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하후패(夏侯覇): 하후연의 아들은 왜 부친을 죽인 원수에게 투항했을까?

by 중은우시 2017. 10. 11.

글: 지역사(知歷史)


하후연(夏侯淵)은 삼국시대초기의 수퍼맹장이며, 조조의 심복이다. 남정북전에서 혁셕한 전공을 세운다. 한마디로 말하면 "호보관우(虎步關右)"이다. '호보'는 휩쓸고 다닌다는 뜻이고, '관우'는 동관의 서쪽 즉, 장안을 비롯한 관중지역을 말한다.다만, 정군산(定軍山) 전투에서 촉중괴재(蜀中怪才) 법정(法正)의 계책에 말려, 황충의 칼에 일도양단되고 만다. 


하후연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각각 하후패, 하후위(夏侯威), 하후혜(夏侯惠), 하후화(夏侯和)이다. 하후연의 이 4명이 아들은 모두 능력이 출중했고, 각각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하후사걸(夏侯四傑)이라 불렸다. 여기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하후사걸"중 가장 유명한 하후패이다.


하후연이 정군산전투에서 촉한 군대와 교전하는 중에 촉한대장 황충에게 참살된 후, 하후패는 항상 이를 갈았다. 그는 부친 하후연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결심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병서를 읽어서 나중에 편장군(偏將軍)이 된다.


239년, 위명제(魏明帝) 조예(曹睿)는 어린 아들을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에게 맡긴다. 하후패는 조상의 중용을 받는다. 244년, 위나라황제 조방(曹芳)은 하후패를 토촉호군우장군(討蜀護軍右將軍)에 임명하고, 박창정후(博昌亭侯)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고 그에게 군대를 농서에 주둔시키도록 명한다. 하후패는 농서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위나라와 현지 소수민족의 관계를 개선하여,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는다. 같은 해, 하후패는 하후유(夏侯儒)를 대신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을 맡는다.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속하여 지휘를 받았다.


249년, 사마의는 정변을 일으킨다. 원래 위나라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장군 조상을 죽인다. 조상의 사촌동생이며, 하후패의 당질인 정서장군 하후현(夏侯玄)을 사마의는 전선에서 경성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곽준(郭準)으로 하여금 그의 지위를 대신하게 한다. 하후패는 평소에 곽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번에 반드시 그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주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촉한으로 들어갔고, 음평에서 길을 잃고 양식마저 떨어져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촉한은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 하후패을 맞이한다.


200년에 하후패의 당매(堂妹)인 하후씨는 외출하여 나무를 하다가 촉한의 중신 장비에게 발견되었고, 장비는 그녀를 처로 삼는다. 그리고 그녀는 장비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낳는다. 그녀가 낳은 딸은 후주 유선(劉禪)의 황후가 된다. 그래서 하후패를 접견할 때, 유선은 그를 이렇게 안심시킨다: "너의 부친은 스스로 교전중 전사한 것이다. 나의 선배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도 하후씨의 후손이다." 하후패는 그리하여 촉한에서 중용된다. 그리고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된다.


하후패가 촉한에 투항한 후, 촉한의 총사령관 강유(姜維)는 하후패에게 의견을 구한다: "사마의는 이미 위나라의 조정을 장악했다. 네가 보기에 그가 다른 나라를 정벌할 생각이 잇느냐?" 하후패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지금 내부사무를 경영하고 정리하고 있다. 아직 대외정벌을 신경쓸 겨를이 없다. 다만 종회(鍾會)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비록 젊지만, 만일 조정을 관리한다면, 앞으로 오, 촉에 우환이 될 것이다."


그후 하후패는 여러번 강유의 위나라와의 전투에 참가한다. 255년, 위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던 사마사(司馬師)가 병사한다. 강유는 그 기회를 틈타 하후패, 정서대장군 장익(張翼)등과 함께 수만명을 이끌고 적도(狄道)를 나가 병력을 3로로 나누어 위나라를 북벌한다. 도서(洮西)에서 위나라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대패시킨다. 왕경의 부하들중 수만명이 전사한다. 왕경은 적도성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강유는 적도성을 공격하고, 위나라는 정서장군 진태(陳泰)가 병력을 보내어 포위를 풀어준다. 강유는 그리하여 병력을 물려 종제(鍾題)에 주둔한다. 


정사에서는 하후패가 촉한에 투항할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증에 따르면, 하후패는 칠십여세까지 살다가 선종(善終)한다.


소설 <삼국연의>는 하후패를 하후연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고 고친다. 하후패는 궁술과 마술에 능숙하고, 조상이 추천한 심복부장이었다. 여러번 촉한의 침입을 막아낸다.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할 때, 수회합도 되지 않아 요동대장군 비연(卑衍)을 베어버리고, 요동군은 크게 혼란에 빠진다. 나중에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키고 조상이 피살되면서 하후현도 직위에서 쫓겨난다. 하후패는 사마의의 야심을 눈치챘고,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곽준에게 격패당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부득이하게 촉에 투항한다. 하후패가 촉에 투항할 때는 이미 나이가 많은 장수였다. 하후패가 촉에 있을 때 강유를 따라 북벌에 참가했고, 십회합도 싸우지 않고 곽준을 격패시켜 강유를 구해낸다. 마지막에는 도양전투에서 등애(鄧艾)에게 기습을 당해 사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