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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淸), 일(日)의 두 고찰단이 서방에서 서로 다른 성과를 거둔 이유는?

by 중은우시 2017. 8. 6.

글: 정만군(程萬軍)


1869년, 청나라정부는 만주족 지강(志剛, 기명해관도)과 한족 손가곡(孫家谷, 예부낭중)을 핵심으로 하는 "방서단(訪西團)"을 파견한다. 사절단의 단장은 큰 돈을 들여 모셔온 외국인이다. 미국인 포안신(浦安臣, Anson Burlingame,1820年11月14日-1870年2月23日)이다. 사절단은 상해에서 출발하여 먼저 미국 워싱턴으로 간다. 그 후에 런던, 파리, 스웨덴, 덴마크와 네덜란드, 베를린으로 간다. 1870년 2월, 생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는데, 여기에서 단장인 포안신은 과로로 돌연 사망한다. 지강, 손가곡은 계속 사절단을 이끌고 반년이 더 지난 후 중국으로 돌아온다.


중국 최초의 '사절단'이 출반한 후 2년이 지나서, 일본정부도 서방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구미사절단(歐美使節團)"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巖倉具視)를 정사(正使)로 하고, 내각중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과 야마구치 마스카(山口尙芳)등을 부사(副使)로 하였는데, 사절단은 거의 메이지정부의 모든 중요부서를 포괄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 고찰단은 당시 중국의 서방고찰단과 비교하였을 때, 시간이 늦고, 규모는 작았다. 그러나 전자는 이미 역사에서 잊혀졌지만, 후자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그 시절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청국은 일본보다 먼저 서양의 충격을 받았고, 청나라가 서방에 고찰단을 보낸 것도 일본보다 2년이나 빨랐다.


청나라정부가 계속 생각하고 잊지 않았던 것은 구미에서 어떤 문명의 비결을 얻어오는 것보다 "예의체면"의 문제였다. 구미국가들에게 중국이 "새로 떠오른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서방고찰단의 주요임무였다. 그래서 서방고찰단은 1년반의 순방을 하였지만, 무슨 가치있는 고찰보고서같은 것은 내놓지도 않았다.


당연히, 글하나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강 대인은귀국후에 <초사태서기(初使泰西記)>라는 책을 썼다. 책안의 "파리고찰기"를 보면, 그가 주로 기술한 것은 서방발레를 본 감상이었다. 여러번 찬탄한 후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서양무도가 좋기는 아주 좋지만, 중국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理)을 정(情)보다 중시하지만, 서양은 정(情) 보다 이(理)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춤은 서방에서 출 수는 있지만, 중국내로 들여올 수는 없다. 프랑스에서 지강은 남녀가 무리를 지어 해변의 해수욕장에 모여서 '바다목욕'을 하는 성황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남자들은 수영복만 걸치고, 여자들은 거기에 '배심(背心)'하나만 추가한다고 한다. "멀리서 이 일을 듣고는 가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바빠서, 한번 가서 보지를 못했다."


이렇게 즐기는 기행문에 무슨 고찰도 없다. 그저 관광객이나 하는 일이다.


그 후의 중국사절단의 방문성과도 대동소이했다. 이홍장이 구미 8개국을 발문할 때, 각국은 이미 고찰단으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경제무역단으로 예우했다. 그들은 청나라관료의 방문을 대부분 "경제무역여행"으로 보도했다. 이홍장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정부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지만, 독일상계로부터 융중한 환영을 받는다. 이홍장은 독일 군수물자의 최대고객이었다. 독일상계는 그를 통하여 중국시장을 더욱 개척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비지니스협상을 하고, 공장을 참관하고, 곳곳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환대했다.


그저 관광과 쇼핑만 하면서 세계의 대세는 알지 못했던 중국사절단은 당시의 국제무대에서 여러번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의 사명은 원래 중국 최초의 사절단과 대동소이했다.구미국가와 외교협상을 통하여, 막부말기이래 대외적으로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수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의 현실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서방이 강성한 근원이 외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치(內治)'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주요구성원들은 외교사명은 내버려두고, 몇 개의 소조로 나누어 주요 정력을 서방의 '헌정제도, 공상체제와 교육학술체제'를 이해하는데 쏟는다.


이와쿠라사절단은 2년이 시간을 들여서 고찰했고, 전후로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등의 나라를 방문했다. 비록 조약수정요구는 만족스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지만, 서방이 강성하게 된 비결을 알아냈다. 특히 구미의 선진적인 제도를 학습하는데 얻은 바가 아주 많았다.


기도 다카요시는 처음 방문한 미국에서 영혼을 건드리는 인식을 얻는다. "일본문명은 진정한 문명이 아니다." "일본은 잠자면서 이천년을 보냈다." 프랑스 파리에서 서방의 번영을 보고 기도 다카요시는 마침네 철저히 깨닫는다. "우리는 서방국가가 자연히 이렇게 되어싸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재부와 번영은 많은 정도에서 1800년이후의 일이다." "파리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갈수록 문명은 누추해진다."


당시의 세계문명중심인 영국에서 이와쿠라사절단은 의회, 법원, 감옥, 학교를 방문하고, "유신삼걸"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절단 구성원들은 본 것을 거의 비슷하게 기록한다. 대영제국이 강성한 근본은 바로 "국민이 국가의 숭고한 정치적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가히 한 마디로 서방굴기의 근원을 설파한 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쿠라사절단은 영국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청나라사절단처럼 눈을 구매와 관광에 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정치와 학술원리였다. 그들은 이들 원리를 깨달았고, 이들 원리를 일본에 도입한다. 이렇게 하여 일본을 "문명이 누투한" 구동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1885년, 일본은 정식 입헌(立憲)을 하고, 내각제를 건립한다. 1889년, 일본은 정식으로 헌법을 반포하고, 제국의회를 설립하며, 의회는 중의원과 귀족원으로 구성한다. <대일본제국헌법>에 근거하여, 중의원 의원은 국민이 선출한다. 나이 25세 이상, 직접세 15원이상을 납부한 남자는 모두 선거권이 있다. 1890년, 일본은 제1회 국회를 개최하여, "모든 일을 공론으로 정한다" 이것은 아시아에서 최초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