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국(李治國)
남송이 원나라에 멸망한 후, 송나라와 관련된 역사는 점차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인 송공제(宋恭帝) 조현(趙顯)의 최종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4살때, 조현은 모친인 전태후(全太后)를 따라 함께 원나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즉 지금의 북경시로 끌려간다. 그후, 이 나이어린 남송이 마지막황제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 원세조 쿠빌라이는 조현 모자에게 예우를 잘 해준 편이었다. 조현을 영국공(瀛國公)에 봉한다. 쿠빌라이는 조현에 대한 첫인상이 괜찮았고, 그래서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한다. 마치 조현의 일생은 비록 황위를 잃어버린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일생을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다면 망국황제로서는 불행중 다행인 셈이다. 그러나, 일은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 중화민국때의 역사가 맹삼(孟森)은 이렇게 적었다: 원나라이 통치에서 가장 큰 결함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고,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광활한 중원지구를 더 잘 통치할 정치적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크고 작은 반원투쟁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의거는 송왕조 조씨가문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었다. 조현이 점점 자라면서, 그는 과거의 천진한 아린아이에서 점차 성숙한 성인남자로 변모한다. 쿠빌라이는 그에 대하여 경계를 강화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마침내 어느 순간 폭발한다. 아마도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날 밤 쿠빌라이가 악몽에서 깨어났는데, 꿈 속에서 그는 황금색 용 한 마리가 궁전의 기둥을 휘감고 있는 것을 본다. 그 용은 그를 향헤서 발톱을 내밀었다. 다음 날, 조현이 아침에 조회를 참석했는데 마침 쿠빌라이의 꿈속에서 황금용이 휘감고 있던 그 기둥아래에 서 있었다. 쿠빌라이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조현을 죽여버려 후환을 없애려고 생각한다. 마침 쿠빌라이가 자신의 측근과 이 일을 상의할 때, 공주와 조현이 그 소식을 듣게 된다. 공주는 밤을 새워 눈물을 흘리며, 쿠빌라이에게 조현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조현 자신도 매우 겁을 먹고, 이퇴위진(以退爲進)의 방법으로 쿠빌라이에게 출가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애걸한다. 자신이 중원에서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어, 조현은 적극적으로 티벳에 가서 라마가 되어 불법을 연구하는데 정진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쿠빌라이는 조현을 살려주게 된다.
지원25년(1288년), 조현은 라마가 된다. 그의 모친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조현은 이때부터 각종 티벳불교 경문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총명한 천부와 근면한 노력으로 조현은 금방 티벳어를 익히고, 점차 불법에 정통한 고승이 된다. 그는 <인명입정이론>, <백법명문경>등 각종 티벳불교경전을 번역하고 주해한다. 그리하여 합존법사(合尊法師)로 불리게 된다. 심지어 살가사의 주지로 추천받기도 한다. 조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조완보(趙完普)이다. 조완보가 아주 어렸을 때, 조현은 그를 삭발시켜 출가시킨다. 역사는 여기에서 끝난 것같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마지막 황제의 최종운명은 아니었따. 원영종 지치3년(1323년), 조현은 이미 53세가 되었다. 하루는, 그가 수십년동안 자신의 신분이 황제에서 라마로 크게 바뀐 것을 생각하며 시를 한 수 짓는다:
기어임화정(寄語林和靖)
매화기도개(梅花幾度開)
황금대하객(黃金臺下客)
응시불귀래(應是不歸來)
임포(매화시로 유명한 송나라초기의 시인)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다.
내가 고향을 떠나온 후로 매화가 몇 번이나 피었는지
연경(황금대는 하북성에 있음)에 머물고 있는데
아마도 고향에는 돌아갈 수가 없겠지.
이 시는 조현을 감시하던 자에 의하여 조정에 보고되고, 얼마 후 조현은 사사된다. 조현의 아들은 계속하여 라마로 있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순제때, 중원지구의 농민들은 농민의거를 일으킨다. 반란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많은 반란군은 송나라 조씨성의 황족을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정부는 다시 한번 우려하게 된다. 원나라조정은 조현의 아들인 조완보가 비록 라마이기는 하지만, 만일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되면 원나라통치에 불리할 터였따. 그리하여 ,지정9년(1349년) 오월, 원순제는 명을 내러, 조완보 및 친척을 모조리 편벽한 감숙성 사주(沙洲)에 안치시킨다. 그리고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게 조치한다. <황명본기>에는 조현의 이 자손들의 최종운명을 숨겨서 기록해 놓았다. 어느날 밤, 조현의 외숙인 오경전(吳涇全)은 꿈 속에 두 승려가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본다. 그중 한 승려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외조카입니다. 우리 부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나라조정에 의하여 살해당했습니다. 하늘에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외숙께서 종이와 붓을 도와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이때부터 사적에는 더 이상 그들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는다.
조현과 관련하여서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순지 토환테무르가 실은 조현의 친아들이라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북지구에서 라마로 있을 때, 조현의 곁에는 용모가 아름다운 처 한루루씨(罕祿魯氏)가 있었다. 한번은, 조현이 삭북 찰안(擦安)이라는 곳을 지나가는데, 마침 당시의 주왕(周王)이며, 나중에 원명제(元明帝)가 되는 화세랄(和世瓎)도 이 곳에 유배와 있었다. 조현과 한루루씨는 함께 가서 화세랄을 배알한다. 원명제는 한루루씨의 용모가 예쁜 것을 보고 아주 기뻐하여 그의 곁에 남아 있으라고 하여 소첩으로 삼는다. 한루루씨는 이때 이미 임신하고 있었고, 원명제의 소첩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를 하나 낳는다. 이 아이가 바로 나중의 원순제이다.
그리고 더욱 신화적인 전설도 하나 전해진다. 원명제가 삭북에 있을 때 조현과 관계가 좋았고 자주 교류했다. 어느날 아침에 원명제가 조현이 거처하는 불사를 지나는데, 돌연 불사의 상공에 용모양의 오채화문(五彩花紋)이 보였다. 그래서 깜짝 놀란다. 원명제는 그래서 조현에게 물어본다. 절에 무슨 기진이보라도 있느냐고. 조현이 대답한다: "무슨 보배는 없습니다. 그저 금방 사내아이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얼마전에 원명제는 아들이 막 요절했다. 당시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비범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아버린다.
조현과 원순제의 혈연관계에 대하여 여러 설이 내려온다. 어떤 사람은 조현이 이미 출가했는데 어찌 처가 있겠느냐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 점은 설명하기 쉽다. 티벳불교는 중원의 불교와 다르다. 티벳불교의 일부 파에서는 처를 두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원나라때, 티벳불교중 세력이 가장 강했던 녕마파(寧瑪派)는 바로 이런 유파이다. 그래서 조현이 처를 두고 아들을 낳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원순제의 혈통을 얘기하자면 징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혈통의 수수께끼를 떠올리게 된다. 징기스칸의 처가 메르키트인에게 끌려간다. 나중에 징기스칸이 메르키트인을 불리치고 다시 처를 빼앗아 온다. 회군하는 길에 장남 주치가 탄생한다. 징기스칸 자신도 주치의 혈통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주치'라는 것은 '손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치가 어른이 된 후에 비록 공을 많이 세웠지만 혈통원인으로 자신의 부친과 형제들의 의심을 받았고, 그의 봉국도 몽골초원에서 가장 먼 곳을 받는다. 그리고 나이 겨우 40에 우울하게 죽는다.
원순제도 유사한 경력이 있다. 원순제의 숙부인 원문제(元文帝)는 공개적으로 그의 혈통을 부정한 적도 있다. 처음에 원문제는 자신의 형인 원명제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생각했다. 예법대로라면 당시의 장남인 원순제가 황태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원순제의 유모가 밀고한다: "원명제는 생전에 자주 얘기했습니다. 원순제는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그리하여, 원문제는 원순제를 고려로 유배보내고, 그 혼자 대청도에 거처하도록 한다. 꼬박 1년간 그는 외인과 접촉할 수 없었다. 그 후 원문제는 천하에 조서를 내린다: 원명제가 서북에 있을 때, 자주 원순제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원순제를 다시 광서 정강으로 유배보낸다. 원문제가 죽은 후, 원순제의 동생인 의린질반(懿璘質班)이 먼저 황제에 오른다. 얼마후 의린질반이 요절하면서 비로소 원순제가 황제에 오른다. 원순제는 즉위후에 자신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애매하게 말한 바 있다: "나의 집안 일을 너희 외인들이 어찌 알겠느냐?"
원순제 혈통의 수수께끼는 또 다른 한가지 방증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15년 오월 십팔일, 무영문에서 명성조 주체와 여러 대신들이 함께 송나라 여러 황제의 화상을 감상한 바 있다. 주체는 웃으며 말했다: "송태조 이하 모두 비록 호양비(胡羊鼻)이지만, 기질이 청구(淸癯)하여 태의(太醫)같구나!" 다음 날, 주체는 다시 무영문으로 와서 원나라 여러 황제의 화상을 본다. 주체는 원나라황제들이 하나같이 괴위웅매(魁偉雄邁)한 것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 "모두 양고기를 먹어서이구나." 원순제의 화상을 보고는 주체가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왜 이 화상만 태의같을까?"
당연히 위에 쓴 것은 모두 역사상의 각종 전설을 기록한 것이다. 원순제의 진실한 신분은 아마도 영원히 수수께끼일 것이다. 송나라 조씨황족의 최종운명은 후세인들이 탄식하게 만든다. 왕조가 교체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처지는 모두 선택의 여지도 없고 비감하고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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