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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문천상(文天祥)은 왜 동생이 원(元)에 투항하는 것을 용납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7. 3. 11.

글: 조종국(曹宗國)


문천상에게는 동생이 3명 있었다. 문벽(文璧), 문정(文霆), 문장(文璋). 그중 문정은 요절했다. 1278년 문천상이 원에 포로로 잡혀서 투항하지 않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둘째동생 문벽은 혜주(惠州)를 지키다가 원나라군대가 대거 진격헤 들어오자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막내동생 문장도 그를 따라 원에 귀순한다. 이에 대하여 당시에 어떤 사람은 그들이 문천상의 충열에 너무나 흠이 가게 하였다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문천상 본인은 그들의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을 분아니라, 동생들이 원나라에 투항한 것이 절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사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문천상이 주로 효절(孝節) 즉 효도와 절개를 고려했다고 말한다. 문벽은 일찌기 스스로 투항한 이유를 썼다. 우선 자신은 원나라군대가 막 남송을 침입했을 때의 투항파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가 원에 투항할 때는 남송이 실질적으로 이미 멸망한 후이다. 항쟁을 한다면 그저 전체 성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갈 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종사(宗祀)를 끊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문천상에게는 원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은 요절하고, 한명은 전란중에 잃어버렸다. 문젹은 자신의 아들 하나를 문천상에게 양자로 보낸다. 그리하여 제사가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천상의 모친은 타향에서 죽었는데 매장을 못하고 있었다.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와서 매장함으로써 효도를 다해야 했다. 문천상도 문벽에게 보낸 시 <기혜주제(寄惠州弟):(혜주의 동생에게 부치다)를 썼다. 시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오십년형제(五十年兄弟), 일조생별리(一朝生別離), 안항장이의(雁行長已矣), 마족원하지(馬足遠何知), 장골지무지(葬骨知無地), 논심갱유수(論心更有誰), 친상군자진(親喪君自盡), 유자시오아(猶子是吾兒)" 이 시에서 그는 동싱에 장남인 그를 대신하여 효도를 다해줄 것을 부탁했다. 문천상은 막내동생 문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원나라에 투항한 것을 질책하지 않고, 그저 그에게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권했을 뿐이다. 문천상은 또한 문벽이 그에게 양자로 보내준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생부(문벽)와 너의 숙부(문장)는 몸을 온전히 하여 제사를 이었다. 이는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는 것이다. 각가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문천상은 자신이 남송을 위하여 충절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에서도 호연정기를 보여주지만, 그는 온집안이 충렬하다는 명성을 얻기를 원하지는 않았고, 충과 효를 가급적 다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문천상의 태도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원인은 필자의 생각으로 당시 문천상의 항원투쟁에 대한 사상과 인식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학계에서 내놓은 문천상이 동생에게 보낸 서신을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대송을 위하여 죽는다. 나는 죽어야할 곳에서 죽는 것이다. 너는 대원에서 관리를 지내는 것도 너에게는 정정당당한 일이다. 우리 둘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대송의 봉록을 먹었으니 나는 죽어야 하고, 너는 원의 봉록을 먹었으니 너는 살아야 한다. 문천상은 이런 시도 쓴 바가 있다: "강상매화도자호(江上梅花都自好), 막분지북여지남(莫分枝北與枝南)"(강의 매화는 모두 좋다. 가지가 남쪽으로 향하든 북쪽으로 향하든 나누지 말라." 당시의 문천상이 보기에, 송과 원의 싸움은 외족이나 적국의 침략에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 민족의 싸움이고 왕조교체였다. 형제간에 각각 다른 주군을 선택하고 각각 충성을 다하는 것도 군신의 도리와 선비의 절개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인식은 우리가 현재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견해와는 차이가 크다. 다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이 아마도 그의 당시 진실한 사상일 것이다. 문천상이 남긴 많은 시문을 보면, 그가 주로 나타낸 것은 송왕조에 대한 충절이다. 민족항쟁에 대한 내용은 아주 적다. 문천상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당시 남송의 많은 항전지사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송이후, 중국인의 한통(漢統)사상은 크게 개방되었다. 민족인식도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근현대의 국가민족개념과 같이 볼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원,송간의 싸움은 중화민족내부의 투쟁이라고 봐야 한다. 쿠빌라이라는 이 몽골족은 중국의 영토내에서 번성했고, 그가 건립한 원왕조는 몽골대제국의 속국(그 당시 몽골대제국은 이미 해체되었다)이 아니라, 독립하여 중국을 통치하는 하나의 왕조였다. 중국역대왕조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아직 유목수렵의 생산단계에 속해 있던 낙후민족이 더욱 발달한 농경민족을 지배하다보니, 민족탄압과 문명진보를 저해하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이는 다른 문제이다.


이 견해에는 당연히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각도에서 보자면, 문천상은 절사충열(節士忠烈)이기는 하지만, 민족영웅은 아니다. 사실상 2003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신판 역사교과서에서는 문천상을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의 신판 <고중역사교학대강>의 주편 여계원(余桂元)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유물주의관점으로 과학적으로 우리나라역사상의 민족전쟁을 분석해보면, 국내만족간의 전쟁은 형제간의 싸움이고, 집안의 싸움이다. 이런 관점에 기하여, 우리는 외래침략에 반대한 걸출한 인물인 척계광, 정성공등을 민족영웅이라 칭할 수 있고, 악비, 문천상과 같은 걸출한 인물은 우리가 비록 그들이 민족약탈과 민족탄압을 반대하는 역할과 작용이 있었지만, 민족영웅이라 칭할 수는 없다" 문천상이 동생을 대한 태도는 아마도 이런 견해의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