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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숙순(肅順): 빈사상태의 청왕조를 살려냈지만, 청왕조에 의하여 잔혹하게 처형되다

by 중은우시 2017. 7. 13.

글: 아방단대장금(我方團隊張嶔)


1840년이후의 청나라말기역사는 쳐다보면 항상 울분이 인다. 특히 그중 함풍연간을 보면 더욱 울분이 일어 피를 토할 지경이다. 남쪽의 태평군(太平軍), 중원의 염군(捻軍), 그리고 조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영불연합군, 매년 이렇게 고난을 겪고 있었다. 이처럼 어지럽고 솥단지가 막 깨지려는데도 청나라가 힘겹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청왕조를 이 생사의 난국에서 구해낸 영웅이었던가? 이 시기에 풍운인물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중 공로가 가장 큰 것으로 따지자면, 현재의 청왕궁드라마에서 나쁜 직을 엄청나게 많이 저지른 '간신'으로 나오는 그 인물이다. 청왕조 함풍연간의 철완권신(鐵腕權新): 애신각라 숙순(愛新覺羅 肅順). 


1. 독한 말을 내뱉은 고관자제


맹자는 말했다: 하늘이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그의 근골을 힘들게 한다. 숙순을 보면, 이 말과 정반대이다. 그는 정친왕(鄭親王)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서 젊어서부터 북경성에서 잘 노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학자 설복성(薛福成)의 말에 따르면, "오로지 술과 먹는 것, 그리고 매와 개에 관련된 일(惟酒食鷹犬是務)"을 할 뿐이었다. 즉, 술마시고 먹는 것과 매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하는게 전부라는 말이다. 이는 환고자제(紈絝子弟, 방탕한 고관 혹은 부잣집 자제)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마음껏 놀면서 35살이 되었다. 즉 함풍황제가 즉위하던 1851년이 되었다. 이때, "하늘이 큰 임무"가 바로 숙순의 머리위로 떨어진다. 숙순의 셋째형인 단화(端華)가 함풍제의 측근이 되는데, 그는 그 기회를 틈타 동생 숙순을 함풍제에게 추천한다. 함풍제를 처음 만났을 때, '환고자제'인 숙순은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여 함풍제와 몇마디를 나누는데 바로 이렇게 말을 해서 함풍제는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깜짝 놀란다: "엄금령(嚴禁令), 중법기(重法紀), 제간귀(除奸宄)" 금지령을 엄하게 내리고, 법과 기율을 강화하고,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다.


이 말의 살상력을 어느 정도인가? 이때의 청왕조는 바로 내우외환이 가중되는 때였다. 그런데 신황제 함풍을 가장 화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일을 제대로하지 않는 관료들이었다. 청왕조의 관료사회는 함풍연간에 이르러, 일찌감치 상하가 모조리 부패한 지경에 이르고, 대소관료들이 모조리 이익만 챙기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숙순의 그 말은 마치 하늘에서 천둥이 치는 듯이 함풍제를 일깨웠다. 청왕조가 난관을 헤쳐나가려면 가장 먼저 관료사회부터 정돈해야겠다. 숙순과 같은 강인한 인물이야말로 기용할 만하다!


이 한마디 독한 말은 마치 하나의 못처럼 함풍제의 마음이 확실히 박힌다. 그리하여, 숙순은 자리를 확실하게 보장받는다. 숙순을 만난 후, 함풍제는 즉시 그를 내각학사(內閣學士)로 발탁한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관직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당시에 관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어사랑들은 상소를 올려 함풍제가 이렇게 환고자제를 중용하는 것은 머리가 이상해졌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함풍제는 눈이 먼 것이 아니었다.


민국시대의 학자인 비행간(費行簡)의 기록에 따르면, 일찌기 숙순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고관자제의 모습은 그가 스스로를 감추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기에 숙순은 아편전쟁의 참패 속에서 그는 놀라운 천부로 매일 놀고 먹고 마시고 사냥이나 즐기면서도 조용히 뛰어난 위관지술(爲官之術)을 익혔다. 비행간이라는 근대명인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면, "사람을 한번 만나면 평생 그의 모습을 얘기할 수 있었고, 사건기록을 한번 읽으면 평생 그 내용을 얘기할 수 있었다!"


이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함풍제의 총애를 받게 된 숙순은 금방 그에 대한 의문의 소리들을 잠재운다. 옛날의 환고자제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보물이 된다. 그후 몇년동안 먼저 호군통령(護軍統領)을 지내고, 다시 공부(工部)와 예부(禮部)로 간다. 이곳은 당시에 아주 시급한 일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숙순이 일을 맡으면, 금방 가볍게 처리되곤 했다. 일처리가 조리있었고 문란하지 않았다. 함풍제 초기의 청왕조 관료사회는 곤란한 일이 있으면 숙순을 찾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된다.


바로 이처럼 순조로운 관료의 길에서 천성적으로 오만한 성격의 숙순은 정치적 업적이 크면 클수록,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바로 대청왕조에 매년 골치아픈 사건들이 터지는 상황하에서 태평군, 염군, 영불연합군은 모조리 골치거리였다. 부요직상(扶搖直上)의 숙순은 갈수록 조급해진다. 그래서 어느 동료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심하게 처벌했다. 심지어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 주조배(周祖培)는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잘못하는 바람에, 숙순으로부터 그 자리에서 욕을 한바탕 얻어먹어야 했다: "너 같은 자는 하루종일 국가의 봉록을 받아먹는 것말고 무슨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는가?" 가련하게도 하루종일 아무런 스트레스없이 편안하게 지내던 주조배 대인은 이번에는 숙순의 분노앞에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2. 어린아이 울음도 그치게 만드는 반부패의 강자


그러나, 함풍연간이 흐르면서, 청나라의 국면은 갈수록 엉망이 되어 갔다. 숙순도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을 집행해야겠다고: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다!" 그래서, 함풍7년(1857) 숙순은 도찰원 좌도어사로 부임한 후, 감찰대권을 손에 움켜쥐고, 즉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대청왕조에서 19세기에 가장 강력한 반부패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숙순의 칼끝에 부딛힌 사람은 청나라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백준(柏)이었다. 그는 이전에 함풍제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던 노신이었으나, 함풍8년에 이익에 눈이 멀어서 그랬는지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한 순천과거스캔들을 일으킨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함풍제마저도 그를 중하게 처벌할지 말지를 망설였고, 백준 자신도 자신만만하여 감옥에 들어갈 때도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유배갈 때 입을 옷이나 잘 준비해 놓거라! 나같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일은 그저 밖으로 나가서바람을 피하면 되는 것이고, 군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다시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숙순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는가? 함풍제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제왕의 심리를 잘 읽는 숙순은 다시 함풍제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지금 국사가 위급하고, 각급 관리들이 서로 일을 미루고 있는데, 백준을 죽여서 천하를 놀라게 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함풍제의 마음 속에도 즉시 살심이 인다. 그 자리에서 바로 붓을 들어 결재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유배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백준은 "참입결(斬立決)"이라는 명령을 듣자, 그자리에서 놀라서 온몸이 마비된다. 사건에 관련된 90여명의 관리들도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모조리 엄한 처벌을 받는다. 중국과거사상 부정사례가 가장 심각한 '순천과거사건'은 숙순이 가장 피비린내나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천하의 선비들을 놀라게 만든 과거사건을 처리하는 동안, 숙순은 다시 단서를 찾아들어가서 사건금액이 엄청난 "호부은안(戶部銀案)"도 적발한다. 그리하여 경성에서 백성들을 착취했던 백명의 대소관리와 상인들이 모조리 잡혀서 가산을 몰수당한다. 그중 절대다수는 모두 경성의 왕공귀족이다. 회수한 금액은 수천만냥은에 이른다. 이는 당시 군사비가 모자라 고민하고 있던 함풍제에게 큰 도움이 된다. <노재소사>의 말에 따르면, 그 몇년동안 북경의 고관대작들의 집에서는 그저 '숙륙(肅六, 숙순이 여셧째이므로 이렇게 불렀다)"이라는 말만 들어도, 집안의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실로 흉노를 섬멸했던 곽거병과 맞붙어볼만하다.


이렇게 심한 방법으로 정돈해나가니 한때 부패로 얼룩졌던 청왕조의 관료사회가 상당히 성실하게 바뀐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수십년간 폐해가 없어졌다." 심지어 30년후의 광서연간에, 나이가 많이 든 청류노신이 이렇게 탄식앴다고 한다: "만일 숙순이 아직 살아있었더라면, 이들 탐관오리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릴 수 있겠는가?"


다만, 이어지는 청왕조 반세기의 국운으로 말하자면, 숙순의 또 다른 공헌이 더욱 의미크다고 할 수 있다: 용인(用人)! 즉 인재를 기용한 것이다.


3. 한 사람을 잘못봐서 앞길을 망치다.


청나라 권력귀족들의 눈에 이미지가 두렵고 또한 발호하는 숙순이 나중에 청왕조의 근대 양무운동을 일으킨 인재들의 눈에는 또 다른 친근한 이미지로 나타났다: "예현하사(禮賢下士)"


안목이 뛰어난 능신으로 숙순은 일찌감치 환고자제시절에, 인재들과 사귀는 것을 중시했다. 자주 경성에서 학문이 뛰어난 관리들과 형동생하며 지냈다. 함풍연간에 고속승진한 후에, 더더욱 인재를 갈구했다. 그의 문하로는 "숙문육자(肅門六子)"라는 인재풀이 있었다: 곽숭도(郭嵩燾), 왕개운(王闓運), 윤경운(尹耕雲), 고심섭(高心燮), 이수용(李壽蓉), 성강(盛康). 이들은 모조리 청나라말기 정치, 외교, 문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다. 더더욱 "숙문육자"의 견인하에, 경성에서의 각종 문인집회에 참석하여 현미경식으로 인재를 찾았다. 누구든지 크게 쓸만하다고 여기면 바로 그에게 관직을 주었다.


만일 이렇게 인재를 아끼는 방식을 중신이 자신의 개인세력을 키우는 통상적인 모델로 본다면, 숙순의 또 다른 조치는 그가 정치가로서의 담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왕조의 개국이래의 누습인 활족과 왕족이 병력을 장악하던 것을 타파한다. 증국번, 호림익등에게 남하하여 병력을 훈련시킬 대권을 부여한다. 심지어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히 나서서 증국번의 뒤를 봐준다. 증국번이 상군을 창건하는 가장 힘든 몇년동안, 증국번을 괴롭히는 각급관료들은 대부분 숙순의 손에 의해 처리된다. 이처럼 밀어주었기 때문에, 말년의 증국번은 이렇게 탄식한다: "숙순이 없엇다면, 상군이 태평천국을 평정하는 대업은 근본적으로 실현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숙순이 증국번에게 힘을 실어주던 몇년동안, 그는 또 다른 한가지 "작은 일"을 한다. 이는 더더욱 여러해 후 청나라말기의 휘황한 일의 복선이 된다: 당시에는 아직 호남순무이던 낙병장의 막료로 있던 대영웅 좌종당이 호남총독 관문의 모함을 받아서 함풍제에게 사형을 판결받는다.


바로 이 생사의 위기에, 숙순이 나서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함풍제의 앞에 선다. 그리고 직접 좌종당의 억울한 점을 얘기하지 않고, 간단하게 몇 마디 말로서 억울함을 표시한다: 좌종당이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바로 그가 낙병장의 아래에서 권력을 크게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낙병장이 태평군을 물리친 그 전공은 모조리 좌종당이 그 안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다고. 과연 그의 이 말은 다시 함풍제의 정곡을 찔렀다. '좌종당은 인재이다. 빨리 그를 풀어주라" 그리하여 나중에 좌종당은 신강을 회수하고 제정러시아를 물리치고 프랑스군을 치게 된다. 청나라말기 전투에서 휘황한 성과를 일궈낸 좌종당은 이렇게 숙순에 의하여 목숨을 건진 것이다.


숙순의 당시 교제범위를 보고, 다시 청나라 양무운동의 인재들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의 목숨을 50년간 연장시킨 인재풀은 이 안목이 탁월하고 수단이 강경했던 숙순이 일찌감치 준비해둔 것이었다.


다만, 숙순이 안팎으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이미 폐해가 무거웠던 청왕조는 결국 버텨내지 못한다: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다. 함풍제는 열하로 도망친 후 병으로 붕어한다. 임종전에 숙순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긴다. 동치황제가 죽위하고, 숙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여덟명의 대신이 보정(輔政)이 된다. 이것은 열하에 있던 숙순에게 이미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함풍제의 임종유언을 손에 쥐고, 어린 동치황제도 손에 쥐고 있다. 밖으로는 증국번이 중병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확실히 이제 대청왕조의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때의 숙순은 득의만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절정의 순간에 그는 한 중요한 여인을 잘못보았다. 동치제의 생모인 예허나라씨이다. 즉 자희태후, 서태후이다. 이 황제의 생모를 우습게 보면 안된다. 그러나 함풍제의 임종고명을 받은 숙순은 서태후를 무시했다. 매번 접견할 때마다 자기 하고싶은대로 했다. 팔대신 보정을 이끌면서도 서태후에 대하여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열하에서 함풍제의 영구를 북경으로 운구하는 도중에, 심기가 깊은 서태후가 일찌감치 정변계획을 완성해두었다. 숙순이 밀운에 막 도착했을 때, 서태후가 보낸 사람에 의하여 체포되고, 그 후에 처형당한다.


설복성 등이 남긴 사료를 보면, 1861년 십월, 숙순이 처형될 때, 이전에 반부패활동을 너무 심하게 했기 때문에 숙순은 모든 권력귀족집단에게 미움을 샀다. 형장에 오를 때, 많은 청왕조의 권력귀족들은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기뻐하며 쳐다보았다고 한다. 일생동안 고집셌던 숙순은 전혀 굽히지 않고, 형을 받을 때 계속 욕을 해댔다고 한다. 망나니가 먼저 그의 두 다리를 자르고, 다시 그의 목을 잘랐다고 한다. 행형장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조정 권력귀족들의 박수 속에 멀리 남방에 있는 숙순의 옛친구 증국번은 태평군과 싸우면서 장탄식을 한다: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렸구나. 


이 철완강자의 일샐을 되돌아보면, 증국번의 그 말이 어느 정도 공정한 평가인 듯하다.


숙순이 죽은지 50년후인 1911년의 청왕조는 마침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고관대작와 왕야들은 그저 울고불고 질질짜는 장면만 보여준다. 숙순 한명이 죽고나서, 제2의 숙순이 나타나서 대청왕조를 되살려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