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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장비의 후손은...?

by 중은우시 2018. 1. 4.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고금이래로 호랑이아비의 뒤에 개같은 자식들이 아주 많았고, 호랑이같은 자신은 오히려 적었다. 삼국시대 최고급의 장수인 장비의 경우에도 그의 차남인 장소(張紹)는 말 그대로 견자(犬子)였다. <삼국연읭>에서도 할 수 없이 장비가 죽은 후에 요절한 장남 장포(張苞)를 가지고 얘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에서 장비의 장남 장포에 대하여는 정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지>에서 장포에 관한 기록은 겨우 5글자이다: "장자포, 조요(長子苞, 早夭)" 고한어에서 "요(夭)"는 단명했다는 뜻이다. "어리거나 젊어서 죽는 것을 요(夭)라고 한다" 장포는 도대체 얼마나 일찍 죽었을까? <삼국연의>에는 그가 촉한 건흥7년(229년) 제갈량의 이출기산(二出祁山)에 따라나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ㅈ로, 장포의 사망시기는 그것보다 훨씬 빠르다. 그는 말을 몰아 출정하여, 전쟁터에서 종횡무진하며 용맹을 떨치고, 부친의 장판교에서의 위명을 본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장비에게는 모두 이남이녀가 있었다. 장남인 장포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221년 장비가 죽은 후에 그의 작위는 차남인 장소가 물려받는다. 장포가 비록 요절했지만, 그는 생전에 아들 하나를 둔다. 장준(張遵). 장준은 촉에서 관직이 상서(尙書)에 이른다. 이 장비의 손자는 촉한이 멸망하는 263년, 제갈첨(諸葛瞻)과 함께 면죽(綿竹)을 방어하다가 전투에서 죽는다.


이 몇몇 인물의 역사기록으로 추단해보면, 장포는 아마도 221년 이전에 죽었을 것이다. 즉 그가 부친 장비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의 승계방식으로 봐서 장비의 사후에 작위를 마땅히 장남인 장포가 승계하였을 것이고, 장포가 죽은 후에는 다시 그의 아들인 장준이 승계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비의 서향후(西鄕侯) 작위는 기본적으로 못난이인 차남 장소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장비는 영걸이었고, 위명을 천고에 떨쳤지만, 장남 장녀가 차례로 요절하고, 차남차녀는 위나라에 투항한다. 겨우 손자 한 명만이 역사책에 충열로 이름을 남겼다. <삼국연의>에서 비록 장포는 말타기와 활쑤기가 뛰어나며, 백포은개(白袍銀鎧)의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유비를 따라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서고, 제갈량을 따라 위나라를 정벌하러 나선 것으로 그려졌지만, 어쟀든 그는 젊어서 죽어야하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무후루향서풍쇄(武侯淚向西風灑), 위념무인좌국궁(爲念無人佐鞠躬)"의 탄식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