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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여범(呂範): 삼국연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숨은 명장

by 중은우시 2017. 10. 30.

글: 여빈(呂斌)


여범은 젊었을 때 단지 여남군(汝南郡)의 현리(縣吏)에 불과했다. 그러나 풍채가 뛰어났다. 성안에 유(劉)씨성의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부유하고 딸이 아주 예뻤다. 여범이 그 집을 찾아가서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유씨의 모친은 여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혼사를 응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님이 보기에 여자형(呂子衡, 여범)이 가난하게 살 상입니까?" 그 뜻은 여범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범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정한다.


나중에 여범이 난을 피해 수춘(壽春)으로 가는데 거기서 원술(袁術)의 수하로 일하고 있던 손책(孫策)을 만난다. 손책은 여범이 남다르다고 보아, 예의로 대한다. 그리하여 여범은 자신의 백여명 문객을 손책에게 넘겨서 지휘를 받게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손책을 따른다. 당시 손책의 모친 오부인은 강도(江都)에 있었는데, 손책이 여범을 보내 오부인을 곡아(曲阿)로 모셔가게 한다. 모친을 잠시 처남인 오경(吳景)의 집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을 원술이 보낸 간첩이라고 여겨서 각 현에 여범을 수배한다. 여범은 그 사실을 알고서, 친히 능력있는 자를 뽑아서 제자를 데리고 몰래 오태부인을 맞이하여 모셔가게 하고, 다시 신속히 손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당시 손책은 아직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수하로는 단지 여범과 친척인 손하(孫河)만이 항상 곁을 따를 뿐이었다. 여범은 군대를 이끌고 횡강(橫江), 당리(當利) 일대에서 장영(張英), 우미(于)등을 습격하여 격패시키고, 남하하여 단양(丹楊), 호숙(湖孰)을 함락시켜 호숙상(湖孰相)의 관직을 받는다. 손책은 말릉(陵), 곡아(曲阿)를 함락시킨 후, 작융(笮融), 유요(劉繇)의 잔여부대를 재편한다. 그리고 여범에게 병사2천과 말 50필을 증원하여 보내준다. 그후 여범은 완릉령(宛陵令)이 되어, 단양(丹陽)의 도적무리를 물리친다. 오군(吳郡)으로 되돌아온 후에는 도독(都督)이 된다.


그때 하비(下邳)의 진우(陳禹)는 스스로 오군태수(吳郡太守)를 칭하면서 그 지역을 차지하고 해서(海西)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의 호족인 엄백호(嚴白虎)와 결탁하였다. 그리하여 손책은 친히 병력을 이끌고 엄백호를 토벌하러 간다. 별도로 여범과 서일(徐逸)을 보내 진우를 치게 한다. 여범의 군대는 적군을 대패시킨다. 그리고 대장 진목(陳牧)의 수급을 벤다. 진우는 패배한 후에 원소(袁紹)에게 투항한다. 그후 여범은 손책을 따라 능양(陵陽)의 조랑(祖郞), 용리(勇里)를 지키고 있던 태사자(太史慈)를 친다. 전후로 7개현을 평정한다. 그리하여 정로중랑장(征虜中郞將)이 된다. 그리고 다시 강하군(江夏郡)을 정벌하고, 돌아와서 파양(鄱陽)지구를 평정한다.


200년(건안5년), 손책이 병사하고, 여범은 오군으로 돌아와서 문상을 한다. 그후 손책의 동생 손권이 동오의 세력을 장악하고 군대를 넘겨받는다. 다시 강하를 정벌하고, 여범은 명을 받아 중신 장소(張昭)와 근거지 오군을 유수(留守)한다.


208년(건안13년), 적벽대전때, 여범은 주유를 따라 적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운다. 적벽지전후 비장군(裨將軍)이 되고 팽택태수(彭澤太守)가 되어 팽택, 시상(柴桑), 역양(歷陽)의 세곳을 봉읍으로 받는다. 


그 후, 유비는 친히 건업으로 가서 손씨와 혼인관계를 맺는다. 여범은 일찌기 유비를 연금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계책을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나중에 여범은 평남장군(平南將軍)이 되어 시상에 주둔한다.


219년(건안24년), 손권은 유비와의 동맹을 깨고 형주를 지키고 있던 관우를 기습하기 전에, 일찌기 여범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초 너의 건의를 들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관우를 공격해야하니 네가 나를 도와 건업을 잘 지켜달라." 그 결과 손권은 관우를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군대를 이끌도 돌아와서 무창(武昌)으로 도성을 옮긴다. 여범은 건위장군(建威將軍)이 되고, 완릉후(宛陵侯)에 봉해지며, 단양태수가 되어, 구도(舊都) 건업(建業)을 다스린다. 그리고 부주(扶州) 이남으로 남해(南海)지구까지 일대의 군대를 감독하며, 율양(溧陽), 회안(懷安), 영국(寧國)을 식읍으로 받는다.


나중에 위나라장수 조휴(曹休), 장료(張遼), 장패(臧覇)가 군대를 이끌고 동오로 진격한다. 여범은 서성(徐盛), 전종(全琮), 손소(孫韶)등 장수를 이끌고, 수군으로 동구현(洞口縣) 일대에서 적을 막는다. 그때 여범은 전장군가절(前將軍假節)을 받았고, 남창후(南昌侯)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전선에서 대풍이 불어, 수군선박이 연이어 전복하고, 병사들도 물에 빠져서 익사한다. 죽은 자가 수천에 달한다. 그래서 철군하여 다시 지켰다. 그렇지만 회군후, 여범은 여전히 양주목(揚州牧)에 임명된다.


여범은 풍채가 좋아서 여러 사족자제(士族子弟)들 예를 들어 육손(陸遜), 전종등이 공경했고, 갑히 경박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여범의 거소와 입은 복식은 당시에 아주 호사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일을 하는데서는 법도를 준수했다. 그래서 손권은 그의 충성스러움과 부지런함을 좋아했고, 그의 호화사치를 질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손권의 앞에서 여범과 하제(賀齊)의 장식이 아름답고 화려하여 군왕과 비슷하다고 이간한 적이 있다. 그때 손권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관중이 예의에 어긋나는 잘못이 있어도, 제환공은 관용으로 대했고, 결국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 자형(여범), 공묘(하제의 자)는 이오(관중)의 잘못도 범하지 않았고, 그저 장식에서 좋은 것을 썼고, 선박과 수레를 잘 정비했을 뿐이다. 이것은 그저 군대의 모습을 바꾼 것일 뿐인데, 통치에 무슨 손해가 되겠는가?" 그 사람은 다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228년(황무7년), 여범은 대사마(大司馬)가 된다. 그러나 인수(印綬)를 미처 받기도 전에 병사한다. 손권은 그를 위하여 소복을 입고 문상한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어 인수를 추증한다. 나중에 건업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손권은 여범의 묘를 지나는데,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친다: "자형!" 그리고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손권은 도성으로 돌아온 후, 다시 영을 내려 태뢰(太牢)의 예로 여범을 제사지낸다(돼지, 소, 양의 삼생(三牲)을 모두 갖추는 것을 태뢰라 한다. 이는 고대 천자가 사직천지에 제사지낼 때 쓰는 대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