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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어장검(魚腸劍) 이야기의 비밀은...?

by 중은우시 2018. 1. 8.

글: 자금산(子金山)


전제(專諸)는 구운 생선을 받쳐들었다. 오왕의 시위는 전제의 온몸은 샅샅이 수색했지만, 시위가 구운 큰 생선을 자세히 살펴보긴 했지만, 아무도 감히 생선의 배를 갈라서 조사해 보지는 못했다.


공자광(公子光)의 거사가 임박했을 때, 거사를 준비했던 전제는 그러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전제가 공자광의 식객이 된 이래 생활은 아주 풍족했다. 전제는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천하에 공짜로 주는 밥은 없다. 이는 장래에 치러야할 댓가를 미리받는 것이다. 목숨으로 갚아야 할 빚이다. 동주열국지의 묘사에 따르면, 전제의 집안에는 팔순의 노모가 있었다. 백가지 선 중에서 효가 가장 우선이다. 전제는 그래서 망설인 것이다. 여러번 암살시기를 늦추게 된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모친이라고 했던가? 전제의 모친은 아들이 효도와 대의의 사이에서 배회한다는 것을 알았고, 아들을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자결하는 것이다.


모친의 자결로 아들의 걱정은 사라진다. 아들은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이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행위가 위대한지 우매한지는 일단 차치하고, 모친으로서 이는 아들이 '신의'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비장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주열국지는 명나라때의 역사소설이다. 모친은 '신의'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아들의 목숨은 물론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이러한 일이 정말 일어났을까? 이미 시간이 흘러서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 비장한 이야기는 중국고대인의 마음 속의 검도(劍道)를 말해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검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신렴인용(信廉仁勇)" 첫번째 글자가 바로 "신(信)"이다. 중국인은 역대이래로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여겼다. 검도의 기초는 바로 '신'에서 시작한다.


전제는 구운 생선을 오왕료(吳王僚)에게 바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오왕료의 모친은 아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래서 오왕에게 겉옷 안에 3중갑옷을 입도록 당부한다.


전제는 생선굽는 요리사로 변장하여, 어장검을 생선의 뱃속에 감추고, 생선을 바치는 틈을 타서 날카로운 칼로 3중갑옷을 뚫고 찔러서 오왕료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로 인하여 전제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와 함께 전제가 들고 있던 무기까지.


한 자루의 청동단검이 3중갑옷을 뚫었다. 이 검은 도대체 어떤 청동검인가?


소흥의 "주리요(朱利堯)"가 어장검을 제작하다.




오늘날의 검을 주조하는 장인은 이미 사서에 나오는 어장검을 복제했다. 그럼 한번 시험해보자. 이 복제한 어장검이 3중철갑옷을 뚫을 수 있는지 없는지.


선진시기에 철갑은 대부분 견고한 소가죽으로 제작되었다. 중요부분은 청동 혹은 쇄로 된 갑편(甲片)을 상감했다. 오왕료의 3중철갑은 여러 사서에서 "산예(狻猊)"로 제작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산예"가죽을 사자가죽으로 본다. 다만 사자가죽의 강도는 물소가죽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복제한 어장검은 확실히 3층 두께의 소가죽을 뚫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 어장검이라는 청동단검에 대한 기록은 확실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제한 청동검이 인체모형을 뚫었다.


전제의 어장검은 길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오월춘추>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왕료의 앞에 이르렀을 때, 전제는 구운 물고기를 받들었다(乃擎炙魚), 비수를 밀어갔으므로 극을 들고 있던 오왕료의 시위는 전제의 가슴을 찔러가고 가슴이 갈라진다. 비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서 오왕료를 찌르고 갑옷을 뚫고 등에 닿았다. 오왕료는 이미 죽었고, 좌우가 함께 전제를 죽인다."


이 기술을 보면, 우리는 대체로 어장검이 그다지 짧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복제한 단검과 비슷할 것이다. 최소한 한 사람의 앞가슴에서 뒷등까지는 미쳐야 한다.


전제는 물고기의 입으로 단검을 끄집어 내서 바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오왕료를 찔러간다.


경(擎)은 받든다는 말이다. '경어'는 우리가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 한 요리사가 일국의 왕을 뵐 때는 분명히 구운 생선을 놓은 쟁반을 머리 위로 받들고 바칠 것이다. 어장검의 길이를 고려하면, 전제는 생선의 몸체로 인하여 찔러가는 깊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신속히 생선의 입에서 단검을 꺼내어 번개처럼 오왕료의 가슴을 찔러갔을 것이다.


역사기록은 비교적 상세하다: "비수를 밀어갔으므로 극을 들고 있던 오왕료의 시위는 전제의 가슴을 찔러가고 가슴이 갈라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추단할 수 있다. 전제의 검이 먼저 오왕료를 찌른다. 오왕료의 시위도 반응이 빨랐고 거의 비수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손을 써서 전제를 찌른다. 그러나 전제는 죽기 전에 마지막 힘을 다해서 어장검을 오왕의 몸으로 밀어넣는다. 전제는 분명히 순식간에 물고기의 입으로 어장검을 끄집어냈어야 할 것이다.


어장검의 이야기는 전제 모자의 신의와 용기를 보여준다. 또한 측면으로 이러한 점도 확인해 준다: 단검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다. 만일 전제가 뛰어난 검술을 지녔더라면, 장자가 말한 10보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고 천리를 도망칠 수 있는... 그러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최소한 전제의 모친은 자결의 방식으로 아들을 압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안전하게 도망친 전제는 아마도 오왕 합려에게 다시 중용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또한 역사에 가정은 없다. 역사가 남긴 수많은 수수께끼는 모두 이미 천고의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매력이다.


전제가 오왕료를 암살한 사건 자체를 보면, 그것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형제간에 서로를 죽인 일이다. 비록 주인공인 전제 모자의 행위가 장열하기는 하고, 극히 비장한 색채를 띄기는 하지만, 역시 현대인이 생각하는 협의(俠義)와는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