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여권(Passport, 護照)의 역사

중은우시 2017. 11. 2. 00:17

글: 왕린(王麟)





아주 얇은 작은 책자가 있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지정한 국가간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출국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 일단 분실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이 작은 책자가 바로 "여권"이다. 기실, "호조(護照, 여권의 중국명칭)"이라는 명칭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이다. 그러나 여권의 역사는 중국이든 외국이든 역사가 모두 아주 오래되었다.


기원전5세기의 페르시아제국에서 여권과 유사한 공식증명문건이 있었는데, "통행허가증"이라고 불리웠다. 고대중국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권과 같은 공식통행허가증이 있는데, "통관문첩(通關文牒)"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통관문첩"이라는 명칭은 명나라때 나타났다. 이전에는 "통관문첩"을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다. 예를 들어, 하상주(夏商周) 시대에는 "규장(圭璋)"이라고 불렀고, 춘추전국,진한시기에는 "봉전(封傳)", "부절(符節)"이라고 불렀다. 당나라때는 "과소(過所)", "관첩(關牒)"이라고 불렀다. 송나라때는 이름을 바꿔서 "관인(關引)", "부조(符照)"라고 불렀다. 원나라때는 "공험(公驗)", "요패(腰牌)"등등으로 불렀다. 비록 기나긴 역사발전과정에서 "통관문첩"의 명칭은 서로 달랐고, 기능도 서로 달랐지만, 그 본질은 모두 정부가 발급한 통행증명문건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통관문첩인가? 쉽게 얘기하자면, 통관문첩은 바로 관구(關口)를 통과할 때의 신분증명이다. 정부가 발급한다. 지금의 여권이나 신분증과 비슷하다. 그러나 문첩상의 황제옥새대인은 국가의 비자에 상당한다. 통관문첩의 위에는 보유자의 성명을 기재하는 외에 간결한 언어로 출관의 목적을 언급한다.


상고시대에 국가가 나타나면 반드시 국경의 경계가 나타난다. 국가간에는 서로 사절이 오가는데, 전문적인 물건으로 상대방의 신분을 증명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하상주 삼대에는 사절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을 "규장"이라고 불렀다. 이는 일종의 아주 진귀한 옥기(玉器)이다. 이를 진위를 감별하는 신물로 썼던 것이다. 사절의 신분을 확인하고 정보가 정확한믕 롹인한 후, 비로소 국경을 넘어들어올 수 있었다. 이를 보면, "규장"은 세계 최초의 "통관문첩"이라고 봐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시대가 되면, 또 다른 유형의 '통관문첩'이 등장한다. 바로 '봉전'이다. 이는 당시 관청이 발급하는 일종의 문서인데, 국경을 나가거나 전용수레를 타고 역참에 투숙할 수 있는 증명서이다. 일반적으로는 나무로 만들었다. 태사공 사마천의 <사기>에는 제(齊)나라 맹상군이 봉전의 내용을 변경하는 방식으로 신분성명을 바꾸고, 최종적으로 관애(關隘)를 빠져나가 도망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칠국쟁패의 전국시대에 각 제후국 사이는 마음대로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관문첩"과 기능이 같은 관방문건으로는 "부절"이 있다. 이는 선진시기에 나타났고 당나라때까지도 사용했다. 그렇다면 "부절"의 기능은 무엇인가? "부(符)"라는 것은 정치와 군사와 관련된 증빙신물이다. 그것은 신분증명에 쓸 수도 있고, 국경, 관문, 군영, 요새를 드나드는데도 쓸 수 있다. 또한 명령을 전달하고 병사를 이동시키는 신물이기도 하다. "절(節)"은 군주가 보낸 사절이 지니는 증빙이다. 이는 군주를 대표하여 출정, 절제, 감찰, 중요사건처리, 외국사신으로 나가는 것등 중요한 사무의 증명이다. 부절은 기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동(調動)부절"과 "우전(郵傳)부절" "신분부절"과 "전사(專使)부절"이 그것이다. 그중의 신분부절과 전사부절은 통관문첩과 동일하다.


당나라에 이르러, "과소"라고 칭하는 통행증명문건이 나타난다. 그것은 두 가지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수륙의 관문을 통과할 때 내보이는 통행증명서이다. 다른 하나는 통신병이 관소를 통과할 때의 증명물건이다. 즉, 대당은 변방에 설치한 관문 혹은 초소를 통과하는데 쓰는 통행문건이다. 과소를 이용하여 여행하는 사람을 조사할 수 있고, 세금탈루도 막을 수 있고, 정상적인 상업무역거래를 보증할 수 있다. 그리고 부역을 회피하거나 사람을 납치하거나, 국외에서의 파괴활동을 막는데 쓸 수 있다. 당나라때의 과소는 중앙 상서성(尙書省) 혹은 지방도독부(都督府)나 주(州)에서 발급했다. 과소를 받은 사람은 전국각지를 돌아다닐 통행증을 가진 셈이다. 당나라때, 또 한 가지 통관허가문서가 등장하는데 바로 "관패"이다. 그러나 "과소"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당나라이후에 나타난 "관인" "공험" "부조" "요패"등 신분증명은 성격이 '통관문첩'과 대동소이하다.


국외에서, '통관문첩'의 출현은 연대가 중국과 비교하면 늦다. <느헤미야기(구약)>의 기록에 따르면, 외국에서 최초로 통관문첩이 나타난 것은 기원전5세기의 페르시아왕국이다. 당시는 역사상 아주 유명한 페르시아황제 아르탁세륵세스가 재위하던 시기이고, 그는 자신의 부하 중 느헤미야라는 서기관에게 통행허가증을 발급해줘서, 페르시아제국의 각 행성에서는 그 통행허가증을 보면 모두 보내주라고 요구한다.


1414년, 영국국왕 헨리5세는 의회법안에서 대영제국 최초의 "통관문첩"을 발급할 것을 선언한다. "안전통행증"이라고 불리웠다. 이들 통행증은 황제 본인이 서명하여 발급하고, 본국국민과 외국인이 모두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당시의 영국정부가 단지 본국국민에게만 발급비용을 받았고, 외국인에게는 무료였다는 것이다.


1540년부터 영국의 통행증발급은 추밀원(樞密院)이 관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때부터 공식적으로 "Passport"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지금 영국에는 연대가 가장 이른 여권을 보관하고 있는데, 국왕 찰리1세가 발급한 것으로, 시간은 1641년 6월 18일이다. 8년후인 1949년 1월 30일 찰리1세는 영국의 호국공 크롬웰에 의하여 단두대로 보내어진다.


20세기 초기에 이르러, 여권의 외관도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전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여권과 동일한 모양으로 바뀐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권은 영국의 <1914년영국국적및외국인신분법안>의 관련규정에 따라 발급되었다. 여권은 단지 1장의 종이였고, 접을 수 있었다. 바깥은 딱딱한 가죽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이 여권은 겨우 2년간 사용하다가 폐지된다.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여권설계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권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때문에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여권은 비록 1장짜리 종이이지만, 사진과 서명이 필요했다. 다만 동시에 더 많은 개인정보를 기록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얼굴형, 피부색, 개인특징등이다. 만일 이런 요구에 따라 정보를 모조리 기재하고나면 사람들이 까무러칠 것이다. 한번 보자. 이름: 장삼, 나이 18, 얼굴형: 넓다. 코: 크다. 눈: 작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정보를 보고 정국정부의 여권발급부서가 화사첨족을 했다고 생각하고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