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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손자병법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한묘(漢墓)의 죽간(竹簡)

by 중은우시 2018. 1. 11.

글: 진휘(陳輝)



<손자병법> <손빈병법> 죽간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고대인들은 문헌서적을 죽편(竹片), 목편(木片), 포백(布帛)에 썼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를 죽간(竹簡), 목독(木牘),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이들 문헌자료는 쉽게 썩기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것이 없었다. 20세기이래, 고고학의 탄생으로 일부 진귀한 죽간, 백서문헌을 출토하게 되며, 시대는 위로는 전국시대부터 아래로는 삼국시대에 이른다. 현존하는 역사문헌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줄 뿐아니라, 구하기 힘든 서예예술품이기도 한다.


현재 산동박물관에 보돤된 <손빈병법>과 <손자병법> 죽간은 1972년 4월 10일 은작산(銀雀山) 한묘에서 발견되었다. 역사상 손자와 손빈이라는 사람과 책이 있었는지에 대한 천고의 수수께끼가 풀렸고, "신중국30년 10대 고고발견"중 하나로 꼽혔다. 2011년 3월 17일 산동박물관의 "10대 진관지보"에 뽑히기도 했다.


1972년 4월 10일 오전, "임기문물조(臨沂文物組)" 업무인원은 백성들로부터의 신고를 받는다. 임기지구 위생국 기초건설공사장에서 고묘(古墓)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초건설공사 위치는 임기시 남부의 은작산이라는 언덕에 있었다. 이곳은 원래 한나라때의 묘지가 있었다. 그래서 관련업무인원은 신속히 현장으로 갔고, 공사현장책임자와 발굴에 관한 건을 협의하기 시작한다.


4월 14일, "임기문물조" 업무인원은 이미 건축공사로 파헤쳐진 고묘의 정리작업을 정식으로 시작한다. 4월 17일 정리를 마친다. 이는 암묘(巖墓)였다. 묘갱(墓坑)을 직접 암석에 뚫어서 만든 것이다. 길이는 314센티미터, 너비는 225센티미터이다. 묘갱 안에는 나무로 된 관곽(官椁)이 있었고, 관곽의 길이는 264센티미터, 너비는 176센티미터였다. 목관은 관곽의 안 서쪽에 있었다. 관안에는 사람의 시골이 들어 있었는데 이미 썪었고, 소량의 칠목기(漆木器), 동경(銅鏡)등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목곽의 동쪽은 기물상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대량의 도기, 칠목기, 전폐(錢幣)등 부장품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은 두 부의 <손자병법(孫子兵法)> 죽간이 기물사이에 놓여 있었다.


4월 14일은 이번 발견의 기록할만한 날짜이다. 양전욱(楊殿旭), 유심건(劉心健)등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기록해두어야 한다. 그들은 임기문물조에서 왔고, 그들이 먼저 죽간을 발견한다.


당시 발굴업무에 참여했던 인원의 회고에 따르면, 양전욱은 묘장에서 기물을 정리할 때, 죽편 하나가 물에 떠 있는 것을 본다. 무심코 죽편의 진흙을 씻어내고는(묘장을 정리할 때 묘갱내에는 물이 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말한다: "와서 봐라. 위에 글자가 있다." 그는 죽편을 묘갱 위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유심건은 자세히 확인한 후, 죽편위에 쓴 글자가 "제환공문관자왈(齊桓公問管子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흥분해서 크게 소리지른다: "이것은 고개의 죽간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고인들은 서적문자를 제작된 죽편이나 목편에 썼고, 각각 "죽간"과 "목독"이라고 불렀다. 즉, "죽간"은 고대의 "문서"이다. 문화재업무인원은 즉석에서 시공인원들에게 공사중단을 요청했고, 인원을 배치하여 현장을 보호한다. 동시에 산동성 문물무서에 보고한다. 산동성 무문부서는 즉시 산동성박물관의 관련 전문가를 파견하여 발굴을 지도한다. 이 묘는 "임기은작산1호한묘"로 일련번호를 부여받는다. 얼마후 1호한묘의 서쪽에서 다시 2호한묘를 발견한다. 역시 죽간들이 발견된다. 사후에 초보적으로 정리한 결과 1호한묘에서는 4924매의 죽간이 출토되었고, 대부분은 "병서(兵書)"였다. 2호한묘에서는 32매의 죽간이 발견되었고, <한무제원광원년역보(漢武帝元光元年曆譜)"였다.


묘장을 발견한 초기는 비교적 우연이었지만, 묘장에서의 죽간 "병서"를 발견한 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문물>1974년 제2기에 <산동임기한묘에서 손자병버과 손빈병법등 죽간을 발견하다>는 간략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신화사는 1974년 6월에 임기 은작산에서 죽간을 발견한 소식을 뉴스로 내보낸 후 금방 전세계에서 큰 관심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손자병법연구의 새로운 붐이 일어난다.


이번 고고발굴의 중요성에 비추어, 20세기 70년대에 이건 고고프로젝트는 "신중국30년 영향력이 가장 큰 고고발견"중 하나로 선정되고, 20세기 90년대 다시 "신중국의 영향력이 가장 큰 고고발견"중 하나로 선정된다. 21세기초에는 이 프로젝트가 다시 "중국20세기 100건 고고발견"의 하나로 선정된다.


임기한간본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은 발굴출토후 보존처리되어 지금까지 산동성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1년 이 죽간은 "산동성박물관 10대진관지보"중 하나로 선정된다.


한나라이래로 정사문헌에서는 비록 여러번 손무(孫武), 손빈(孫臏)을 언급하고 있지만모두 간략하고 단편적이었다. 최초로 손무와 손빈을 기재한 문헌은 <여씨춘추>와 <한비자>이다. 이를 보면 전국시대, 진나라때는 두 손자의 "병법"이 모두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양한시기의 <사기>, <한서>에는 모두 기록하고 있다. <한서>의 "병서략(兵書略)"에는 <오손자(吳孫子)>를 1위에, <제손자(齊孫子)>를 2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손자>는 82편이고, <제손자>는 89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를 보면 두 손자는 확실히 모두 "병서"를 세상에 전했다. 다만, 무슨 원인에서인지, 전국시대 중요문헌인 <좌전>에는 이 두 사람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한나라이후의 문헌에서는 <제손자>의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후 천년이나 이어지는 수수께끼가 생기게 된다.


한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손자병법>의 작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다. 다만 송나라이후부터 이 두 개의 병서와 그 작자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문이 나타나게 된다.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 주장이다: 첫째, <사서>의 기록을 지지하여, 손무, 손빈은 각각 존재하던 사람이고, 각각 "병법"을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상 손무라는 사람은 없고, 단지 전국시기에 '산림처사'가 쓴 '병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오왕(吳王)이 쓰면서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것이다. 셋째, 역사상 손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손자병법>은 손무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이 '손무'의 이름을 빌려서 쓴 것이라는 것이다. 넷째, <손자병법>의 작자는 손빈이고, 손무와 손빈은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무"는 이름이고 "빈"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역사상 손무와 손빈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고, 현존하는 <손자병법>의 작자는 손빈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손자병법>은 삼국시대 조조가 쓴 것이고, "병법"에 언급하는 "손자"는 춘추시대의 오자서(伍子胥)라는 것이다. 1972년 임기 은작산에서 죽간이 출토되기 전까지 각측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고, 쟁론이 끊이지 않았었다. 근대에는 심지어 외국학자들까지도 논쟁에 가담한다.


임기한간본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이 오래 지속되던 역사논쟁은 종지부를 찍는다. 역사의 원모습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임기한간의 출토는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손무와 손빈은 역사상 진실로 존재했던 두 명이 인물일 뿐아니라, 각각 "병서"를 써서 세상에 전했다. 동시에 <사기>, <한서>등 초기문헌기록의 진실성이 입증되었다.


임기에서 출토된 두 부의 죽간본 "손자병법"은 현존하는 최초의 <손자병법> 판본이다. 개략 서한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작자의 원시사상에 가장 접근한 판본이다. <손자병법>을 연구하는데 고귀한 자료를 제공하므로 문헌으로서의 가치는 특별하다. 죽간본 <손자병법>은 200여매의 죽간이 현존하고 2300여자를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때 판본인 <손자병법>과 비교하면, 죽간본 "병법"이 보존한 내용은 전체서적의 약 3분의 1이다. 비록 잔서(殘書)이기는 하지만, 죽간본은 여전히 송나라판본과 100여곳의 상이점이 있다. 그외에 죽간본은 소량의 일문(佚文)도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죽간본 <손빈병법>은 이 병서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니, 그 가치는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