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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을 둘러싼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1. 13.

작자: 미상


왕방(1044-1076), 자는 원택(元澤), 왕안석의 아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왕안석이 변법을 추진할 때 힘이 되는 조수였다고 한다. 일찌기 신법의 기획과 제정에 참여하고, 신법의 추진과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그의 지력(智力)과 여러 방면의 묘사와 평가는 혹은 신동이라고 하고 혹은 심히 폄하하기도 하고, 혹은 터무니없는 얘기도 있어서 후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들 정도이다.


<송사.왕안석전>의 후부(後附)로 왕방의 간전(簡傳)이 있다, 거기에서 왕방은 "성격이 아주 재빨랐고, 약관이 되기 전에 이미 수만자의 책을 썼다." 13살때, 군인들이 서북변방의 일을 논하는 것을 듣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땅은 마땅히 안무(安撫)의 방법으로 보유해야 한다. 만일 서하(西夏)가 이 땅을 가져간다면 변방의 화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조정에서 왕소(王韶)를 파견하여 희하(熙河)를 파게 하고, 왕안석도 그 책략을 적극 주장한다. 즉, 아들의 이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 묘사를 보면 그냥 '신동'이다. 왕안석은 이런 시를 지은 적도 있다: "사문실유기(斯文實有奇), 천개우생재(天豈偶生材)" 이렇게 아들의 재능을 칭찬했다.


치평4년(1067년) 진사가 되고 정덕현위(旌德縣尉)가 된다. "작책삼십여편(作策三十餘篇), 극론천하사(極論天下事)", 그는 당시 사회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가 없을테니까. 그리고, "<노자훈전(老子訓傳)> 및 <볼서의해(佛書義解)>를 썼는데 역시 수만자이다" 그는 도가, 불학에 대하여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같다. 왕안석은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조정에서 중용받게 하기 위하여, 아들이 쓴 책문과 도덕경주석을 책으로 출판하여 판매한다. 이를 보면 그의 학문은 어느 정도 시장에서도 통했다는 것이다. 황상을 만나고나서 태자중윤(太子中允),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의 직을 내린다. 그리고 학교, 과거의 신법개혁때, <삼경신의(三經新義)>중에서 <시의(詩義)>와 <서의(書義)>를 명을 받아 쓴다. 그리고 천장각시제(天章閣詩制) 겸 시강(侍講)의 관직을 얻는다. "책을 완성하고,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내렸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는 유가경전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으며 새로운 해석을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십세도 되지 않아서 이미 엄연한 학문의 대가가 된 것이다.


그런, <송사>의 그의 <전>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사람됨이 표한음각(慓悍陰刻)하여 무소고기(無所顧忌)했다." "비예일세(睥睨一世)하고 부능작소관(不能作小官)했다"고 한다. 주로, "왕안석이 변법을 시행할 때, 왕방이 실제로 주도했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상앙은 호걸지사이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죽이지 않으면 법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소씨견문록(邵氏見聞錄)>에도 이런 말이 있다. 왕방은 "마음이 음험하고 사악했다(心陰惡). 왕안석의 아래에서 인간성없는 일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왕방이 가르친 자들이다." 두 책에는 모두 이런 이야기를 싣고 있다. 희녕2년(1069년), 왕안석이 권력을 잡고 삼사조례사(三司條例司)를 두어 신법을 주재하는 기구로 삼았다. 그리고 태자중윤 정호(程顥)를 삼사조례사에 임용했다.  하루는 더운 여름날(盛暑), 왕안석과 정호가 집안에 마주 앉아서 일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왕방이 맨발로 봉두난발을 하고 부인들이 쓰는 모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부친에게 물었다: "두 분은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요." 왕안석이 말한다: "신법이 여러번 사람들의 제지를 받아서, 지금 정군과 상의하는 중이다." 왕방은 아주 멸시하는 자세로 앉으면서 큰 소리로 말한다: "한기(韓琦), 부필(富弼)의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내걸면, 신법은 실행할 수 있을 겁니다." 왕안석이 바로 말한다: "아들아 그 말을 틀렸다." 정호도 정색을 하고 말한다: "지금은 네 부친과 국가대사를 논하는 중이니 자제는 간여하지 말고, 물러나시게." 왕방은 불만섞인 모습으로 물러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왕방이 광망자대하고 예의를 모르는 고관자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학문이 깊은 청년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불(李紱)은 <목당초고. 서소씨견문록후>에서 이렇게 변호한다: "원택(왕방)은 치평4년에 진사가 되고 다음 해 즉 희녕원년에 정덕현위를 받아서 멀리 강남에 부임했다. 그래서 왕안석과 정호가 희년1년에 신법에 대하여 논할 때, 원택은 경사에 없었다. 희년4년이 되어서 비로소 태자중윤, 숭정전설서가 되어, 원칙이 그 후에 경사로 돌아온다. 이때 정호는 정견이 맞지 않아 경사를 떠나 외지로 나간지 이미 1년이 지났다. 그래서 왕방이 왕안석과 정호가 정사를 논하는 것을 들었을 리가 없다. 동시에 정호는 희녕2년 팔월에 조례사관이 되고, 다음헤 오월에 이미 외지로 나가 지방관을 지낸다. 이 관직을 맡은 것은 늦가을에서 초여름까지이므로, 중간에 무더운 여름은 없다. 이를 보면 날조가 분명하다, 게다가, 한기, 부필의 연배는 모두 형공(荊公, 왕안석에 대한 존칭)보다 앞이고 모두 재상을 지냈다. 덕고망중(德高望重)한 인물들이다. 절대로 정호와 비교할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정호는 원택(왕방)보다 겨우 9살이 많았고, 진사도 겨우 10년이 앞섰을 뿐이다. 그리도 그 당시에는 왕안석의 부하였다. 그런데 왕방이 감히 한기,부필을 참수해야한다고 소리치고, 정호가 정색을 하고 혼을 내고, 자리를 피했다는 것은 정리에도 맞지 않는다. 이를 보명 이 이야기는 확실히 날조일 뿐아니라, 소씨가 쓴 기록중에서 보고듣는 사람이 가장 깜짝 놀랄 이야기이다.


그외에 위태(魏泰)의 <동헌필록(東軒筆錄)>에는 왕씨집안의 생활에 관한 자잘한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왕방은 같은 군의 방씨녀(龐氏女)를 처로 맞이하는데 1년여가 지나서 아들을 하나 낳는다. 왕방은 아들의 용모가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여겨서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한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아들을 죽이려 한다. 결국 그 아들은 놀라고 두려워해서 죽는다. 왕방과 그 처는 매일 싸웠고, 왕안석은 아들에게 병이 있고, 며느리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이렇게 부부를 이혼시키면, 며느리가 억울하게 악명을 뒤집어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별도로 남편감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출가시킨다. 이때 공부원외랑 후숙헌(侯叔獻)이 사망하고, 후숙헌은 바로 왕안석의 제자였으며 관계가 아주 좋았다. 후의 처인 위씨(魏氏)는 성격이 사나웠고, 후숙헌이 죽은 후에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고, 경박하게 돌아다녔다. 형공(왕안석)은 이 일을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위씨는 후씨집안에서 쫓아내 본가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리하여 경성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왕태축생전가부(王太祝生前嫁婦), 후공부사후휴처(侯工部死後休妻)" 왕태축(왕방)은 살아서 부인을 시집보냈고, 후숙헌은 죽어서 처와 이혼했다.


위태는 당시 변법파관리인 증포(曾布)의 처제(妻弟)이다. 장돈(章惇)도 여러번 그를 칭찬한 적이 있다. 동시에 왕안석 본인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심지어 왕방의 친구라고도 할 수 있다. <옹호청화(玉壺淸話)>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원택이 병이 들었는데 위태가 문명하러 간 일도 있다.  만일 소백온(邵伯溫)은 왕안석의 변법을 반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책에서 날조하여 모함했을 수도 있지만, 위태는 자신의 친구를 중상모략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물며 왕안석과 함께 조정에서 관리로 있던 공평중(孔平仲)도 그가 쓴 책 <공씨담원(孔氏談苑)>에서 같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직접적으로 왕방이 "무혜(無慧)하다"고 말한다. 비록 그가 처는 취했지만,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왕안석은 무고한 며느리를 애석하게 여겨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다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왕방은 그래도 태연했다. 그리고 같은 말이 경성에 나돌았다고 적었다. 이를 보면 그런 말이 한때 경성에서 떠돌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외에 <묵객휘서>, <견문잡록>등 송나라사람들의 필기에서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아무래도 집단적으로 날조한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을까? 왕방은 무슨 병에 걸렸던가? <동헌필록>에는 이렇게 적었다: "왕형공(왕안석)의 차자(次子) 방(雱)은 원래 심질(心疾)이 있었다. 형공은 그가 실심(失心)한 것을 알고 있었다." 왕벽지는 <승수연담록(渑水燕談錄)>에서 이렇게 적었다: 왕형종의 아들(子) 방(滂)은 어려서 심질이 있었다." 고인들이 말하는 '심질은 왕왕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혹은 '실심(失心)'이라고 하고 혹은 '무혜(無慧)'하다고도 했다.  만일 왕방의 머리에 문제가 있었다면, 어찌 그렇게 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어떤 경우는 황제의 명을 받아 쓴 것이다. 그리고 어찌 태자중윤, 숭정전설서, 천장강시제 겸 시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신법의 제정과 추진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어떤 학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원택이 약관이 되기 전에 수만자의 저술이 있다"는 것을 보면 머리에 문제가 있을 것같지는 않다. 만일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발기불능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림이 '실심'했다면, 그 부인을 개가시킬 근거가 없게 되니, 형공이 아무리 고집을 하더라도 거기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왕방의 저작은 대부분 잃어버렸다. 겨우 <남화진경신전(南華眞經新傳)>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래서 그의 학문과 재능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근대사람인 여가석(余嘉錫)은 여러 책을 읽고 진지하게 살펴본다. 그리고는 왕안석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결론내린다. 후인들이 동생의 일을 형에게 생긴 것처럼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결론이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속자치통감.장편>에서 찾아냈다. 왕방은 "먼저 종기를 앓고(先病瘍), 다음에 등창을 앓아(後病疽), 치료해도 낫지 않아 죽었다." 그래서 그는 '심질'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등 사적에는 왕방에게 1남1녀가 있고, 그의 처가 정화초년(政和初年)에 남편집(夫家)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왕방의 가정생활은 정상적이라고 본다. 생전에 부인을 시집보내는 괴이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명신비전완담집>에서는 왕안석에게 두 아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왕방(王雱)과 왕방(王旁). 둘은 발음이 비슷하므로 후인들은 왑방(王雱)이 있음만 알 뿐이고 왕방(王旁)이 있었음은 몰랐다는 것이다. 각서(刻書)하는 사람이나 교서(校書)하는 사람은 '방(旁)'자만 나타나면 모조리 '방(雱)'으로 마음대로 고쳐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생의 일이 형에게 일어난 것처럼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승수연담록>에서 "왕형공의 아들 방(滂)이 어려서 심질이 있었다."는 것의 "방(滂)"은 바로 '방(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헌필록>에서 "왕형공의 차남 방(旁)이 원래 심질이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만일 다른 사료가 발견되지 않으면 이 부분의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왕방이 근 천년간이나 '심질'을 앓았다는 억울한 누명은 아마도 벗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왕안석변법간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왕방은 치평말, 희녕초기에 멀리 강남에서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희녕2,3은 왕안석 변법의 가장 관건적인 개창단계이다. 그는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해(呂海)등이 왕안석을 탄핵하는 상소문에서도 그의 아들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다시 희녕4,5년이 되어서 왕방은 경성으로 돌아온다. 변법은 이미 진행되고 있고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왕안석의 변법중 많은 내용에 그 아들도 참여하여 기획하고 제정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후에 왕안석도 아들이 기획한 것이라면 뭐든지 듣는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변법후기에 왕안석은 여혜경(呂惠卿)과 의견이 맞지 않아 공개적으로 부딛친다. 왕방은 관리들을 동원하여 여혜경을 탄핵하고 공격한다. 그리고 관련문서를 사사로이 사법부서에 보내버린다. 여혜경을 그 소식을 듣고 송신종에게 고한다. 왕안석이 "위명교령(違命矯令)하여 망상기군(罔上欺君)의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황제는 왕안석에게 보여주니, 왕안석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돌아와서 왕방에게 묻는다. 왕방이 경위를 얘기하니, 왕안석이 잘못했다고 꾸짖는다. 왕방은 원통하고 분노하여 등창이 발작하여 죽는다." (송사. 왕안석전>. 기재상의 모순이 많다. 왕방이 부친의 변법에서의 역할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왜 나중에 변법을 반대하던 자들은 왕왕 모든 악명을 왕방에게 뒤집어 씌웠을까? 어젼히 불분명하다. 아마도 왕방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을 것같다.