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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의 지장(智將) 랭킹

by 중은우시 2017. 8. 6.

글: 무릉산인(茂陵散人)


인터넷에서 삼국에 관한 글들을 많이 보면서, 스스로의 견해도 말하고 싶어졌다. 이 랭킹은 정사(正史)만 고려한 것이고, 삼국연의는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연의를 고려한다면 제갈량이 당연히 랭킹 1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사를 보면, 필자의 생각으로 제갈량은 랭킹10위내에도 들기 힘들다. 제갈량의 일생에서 필자는 단 한번도 '뛰어난' 전적을 보인 적이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뛰어난' 전적이라 함은 속유의 맹량강전투같은 것이다. 전투국면의 파악, 시기의 파악, 그리고 전술운용이 딱 들어맞아야 하고, 군대의 이동도 출신입화해야 한다. 이런 전투를 제갈량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제갈량의 작전은 안전하게 자리잡고 안전하게 싸우는 것이고, 전술의 신축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의 5차에 걸친 북벌은 모두 성공할 희망이 없었다. 설사 상대방이 조진과 사마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갈량의 이런 작전으로는 실력이 비교적 약하고, 양초운송에 곤란을 겪는 촉국이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제갈량은 내정에서 성공했지, 군사에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삼국에서 크고작은 수백번의 전투가 있는데, 횡으로 비교하기는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지장들이 서로 싸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표, 속유, 팽덕회, 설악, 손립인, 호련의 몇몇 장수들에게 랭킹을 매기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서로 다른 사람은 서로 다른 답안을 내놓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단지 개인적인 견해만을 얘기할 것이다. 이 글은 그저 한번 비교해보는 것이다 주로 뛰어난 전투의 횟수와 뛰어난 정도이다.


1위: 육손(陸遜)


육손이 참여한 몇번의 전투에서 매번 전술을 운용하는 것이나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나 아주 멋졌다. 여몽이 형주를 습격할 때 육손은 속이 깊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첨안, 진풍을 진공할 때는 시기를 잘 잡았다. 이릉전투에서, 육손의 뛰어난 점은 최소한 4개이다: 첫째, 유비가 적군을 깊숙히 유인하려는 계책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둘째, 병력을 나누어 손환을 구하러 보내지 않았다. 셋째, 유비의 병력배치에서의 약점을 알아처리고 예상못한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넷째, 조비가 반드시 기회를 노려 강탈하려 한다는 것을 예상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병력운용의 정묘함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후 육손은 일련의 뛰어난 전투를 벌인다. 석정전투에서 조휴의 판단에 대하여 정확히 했다. 가화5년의 양양전투에서도 좌회불란(坐懷不亂)하여 평온하게 철수한다. 모두 뛰어난 전투이다.


2위: 사마의(司馬懿)


관우의 북벌때, 사마의는 조조에게 계책을 올려서 처음 두각을 보인다. 나중에 맹달을 생포하고,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다. 요동을 평정하고 고평릉의 사변을 평정하며, 왕릉의 난을 평정한다. 매번 뛰어난 표현을 보인다. 시기도 정확하게 장악한다. 특히 요동을 평정할 때에는 성동격서, 일긴일이(一緊一弛)로 공손연을 가지고 논다. 용병여신(用兵如神)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기실 요동의 전투는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마의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오 이처럼 멋진 전투를 이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의 후반 2번의 북벌을 상대하면서, 기실 제갈량의 전투방식으로 보면 양식이 끊어진 후 철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일대로(以逸待勞)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원래 사마의를 랭킹 1위로 올려놓으려 했는데, 매번 전투에서 모두 강한 군대로 약한 상대를 이겼기 때문에 비록 멋지게 싸우긴 했지만,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2위로 올리게 되었다.


3위: 조조)曹操)


그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포를 평정하고, 장수와 싸우고, 원상을 평정하고, 요동을 평정하고, 오환을 격파하고, 마초를 격파했다. 뛰어난 전투가 아주 많다. 관도, 창정(倉亭)전투에서는 더더욱 중국역사상 보기 드문 묘필(妙筆)이 있었다. 유일하게 미중부족한 부분은 조조가 때때로 자신감에 넘쳐서 승리후에 자만하여 왕왕 상대를 저평가했다는 것이다. 장수(張繡)와 적벽에서 모두 이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3위로 삼았다.


4위: 등애(鄧艾)


나는 삼국연의의 영향을 받아, 등애의 용병능력을 조금 저평가하고 있었다. 등애는 촉한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몇번 신출귀몰한 용병기교를 보여 주었다. 그중 곡성전투, 단곡전투, 적도전투의 세번의 전투는 모두 지피지기로 적을 요리하며 승리를 거둔다. 시기를 파악하는 것을 아주 잘했다. 음평을 기습한 것은 더더욱 뛰어난 부분이다. 아쉽게도 등애의 용병은 주로 촉한을 상대하는데 썼고, 다른 곳에서 시전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앞에서 얘기한 4명이 보여준 군사재능은 기본적으로 난형난제로 비슷하다. 아쉽게도 4명은 시종 정면으로 상대한 적이 없다. 내가 찾아낸 3번이상의 뛰어난 전투를 벌인 장수는 단지 이들 4명 뿐이다. 나머지는 왕왕 1번 또는 2번에 그쳤다. 예를 들어, 서황이 있다. 서황은 조위에서 여러번의 전투에 참가한다. 그중 뛰어난 것은 2번이 있다. 하나는 조조가 마초를 토벌할 때, 서황이 스스로 나서서 포판으로 진공하여 마초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는 아주 교묘했다. 둘은 형주의 포위를 푸는 것이다. 서황은 예상도 못하게 사총을 돌연 기습한다. 이것은 임표의 사평전투와 비슷하다. 확실히 그의 용병에 독보적인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우가 패배한 것도 억울할 것이 없다. 서황과 유사하게 장료의 뛰어난 전투도 2번이 있다. 제1차는 209년 천산전투이고, 제2차는 소요진에서 위력을 떨친 것이다. 두번의 기병전술은 모두 교묘하고 적절했다. 부족한 점이라면 두번의 전투 모두 용맹과 기습을 썼고, 모략은 비교적 적다는 것이다. 그외에 육항(陸抗), 주환(朱桓), 장합(張)등도 뛰어난 전투를 벌였다.


삼국에서 군사실력이 가장 약한 곳은 당연히 촉한이다. 촉한이 참여한 전투를 살펴보면, 뛰어난 전투가 거의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뛰어난 전투는 딱 2번있다. 제1차는 황충의 정군산(定軍山)이다. 이번 전투의 모략은 황충과 법정의 두 사람에게 공로를 돌려야 한다. 두번재는 243년의 흥세(興勢)전투이다. 이번의 방어후 반격은 멋졌다. 주요 기획자는 왕평(王平)과 비위(費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