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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영종(宋英宗) 조서(趙曙):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

by 중은우시 2017. 10. 30.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후궁 비빈이 3천에 이르는 황제는 아주 많다. 그러나,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는 보기 힘들다. 역사자료를 뒤져보면 이렇게 비빈을 두지 않은 황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송영종 조서이다.


송영종 조서와 황후 고씨(高氏)는 청매죽마(靑梅竹馬)의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 조서는 복안의왕(安懿王)의 13째아들이고, 송인종(宋仁宗) 조정(趙禎)의 조카이다. 고씨는 조황후(曹皇后) 언니의 딸이다. 두 사람은 어려서 선발되어 입궁했다. 당시 궁중의 사람들은 모두 조서를 "관가아(官家兒)"로 부르고, 고씨를 "황후녀(皇后女)"로 불렀다. 조서가 16살때 고씨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인종의 황자가 요절했기 때문에, 조서는 나중에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고씨도 당연히 중궁을 차지한다.


조서와 고씨는 혼인후에도 애정이 깊었다. 고씨는 4남4녀를 낳는다. 항제의 모든 자녀는 황후가 낳은 것이다. 이는 그 시대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다만 조서에 있어서는 기이할 것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비빈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사>, <장편(長編)>, <속자치통감> 내지 송나라때의 기타 필기(筆記)에 모두 조서가 비빈을 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채경(蔡京)의 아들 채조(蔡)가 쓴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는 일찌기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송영종은 "좌우에 모시는(侍御) 자가 없다." 송영종 치평연간, 병이 많던 조서의 신체가 호전되나 황후는 여전히 그로 하여금 궁인들을 임행(臨幸)하지 못하게 했다. 조태후는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심복을 보내어 조용히 고황후에게 권한다: "관가(황제)가 즉위한지 이미 오래 되었고, 지금은 몸도 이미 좋아졌는데, 어찌 좌우에 모시는 자가 하나도 없을 수있겠는가?" 고황후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대답한다: "가서 마마에게 전해라. 내가 시집간 것은 십삼단련(十三團練)이고, 관가에게 시집간 것이 아니다." 십삼단련은 조서와 결혼할 때의 직무이다. 그는 복왕의 여러 아들 중에서 열셋째였기 때문에, 송인종의 재위시, 어른들은 조서를 "십삼"이라고 불렀고, 송인종은 그를 단련사(團練使)"에 봉한다. 그래서 그를 "십삼단련"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나중에 궁밖으로 전해져서, 사대부들이 웃음거리로 얘기하곤 했다. 아마도 송영종이 나약하고, 고황후가 너무 드세다는 것일 것이다. 기실 고씨는 무슨 '하동사후'가 아니다. 조서도 '공처가'가 아니다. 조서는 비록 약간 우유부단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성깔있는 사람이었다. 고집을 부릴 때는 양모인 조태후에게도 대들었다. 그가 고황후를 존중하여 그녀의 의견대로 비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건강상의 이유 외에도 그들이 청매죽마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게도 그들은 백년해로를 하지는 못했다. 조서는 겨우 4년간 황제로 있다가 붕어한다. 당시 삼십여세의 황후 고씨만 남겨두고.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세상 일이라는게 다 그렇다. 만일 황제와 황후 부부가 이렇게 서로에게 충실하며 일생을 함께하며 손에 손을 잡고 같이 늙어갔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고, 동화일 것이다.


고태후(高太后)가 임조청정(臨朝聽政)한 초기에, 한편으로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등 노신을 기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경성내에서 이미 착공했거나 막 착공하려던 궁전, 부아(府衙), 사원의 건설을 중지시킨다. 각 주,부,현에서 징용해왔던 농민과 역부를 돌려보낸다. 황성의 군졸을 줄이고, 각급관리들의 가정, 탐관오리, 부패, 부정축재를 엄금한다. 자연재해를 입은 농민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한다. 이 조서가 내려가자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칭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태후의 동생 고사림(高士林)은 어려서부터 문과 무를 익히고 경사를 익혔고, 대의를 알았다. 문장을 잘 쓸 뿐아니라, 무략도 있었다. 사람됨도 정직했다. 내전숭반의 하급군관으로 경성기병부대에서 여러해동안 복무하며 책임을 다한다. 송영종은 그의 관직을 올려주려 했는데, 이때 송인종이 재위했을 때 외척인 조씨집안 사람들이 관직을 올려주었던 일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고황후는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황후가 되면서, 우리 친정집은 이미 고귀한 황친이 되었다. 그래서 나의 친정집안 사람을 올려주는데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 동생 사림은 이미 승진했고, 조정에서의 직위도 이미 과분하다. 어찌 여기서 더 올려주겠는가. 우리 고씨 가족들을 어떻게 조씨집안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 황후가 간절하게 사양하니 송영종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에 송영종은 다시 여러번 고사림의 관직을 올려주려 하지만 계속 고황후의 반대로 그만두게 된다.


송신종이 즉위하기 전에 외할아버지인 고씨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가 가장 불만이었던 일은 개국공신, 오조공신인 고왕부가 아주 낮은 기와집이었다는 것이다. 즉위후, 그는 여러번 외할아버지 고씨집을 큰 저택으로 만들어주려고 하지만 고태후가 계속 반대한다. 그후 고태후는 송신종이 계속 투덜거리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얘기한다: "부지는 내 스스로 선택하겠다. 그리고 건축비용은 모두 자신의 녹봉으로 지급하겠다. 대농(大農, 국가재정수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돈 한푼도 쓰지 않겠다." 송신종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민쟁리(與民爭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고태후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성의 북쪽 교외에 버려진 땅을 구입하여, 자신의 돈으로 친정을 위하여 저택을 지어준다.


재상 채확(蔡確)은 아부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생각에서 고태후의 백부인 고준유(高遵裕)의 관직을 복직시키려고 한다. 송신종 원풍4년(1081년) 겨울, 고준유는 송신종의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서정에 나섰다가 영무성 아래에서 서하군대에 참패한다. 송신종은 그의 관직을 박탈했고, 영주로 좌천시켜 한거(閑居)하게 했다. 하루는 채확이 고태후를 접견한다. 그때 이렇게 아뢴다: "고준유는 문무를 겸비하고, 변방을 지키는 군정의 요직을 여러해동안 지냈습니다. 여러번 전공도 세웠습니다. 대송의 서부변경을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영무의 패배는 우연한 사건입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송신종이 그를 엄히 처벌하여, 먼 곳으로 좌천보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관직을 원복시키켜야 합니다. 태후께서 허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고태후는 그의 말을 들은 후 이렇게 말한다: "고준유를 복직시키는 일은 절대 안된다. 영무의 패배는 일반적인 패전이 아니다. 이 전투는 거의 전군이 몰살당했다. 군민사상이 근 백만에 이른다. 재물손실은 더더구나 계산할 수조차 없다. 송신종이 아주 화가나서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송신종이 군법에 따라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외지로 좌천한 것이다. 이번 대재난은 고준유가 조성한 것이니 그가 죽음을 면한 것만 해도 이미 다행이다. 지금 송신종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저 개인적인 이유로 그를 복직시키고 천하의 공의에 어긋날 수 있겠는가?" 채확은 몹시 부끄러워 전전긍긍하며 물러났다.


<송사>에서 사흉(四凶)의 하나로 꼽은 대신 송용신(宋用臣)은 아부에 능했다. 그리하여 송신종의 신임을 받는다. 송신종이 재위하는 동안, 동서부를 건축하고, 경성을 축성하며, 상서성을 만들고, 원묘를 건립하는 등 모든 대공사는 그가 주도하여 한 일이다. 그는 직권을 이용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백성을 수탈했으며, 엄청난 재물을 긁어모았다. 조정에서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왕왕 그에 빌붙어서, 권세가 한때 대단했다. 고태후가 임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용신을 척주,태평주주세로 좌천시킨다. 송용신은 송신종의 유모에게 애걸하여, 고태후의 면전에서 그를 위해 좋게 말해주어서 관직을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유모는 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뵙는다. 고태후는 그 사정을 눈치채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슨 일로 왔느냐? 송용신의 복직을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해주겠다. 송용신같은 놈을 위해서 복직을 관청하는 것은 절대 안될 일이다. 네가 생각해봐라 내 아들이 재위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뒤로 부탁하는 것을 들어준 적이 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는가. 다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국정에 관여하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내가 너를 참하도록 명을 내리겠다." 유모는 크게 두려워하며,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때부터 궁중에서 뒤로 부탁하는 일은 없어진다.


<송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태후는 "임정 9년동안 조정이 깨끗하고 서하와는 평안하게 지낸다. 뒤로 부탁하는 일이 없어진다. 문사원에서 바치는 물건은 크고 작고를 떠나서 평생 하나도 취한 바 없다. 사람들이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엄격하고 원칙을 지키는 황후가 관리감독하고 있으면, 황제가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