 쓰여진 <당본초>에는 '저야가'라는 조목이 있다. 거기에는 저야가는 "맛이 약간 쓰고 독이 없으며, 주로 백병중 '악객오사기심복적취(惡客邪氣心腹積聚)'를 치료하며, 서융(西戎)에서 나온다"고 적었다. 이 책은 원래 세계최초로 정부에서 편찬한 약서이다. 역사서에서 아랍인이 '저야가'를 바쳤다고 기록한 것보다 8년이나 빠르다. 그리고 명확하게 그것의 약용효과를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추단할 수 있다. 7세기 상반기, 당나라초기에 저야가 즉 아편은 이미 중국에 들어와 있었다.


아랍인은 '저야가'를 바치는 동시에, 앵속도 중국으로 가져온다.


아름다운 약물


얼마 후, 중국인은 앵속을 재배하기 시작한다. 앵속화는 아주 예쁘기 때문에, 당나라때 사람들은 그것을 관상식물로 심었다. 당나라 개원시기에 쓰여진 <본초습유>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앵속화는 잎이 4개이고, 홍백색이며, 위에는 옅은 붉은색의 무리가 있다. 그 주머니는 모양이 화살촉과 같고, 가운데에는 가는 쌀이 있다." 당문종시기(826년-840년)에 생활했던 곽탁타(郭駝)도 앵속을 심은 경험이 있다. 그는 <종수서(種樹書)>에서 이렇게 썼다. "앵속(鶯粟)은 구월구일 및 중추절밤에 심는다. 꽃은 반드시 커야 하고, 씨는 반드시 가득차야 한다" 시인 옹도(雍陶)는 <서귀사곡(西歸斜谷)>에서 이렇게 읊는다: "행과험잔출포사(行過險棧出褒斜), 출진평천사도가(出盡平川似到家), 만리객수금일산(萬里客愁今日散), 마전초견미낭화(馬前草見米囊花)". 여기서 '앵속(鶯粟)'과 '미낭(米囊)'은 모두 앵속(罌粟)의 별칭이다.


앵속이 중국에 전래되고나서 처음 몇 백년동안, 그다지 큰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이는 당초에 이를 흡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앵속은 주로 관상식물과 약용식물로 쓰였기 때문이다.


송나라에 들어서면서,앵속화는 "고자화(鼓子花)"라고불린다. 이는 기녀(妓女)의 별칭이 된다. 원래 송나라사람의 미학관념은 담아(淡雅)한 것을 좋아하고 농염(濃艶)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염려한 앵속화는 자태가 아름답지 못한 기녀를 가리켰다. 사인(詞人) 장선(張先)은 말년에 항주에 있으면서, "관기들을 위하여 사를 많이 지었다." 그래서 어떤 시에는 이렇게 저었다. "천흥군재십양화(天興群材十樣花), 독분안색불감과(獨分顔色不堪誇), 목단작약인제편(牧丹芍葯人題遍), 자금신여고자화(自今身如鼓子花)" 관리 왕원지(王元之)는 제안군으로 귀양가서 현지가 황량하고 관기들도 예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이렇게 탄식한다; "억석서도간목단(憶昔西都看牧丹), 초무안색편심란(稍無顔色便心闌), 이금적막산성리(而今寂寞山城裏), 고자화개역희환(鼓子花開亦喜歡)"


이때, 중국인들은 앵속에 대하여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앵속을 심는 것이 날로 보편화된다. 예를 들어 북송 소송(蘇頌)은 <도경본초>에서 이렇게 적었다. "앵속은 곳곳에 다 있다. 사람들이 많이 심어서 관상용으로 삼는다. 꽃은 홍, 백 두 가지종류가 있는데, 약간 비린내가 난다. 그 형태는 병과 같고, 알갱이는 아주 가늘다. 심는 사람은 격년으로 땅에 거름을 주고, 구월에 씨를 뿌리면, 겨울을 거쳐 본이 되면 나온다. 싹은 아주 무성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무성하지 않다. 병이 누런색이 되면 채취한다." 이를 보면 송나라사람들은 앵속의 식물특징, 재배 및 채집에 대하여 일정한 인식이 있었던 것같다.


송나라때 의원들은 이미 앵속으로 병을 치료했다. 양사영(楊士瀛)의 <직지방(直指方)>, 왕구(王)의 <백일선방(百一選方)>, 왕석(王碩)의 <이간방(易簡方)>, 임홍(林洪)의 <산가청공(山家淸供)>등 의서에 모두 앵속의 각삭(殼蒴)을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제라고 기록했다. 저명한 사인인 신기질(辛棄疾)은 일찌기 병을 앓았는데, 한 승려를 만나서, 오래된 앵속을 인삼등에 넣어서 해독약으로 만들어 위통환(威通丸) 십여알을 먹고는 나았다.


금나라 원나라의 의원들도 송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미 앵속을 해소와 설사,이질을 치료하는 약재로 여겼다. 원나라초기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1270년 광혜사(廣惠司)를 개설하여 아랍약제를 전문적으로 제조하게 한다. 1292년, 원나라사람들은 또한 '회회약물국(回回藥物局)'을 개설하였고 거기에 쓰는 약에는 당연히 앵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앵속은 의원들이 중시했을 뿐아니라, 민간에서 백성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앵속의 씨를 끓이면 보약이 된다고 생각했다. 유한(劉翰)은 <개보본초(開寶本草)>에 이런 습관을 기록했다: "앵속씨는 일명 미낭자(米囊子)라고도 부르고 어미(御米)라고도 부르는데,...죽으로 끓여서 먹으면 아주 맛있다." 앵속씨를 '어미'라고 불렀다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우리는 그것이 이미 황궁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진귀하게 여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실제로 민간에서 앵속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소식(蘇軾)은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도인권음계소수(道人勸飮鷄蘇水), 동자능전앵속탕(童子能煎鶯粟湯), 소철(蘇轍)은 <종약묘시(種藥苗詩)>에서 앵속죽이 소화불량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래서, 앵속은 송나라때 이미 의료와 보신을 겸하는 물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때 사람들은 이미 앵속의 부작용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간방>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앵속껍질은 이질을 잘 다스리지만, 성질이 껄끄러워서 구도를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겁을 내며 먹지 못한다." 왕석은 그러면서 앵속의 부작용을 없애는 약방을 기록한다: "식초(醋)를 오매(烏梅)에 더해서 쓰는 것이 그 방법이다." 그리고 사군자약과 같이 쓸 수 있다고 했다. "폐위방식(閉胃妨食)하지 않고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원나라때의 명의 주진형(朱震亨)은 앵속을 가장 심도있게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병을 그치게 하는데는 비록 빠르지만(止病之功雖急), 사람을 죽이는 것도 칼과 같다(殺人如劍).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할 것이다." 이를 보면 원나라사람들은 앵속의 독성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살인여검(殺人如劍)'이라는 네 글자에서 그 때 사회에 이미 앵속중독으로 사망한 사례가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비록 송, 원시기에 사람들은 앵속의 의학효능에 대하여 이미 상당히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아편'이라는 명칭이 없었다. 아직은 아편을 만드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명나라 성화(成化)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아편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나라때 의원인 왕새(王璽)는 <의림집요(醫林集要)>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아편은 설사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앵속꽃이 진 후에 껍질을 맺은 후 3,5일이 지나서 오후에 껍질에 큰 침으로 바깥의 청피(靑皮)에 십여곳을 찌르면 다음 날 진액이 나온다. 대나무칼로 긁어서 자기에 모으고 그늘에서 말린다. 매번 작은 콩 크기의 한 알을 먹는다." 그는 생아편을 채집하는 것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다. 중국에서 아편을 제조하는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왕새는 일찌기 감숙총독을 20여년간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무슬림과 접촉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아랍의 산물, 의술, 습속등을 배웠을 것이다. 그후에 유명한 명의 이천(李)은 <의학입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편(鴉片)은 일명 아부용(阿芙蓉)이라고 한다. 앵속화가 아직 피지 않았을 때, 침으로 십수개의 구멍을 찌르면 진액이 스스로 나온다. 다음 날 죽도로 긁어서 자기 안에 담는다. 많이 모으면, 종이로 단단히 홍하고 2일 내지 7일간 말린다. 그렇게 하면 아편이 된다. 저장해두고 쓸 수 있다." 이 두 개의 기록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때의 의원은 이미 앵속의 액을 채취하여 아편을 만들고 약제에 배합하는데 숙련되어 있었다.


아부용이라는 말은 아랍어인 Afyun을 음으로 번역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편이라는 말의 직접적인 근원은 영어의 Opium이다. 동의어로는 아편(雅片), 아편(阿片), 아편(阿扁)등이 있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아편(鴉片)이다. 그외에 앵속의 별칭에는 우빈(藕賓)과 창옥속(蒼玉粟)등이 있다. 명나라사람들은 아판의 의학효능에 대하여 이미 상당히 많이 인식하고 있었다. 의학대가인 이시진(李時珍)의 조사와 실무에 따르면, 아편은 각종 설사,이질, 백절병, 정두풍, 천식, 해소, 기침, 토사, 금구리, 열통, 제하통, 소장기, 방광기, 혈기통, 일식, 여인혈붕, 혈부지, 소아만비풍등 이십여종의 질병에 효과가 있다. 그외에 이시진은 아편의 성기능에 대한 작용도 기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편은 "남편의 정기를 북돋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중술에 쓴다.'


이상에서 쓴 바와 같이, 중국인들이 앵속을 안 것은 1300년의 역사를 가졌다. 앵속의 약용가치를 안 것은 이미 900여년의 역사를 가졌고, 아편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500여년이 되었다.


<본초강복>을 보면, 중국인의 앵속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약용의 범위내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편제조는 아직은 크게 유행하지 않았다. 다만 속인들이 방중술에 쓴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명확하게 말해준다. 당시 사람들은 아편의 성기능에 대한 작용을 알고 있었고, 그 효과를 빌어서 섹스에 썼다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는 명나라시대의 사회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독품으로 풍미하다.


원나라초기, 몽골인들이 인도를 원정한다. 그때의 인도는 이미 아편을 많이 생산했다. 그러므로, 몽골인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대량의 전리품을 가져왔는데 아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시에 "사농공상이 이를 즐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아마도 중국사회에서 아편흡입이 유행한 것을 기록한 최초의 문자일 것이다. 명나라때, 비록 중국인들이 이미 앵속을 잘라서 진액을 받아 아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주요 조달처는 국외였다. 당시의 동남아 일대에는 서방식민자들이 앞장서서, 앵속을 많이 심었다. <명회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섬라(暹羅, 태국), 자바(爪), 방글라데시(榜葛剌)등지에서 오향(烏香), 즉 아편을 많이 생산했다. 그들은 자주 '오향' 즉 아편을 공물로 중국황제에게 바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섬라국은 일찌기 중국황제에게 200근의 '오향'을 바치고, 황후에게 100근을 바친다. 민국시대에 이르러 어떤 지방에서는 여전히 아편을 '오향'이라고 불렀다.


수입 '오향'이 급격히 증가하면서,명정부는 이미 납세하는 약물에 포함시킨다. 명신종 만력17년(1589년), 아편은 처음으로 관세화물의 범위에 들어간다. 만력43년(1615년)에 반포한 <화물추세현행칙례>에는 이렇게 규정한다. 매10근의 아편의 세는 은 1천7푼3리라고. 아편수입이 증가하면서, 민간에 점점 아편쟁이가 늘어난다. 명나라 성화연간에 이미 길거리에서 아편을 판매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덕연간, 광동, 복건연해에 현지의 부호나 지주들이 아편을 식용하는게 드물지 않게 되었다.


아편은 일종의 중독물품이다. 일단 사회공급물이 되면, 그 수요량은 급격히 상승한다. 그래서 식용자가 늘어나면서 아편의 가격도 수직상승한다. 어떤 때에는 수요가 너무 많아서, 가격이 아주 높았다. 심지어 1냥의 황금과 1냥의 아편을 교환했다. 명나라후기, 민간에서 아편을 식용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뿐아니라,경성과 궁정에서도 날로 성행했다. 왕옥해(王玉海)의 <속감주집(續紺珠集)>의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제자가 서양에서 '완약(碗藥)'을 휴대하고 온다. 당시 귀족들 중에서 즐기는 자가 많았다. 여기의 '완약'은 바로 아편이다.


아편은 특유의 취생몽사(醉生夢死), 표표욕선(飄飄欲仙)의 느낌이 있다. 그리하여 조정의 귀족들마저도 이에 중독된다. 심지어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백령(徐伯齡)의 <장정준(精雋)>에서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명헌종은 일찌기 신하를 보내 아편을 매입하게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명신종은 바로 '아편황제'이다. 그는 48년간 황제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조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호부주사 동한유(董漢儒)는 이렇게 말했다: "(만력제)는 깊은 궁궐에 많이 있어, 여러 신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오향의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中烏香之毒)" 오랫동안 아편을 흡입하다보니, 체질이 나빠져서, 명신종은 자주 유지를 내리면서 말한다: "짐은 여름부터 습독(濕毒)을 느껴 발바닥이 아프고, 수시로 어지러우며,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아편흡입으로 그의 성격도 잔혹하고 포악하게 바뀐다. 역사가인 허희중(許熙重)은 황제가 아편을 흡입하는 책임을 간신들에게 묻는다. 그는 <신종대사기요(神宗大事紀要)>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황제가 조정에 나오는 것을 게을리하고, 여러 해동안 신하를 보지 않는다. 실로 간신들이 독약으로 고혹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명신종이 스스로 아편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간신'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다만 명신종이 아편중독이었다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청나라때의 앵속재배를 얘기해보자. 청나라중기이후, 각지의 민중은 이미 앵속으로 아편을 만드는 법을 알았다. 그러므로, 아편을 생산하기 위하여 앵속을 심는다. 그래서 각지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이르러 앵속은 주로 해로, 육로를 거쳐 각지로 흘러들어갔다. 해로는 동남아 여러 지방에서 대만, 복건으로 전해진다. 복건은 가장 먼저 앵속을 재매한 곳은 아마도 복녕부의 복안현일 것이다. 가경연간, 그곳의 앵속화는 이미 많이 피었다. 그후에 다시 복건에서 절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절강의 토양은 복건의 토양보다 앵속의 생장에 적합했다. 도광초기, 절강의 각지에는 앵속화가 널려 있었다. 1830년, 어사인 소정홀(邵正笏)은 이렇게 지적한다: "절강 예를 들어 태주부는 심는 자가 가장 많았다; 영파, 소흥, 엄주, 온주등의 부가 그 다음이다. 태장(台漿), 규장(葵漿)이라고 불리는데 해외의 아편과 다를 바 없었다. 크고 작은 장삿꾼들이 각지에서 판매했다." 마찬가지로, 안휘는 "휘주 영국, 광덕등은 강소절강과 인접하고, 산지가 많다. 아마도 외지에서 온 자들이 현지의 사람들과 결탁하여 사사로이 심어서 나누는 것같다."


육로는 인도에서 동남아, 버마를 거쳐 운남으로 들어온다. 운남에서 앵속을 심었다는 비교적 초기의 기록은 건륭원년(1736년)에 출판된 운남부지>이다. 운남은 날씨가 덥고, 비가 많다. 그래서 앵속을 재배하는데 이상적이다. 그래서, "운남성의 소수민족들은 예전부터 앵속을 몰래 심어 왔다." 이 곳에서 나오는 "운토(雲土)" (남토(南土)라고도 함)는 아편중 상품이다. 생산량도 급격히 증가한다. 1839년, 운귀총독 이리포(伊里布)는 한 주청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번에 아편 1.2만냥을 몰수했다고.


운남의 앵속은 금방 사천으로 전해진다. 늦어도 도광원년(1821년)에 부릉(涪陵)일대의 농민은 이미 앵속을 심는다. 여기에서 나오는 아편을 "천토(川土)"라고 부른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사천성의 곳곳에는 아편을 흡입하는 사람이 있다. 이주, 평주현 일대는 번계(番界)와 인접해 있어서, 아직도 앵속화를 심는 곳이다." 이때부터 "천토가 흥성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사천은 앵속전파의 중계기지가 된다.


앵속은 사천에서 귀주로 들어간다. 도광11년(1831년)에 이미 "앵속을 곳곳에서 재배하고, 아편으로 제조한다" 귀주순무 하장령(賀長齡)은 이러렇게 주청한다: "귀주성은 백성과 묘족이 섞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앵속을 재배하여 아편으로 만들어 판매한다. 현재 낭대, 보정, 청진, 귀축등의 현에서 전후로 백성과 사사로이 앵속을 심는 묘족을 조사하였고, 수무(畝)에서 십수무까지 있다. 그외에 각 주현에서 앵속을 재배하여 돈을 버는 자가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도광연간, 앵속의 재배는 사천에서 감숙, 섬서, 산서등지로 북상한다. 이렇게 하여, 짧은 1,2십년만에, 이 광범위한 지역의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고 밭에 앵속을 심는다. 날이갈수록 더욱 넓어졌다.


아편이 범람한 원인은 민중들이 이익을 추구한 것을 제외하고도, 지방관리등리 종용한 측면이 있다. 해외에서 수입되는 아편을 막으려할 때, 청나라정부내의 어떤 사람은 본토아편으로 외국아편을 막자는 주장을 한다. 청나라 도광14년(1834년), 양광총독 노곤(盧坤)은 앵속재배이유를 지적한다: "내지에서 앵속의 재배를 금지하고 단속하는 것을 완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흡입자들이 국내아편을 사서 흡입하게 하여 서양인들이 이익을 독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돈은 여전히 내지에서 돌고 외국으로 나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본토아편으로 외국아편을 이기자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앵속화를 재배하여 진액을 받아 아편을 만들면 그 이익이 쌀을 심는 것보다 10배나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아편의 이익은 보리보다 수배이고, 농민에게 크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내지의 재배가 늘면 늘수록 외국인의 이익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니, 금지하지 않아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본토아편으로 외국아편을 이기자는 생각을 가진 관리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청정부가 내지에 앵속재배를 금지하는 정책을 내놓았지만(예를 들어, 도광3년(1823년)에 이부,병부의 두 부는 작정실찰아편조례를 주청하여, '사사로이 앵속을 심고 아편을 제조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요구한다. 그후에 어사 곽백음은 앵속재배를 엄금하도록 주청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광서, 사천, 운남, 귀주등 외국선박에 가지 못한 곳에는, 모두 내지 백성의 밭이 앵속을 재배하여 아편을 만든다. 지리(地利), 민생(民生)이 모두 피해를 입으니, 마땅히 엄히 금하여 악습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다만 청나라조정이 여러번 금연령을 내리지만, 적지 않은 지방관리는 양봉음위(陽奉陰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많은 글에서 아편을 '앵속화'로 고치고, 연고(煙膏)를 부용고(芙蓉膏)로 고쳐 부른다. 이를 통하여 외국의 아편과는 구분한 것이다. 그 결과 1931년때, 앵속은 광동, 호남, 산서, 섬서, 절강, 복건등의 성으로 퍼져나간다. 본토아편과 서양아편이 병존한다. 여기에 본토아편은 가격이 싸서, 각지의 아편중독자는 더욱 늘어난다. 아편의 범람은 결국 중국이 치욕을 받도록 하였고, 근대 '동아병부'의 상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